현무암 낙엽길에 내린 단풍, 한라산에서 가을과 작별하다

[여행]by 중앙일보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가장 늦게까지 가을이 머무는 섬에서 가장 청량한 공기를 마시며 걷는 길.”


이맘때 한라산 둘레길의 매력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한라산 둘레길은 어찌 보면 심심한 길이다. 백록담 등반처럼 성취감을 느끼거나 제주올레 걷기처럼 바다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깊은 가을, 숲에서 깊은 안식을 누리기엔 한라산 둘레길만 한 곳도 없다. 여덟 개 코스 중에서 만추를 느끼기 좋은 두 코스를 걷고 왔다.



낙엽 밟는 맛 – 천아숲길




한라산 국립공원 테두리, 해발 600~800m 중산간 국유림에 조성한 걷기여행길이 한라산 둘레길이다. 2010년부터 단계적으로 코스를 조성해 현재 8개에 이른다. 한라산을 한 바퀴 돌지는 못했다. 한라산 북쪽 약 16㎞가 아직 끊어져 있다. 사유지와 국립공원 땅이 섞여 있어 길 조성을 위한 협의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둘레길을 운영하는 산림청은 2022년께 완벽한 순환 코스가 완성되길 기대한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8개 코스는 저마다 개성을 자랑한다. 그러나 사람들 발길은 한 코스에 쏠려 있다. 올해 10월까지 한라산 둘레길 탐방객 86만 명 가운데 79%가 ‘사려니숲길’을 걸었다. 제주도를 대표하는 관광지가 된 사려니숲길은 늘 장사진을 이뤄 입구에 주차하기도 쉽지 않다. 나머지 코스의 인기는 어금지금한데, 가을에만 방문객이 반짝 느는 코스가 있다. 제주에 보기 드문 단풍 명소로 통하는 ‘천아숲길’이다. 사려니숲길의 반대편, 한라산 서쪽 자락에 조성된 8.7㎞ 길이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2일 오후 천아숲길 들머리인 천아계곡에 도착했다. 당황스러웠다. 새빨간 숲을 기대했는데 휑했다. 김서영(53) 한라산 둘레길 팀장은 “며칠 전 한라산에 서리가 내리면서 단풍이 많이 졌다”며 “바닥에 깔린 단풍도 나름의 멋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도를 활용한 트레일에 들어서자 가장 많이 보이는 건 제주조릿대였다. 높게는 허리춤까지 자란 조릿대가 온 숲을 융단처럼 뒤덮었다. 제주조릿대는 제주 고유종이지만 주변 식물의 성장을 막는 골칫거리이기도 하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천아숲길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乾川)이 많았다.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엔 물이 철철 흐른다는데 가문 늦가을엔 물 대신 낙엽이 출렁이고 있었다. 계곡에 깔린 현무암을 덮은 낙엽. 제주다운 가을 풍경이었다.


임도 3.5㎞를 걷자 시원하게 쭉쭉 뻗은 삼나무 군락이 나타났다. 1970년대 조림한 나무들이다. 많은 탐방객이 삼나무 숲에 열광한다. 사려니숲길이 인기인 것도 빽빽한 삼나무 덕이다. 그러나 삼나무는 제주조릿대처럼 천덕꾸러기 신세다. 봄마다 꽃가루가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데다 키 큰 단일 수종이 숲을 장악하는 게 생태계에도 해롭기 때문이다. 자고로 숲은 여러 식물이 부대끼며 살아야 건강한 법이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삼나무 군락을 지나니 천아숲길 종점 ‘보림농장’에 닿았다. 예부터 표고를 재배하던 농장이다. 보림농장 말고도 둘레길 곳곳에서 표고를 재배한다. 사실 둘레길로 활용한 임도 가운데 상당수가 표고 운송용 도로였다.


