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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모든 바위가 부처로 보였다"…굳센 정기에 입 떡 벌어진 산, 어디

by중앙일보


진우석의 Wild Korea ⑨ 전남 영암 월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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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영원하다. 인간은 시간을 적절하게 잘라 효율적으로 잘 써야 하는 존재다. 12월은 한 해를 마무리할 때다. 월출산(809m) 도갑사에서 홀로 머물며 2023년을 찬찬히 되돌아보기로 했다. 산사의 긴 긴 밤은 반성하고 성찰하기 좋은 시간이다. 템플스테이 후에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월출산에 올랐다. 지난 9월 ‘하늘 아래 첫 부처길’이 개통했다는 소식이 반가웠다. 산에서 만나는 앙상한 나무와 형형한 바위는 무언가 깨달음을 줬다.



산사의 신비롭고 긴 긴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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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도갑사에 도착해 선불장(選佛場) 건물 방 한 칸을 배정받았다. 방은 작지만 정갈했고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방문을 여니 대숲 넘어 월출산 줄기가 보였다. 신라 말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도갑사는 호남에서 손꼽히는 명찰이다. 건네받은 생활한복으로 갈아입고, 국보인 해탈문과 보물인 미륵전의 석조여래좌상, 도선국사비 등 도갑사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저녁 공양 후에 스님과 꽃차를 마시며 ‘내가 나를 지켜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성찰의 화두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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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의 어둠은 빠르다. 땅거미 내려앉는 고요하고 신비로운 산사를 누릴 수 있는 건 템플스테이의 특권이다. 대웅보전 앞 오층석탑을 탑돌이 하며 ‘나를 지켜주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방에 들어와 가부좌 틀고 화두를 붙잡았다. 열이 올라 방 문 열고 별을 바라보다가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꿈속에서도 화두를 붙잡으려 했을까. 잠이 깨면서 ‘욕심을 부리지 말자. 계속 여행을 떠나자’라고 중얼거렸다. 이것이 나를 지켜주기를 바란다.



‘하늘 아래 첫 부처길’을 따라서


아침을 든든히 먹고, 공양주 보살이 주신 군고구마와 바나나를 야무지게 챙겼다. 도갑사에서 바로 올라가는 등산로 대신에 녹양마을에 있는 ‘하늘 아래 첫 부처길’을 선택했다. 월출산 유람하던 선비들이 다니던 옛길이다. 길은 용암사지와 마애여래좌상을 거쳐 구정봉까지 이어진다. 조선 시대에는 구정봉을 월출산의 정상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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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양마을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 바로 위에 대동제가 자리한다. 큰골에서 내려온 물을 가두는 거대한 저수지로 영암 군민의 식수원이다. 대동제 위로 콸콸 좔좔 쏟아져 내리는 계곡을 따른다. 날이 맑은 덕분에 산죽, 참식나무, 대나무 등이 반짝반짝 빛난다. 한겨울 풍요로운 녹색 빛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어젯밤 나름 수행을 해 그런지 겨울 빛과 낙엽 밟는 소리, 물소리가 다 고맙다.


수행의 미덕은 인내다. 거의 2시간에 걸친 인내 끝에 용암사지에 닿았다. 어쩌자고 이리 높은 곳에 절을 지었는지. 볕 잘 드는 용암사지 너른 공터에는 자연산 머위가 쑥쑥 자라고 있다. “머한다요. 빨리 따 집에 가져가 부러. 안사람에게 이쁨 받는당께.” 배 나온 영암 아저씨의 사투리가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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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사지 언덕에는 걸출한 용암사지 삼층석탑이 자리한다. 딱 봐도 아우라가 강한 잘생긴 탑이다. 탑 아래 앉으면 저절로 수행이 될 것 같다. 용암사지에서 100m쯤 오르면 마애여래좌상을 만난다. 화강암을 우묵하게 파고 그 안에 불상을 새겨 넣었다. 크기가 무려 8.6m다. 고개를 쳐들고 봐야 하는 마애여래좌상을 눈높이로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또 하나의 삼층석탑 앞이다. ‘삼층석탑’ 안내판을 따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둥근 돌덩이를 기단 삼아 탑을 올렸다. 그 파격에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삼층석탑 뒤쪽으로 마애여래좌상이 보인다. 마애여래좌상 덕분에 주변의 바위들이 전부 부처로 보인다. 월출산은 부처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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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층석탑에서 구정봉 가는 길은 눈이 호강한다. 왼쪽으로 천황봉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만큼의 좁을 굴을 통과하면, 대망의 구정봉 정상에 선다. 시야가 거침없고 하늘이 넓게 열린다. 장쾌하고 통쾌하다.