천아숲길은 초입의 가파른 오르막 200~300m만 빼면 대체로 순했다. 3시간 느긋하게 낙엽을 밟으며 만추를 느끼기에 제격이었다. 길에서 만난 제주 주민 신영철(48)씨는 “온전히 숲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게 둘레길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아픈 역사 - 동백길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호텔스 컴바인 배너 이미지1

이튿날은 ‘동백길’을 걸었다. 2010년 가장 먼저 개방한 한라산 둘레길 코스다. 한라산 남쪽 자락 11.3㎞를 횡으로 걷는다. 출발 지점은 ‘무오법정사’다. 3·1운동보다 한 해 이른 1918년 항일운동을 벌였던 역사적인 장소다. 절터만 남아 있었는데. 2003년 제주도가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탑과 의열사를 세웠다.


의열사 옆, 돌기둥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길이 시작된다. 임도가 대부분인 천아숲길과 달리 동백길은 사람 한두 명만 걸을 수 있는 오솔길이었다. 길 이름처럼 동백나무가 빽빽했다. 동백길에서 붉은 동백꽃을 보려면 3월까지 기다려야 한단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동백길은 천아숲길보다 눈이 즐거웠다. 돌이 많아 내내 바닥을 살피며 걷다가 이따금 고개를 치켜들면 어김없이 눈부신 색 잔치가 펼쳐졌다. 난대상록수와 온대 활엽수가 조화를 이룬 덕이었다. 빨강 노랑 단풍과 싱그런 초록 잎이 어우러진 건강한 숲을 보는 것만으로 눈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입구에서 두세 시간, 얼기설기 둘러친 돌담이 보였다. 한쪽에 ‘4·3 유적지’ 팻말이 서 있었다. 4·3 사건 당시 토벌대의 주둔소로 추정한다. 동백길에는 일제가 한라산 중 산간에 냈던 병참 도로의 흔적도 남아 있다. 착암기로 바위를 깨뜨린 자국을 곳곳에서 마주쳤다. 1945년 2월 1000명에 불과했던 제주도 주둔 일본군은 종전을 앞두고 7만5000명까지 늘어났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동백길에는 삼나무 사촌뻘인 편백나무 군락도 있었다. 벤치에 앉아 피톤치드를 깊이깊이 들이마셨다. 편백나무 군락지에서 1~2㎞를 더 걸으니 한라산 국립공원 남쪽 ‘돈내코 탐방로’와 길이 포개졌다. 이내 남쪽으로 시야가 트였다. 서귀포 시내와 섶섬, 돌섬이 보였다. 빽빽한 숲길이 대부분인 한라산 둘레길에서 모처럼 만난 장쾌한 풍광이었다. 서쪽으로 해가 기울자 억새가 금빛으로 반짝였다. 억새 사이로 풀 뜯는 노루 무리가 보였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5시간 40분을 걸었다. “사람 몸에 가장 좋다는 해발 600~800m 숲길을 원 없이 걸었으니 심신이 충분히 치유됐을 것”이라는 김서영 팀장의 말 때문일까. 이틀간 20㎞를 넘게 걷고 여독까지 얹혔을 텐데 피곤이 느껴지지 않았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여행정보


한라산 둘레길은 출발지와 종점이 다르다. 렌터카를 가져가면 차를 세워둔 장소를 다시 찾아가야 해 영 번거롭다. ㈔한라산둘레길은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240번 버스가 천아숲길과 동백길 코스를 모두 지난다. 둘레길은 바닥에 돌이 많다. 접지력이 좋은 등산화를 신는 게 좋다. 자세한 길 정보는 한라산둘레길 홈페이지 참조.


제주=글·사진 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호텔스 컴바인 배너 이미지2
2022.08.07원문링크 바로가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뉴스, 중앙일보
채널명
중앙일보
소개글
신뢰할 수 있는 뉴스, 중앙일보
    이런 분야는 어때요?
    ESTaid footer image

    © ESTaid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