설악산 뺨치는 산세


구정봉은 암반에 9개의 돌우물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바위에 크고 작은 홈이 파였고, 그 안에 물이 고여 있다. 문헌에 따르면 마르지 않은 돌우물에서 용 9마리가 살았다고 한다. 구정봉 근처에 있다는 괴이한 동석(動石)은 아침에는 향로봉 쪽에 있다가 저녁에는 구정봉 쪽으로 움직인다고 한다. 이를 영암(靈巖)이라 불렀고, 고을의 이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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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봉까지 왔는데 천황봉을 안 갈 수 없다. 저 멀리서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구정봉 아래에 베틀굴이 자리한다. 베틀굴은 월출산 바위 중에서도 가장 오묘하다. 여성의 신체 부위를 닮았다. 베틀굴은 천황봉 아래 남근바위와 짝을 이룬다.


천황봉에 서면 하늘에 오른 듯한 뿌듯한 감정이 밀려온다. 하지만 구정봉만큼 충만한 느낌은 아니다. 그래서 선인들은 월출산 최고봉을 구정봉이라고 했나 보다.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은 출렁다리, 바람재, 산성대 세 가지다. 주차장까지 3.3㎞로 다른 코스보다 1㎞쯤 길지만, 풍광이 좋은 산성대 코스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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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거리에서 산성대 코스로 접어들면, 아기자기한 암릉이 이어진다. 어려운 구간은 계단을 깔아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다. 산성대 코스 중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오르면 입이 떡 벌어진다. 천황봉에서 내려온 산줄기 중 하나는 출렁다리가 있는 사자봉으로 가고, 또 하나는 산성대로 내려온다. 마치 공룡의 등처럼 거칠고 수려한 산줄기가 설악산 안 부럽다. 봉수대가 있었던 산성대 터를 지나면 영암 시내를 바라보면서 내려온다. 마침내 지루한 길은 주차장에 닿으면서 끝난다. 먼 길이라 피곤했지만 마음한구석이 힘차다. 돌에는 힘이 있다. 월출산의 굳센 정기를 받았으니, 내년에도 힘차게 살아야겠다.


■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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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영 디자이너

템플스테이 홈페이지에 사찰의 특징과 가격 등 정보가 잘 나와 있다. 도갑사는 사람이 많지 않아 호젓하게 머물 수 있다. 월출산 트레킹은 녹양마을 주차장(회문리 산19-2)~용암사지~구정봉~천황봉~산성대~산성대 주차장 코스로, 거리는 약 10㎞ 6시간쯤 걸린다. 거리에 비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대중교통으로 출발점인 녹양마을 주차장을 가려면 택시를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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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석 여행작가

진우석 여행작가 mtswamp@naver.com


시인이 되다만 여행작가. 학창시절 지리산 종주하고 산에 빠졌다. 등산잡지 기자를 거쳐 여행작가로 25년쯤 살며 지구 반 바퀴쯤(2만㎞)을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걷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캠프 사이트에서 자는 게 꿈이다. 『대한민국 트레킹 가이드』 『해외 트레킹 바이블』 등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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