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년간 꺼지지 않는 불꽃…역사·신화 공존하는 ‘키메라 고향’

[여행]by 중앙일보

터키로 떠나는 그리스 신화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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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안 웨이가 지나가는 교이뉴크 협곡. 중국 구채구에서 봤던 그 초록 물빛이다. 물에 석회암 성분이 많이 있으면 이런 물빛이 나온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는 그리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대 그리스는 현재 터키가 들어선 아나톨리아 반도 서남부 지중해 연안 지역까지 아울렀다. 하여 현재의 터키도 그리스 신화의 주요 무대다. 물론 증거도 있다. 그리스 신화 대부분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주요 출처로 하는데, 호메로스가 아나톨리아 사람이다. 아나톨리아 반도 서쪽 해안 도시 이즈미르가 그의 고향이다. 이즈미르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일리아드』의 배경이 된 트로이도 있다. 쉽게 말해 호메로스의 그리스 신화는 고향 아나톨리아에서 전해오던 이야기를 그러모은 설화집이다.


『일리아드』를 보면 아나톨리아 서남 해안을 장악했던 도시국가연합 리키아(Lycia)가 나온다. 트로이를 침략하러 바다를 건너온 그리스 연합군 아카이아 세력에 맞선 아나톨리아의 강력한 고대 국가다. 이 리키아의 주 영토가 현재 터키 남부 안탈리아(Antalya) 지방이다. 11월 중순 지중해 연안 볕바른 갯마을에서 신화와 역사가 뒤엉킨 현장을 목격하고 왔다. 신종 바이러스 오미크론이 발견되기 전이다. 자칫 해외여행이 다시 닫힐지 모를 요즘이어서 조심스럽다. 하나 누천년을 내려온 유산이니 코로나 사태가 잦아든 뒤에도 예의 그 모습일 테다.

리키안 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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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안웨이 지도. 왼쪽에 페티예가 있고 오른쪽 끝에 안탈리아시가 있다.

리키아는 최소 BC 1250년 터키 남부 지중해 연안 테케 반도 지역에서 일어난 고대 국가다. 고유 문자를 사용했을 정도로 찬란한 문화를 자랑했었다고 한다(리키아 문자는 아직도 해석하지 못한다). 아나톨리아 반도 남쪽을 가로지르는 800㎞ 길이의 타우로스 산맥 아랫자락, 지중해 해안을 따라 띄엄띄엄 놓인 23개 도시가 옛 리키아의 영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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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안 웨이 이정표. 이정표에 리키아 욜루(Likya Yolu)라고 쓰였다.

이 3000년 전 왕국의 옛 도시를 잇는 트레일이 리키안 웨이(The Lycian Way)다. 터키에서는 리키아 욜루(Likya Yolu)라고 한다. 페티예(Fethiye)에서 안탈리아시까지 약 509㎞ 길이로, 영국 ‘선데이 타임스’가 선정한 세계 10대 트레일이다. 연 탐방객이 약 4만 명에 이른다는 리키안 웨이는 한국의 걷기여행 매니어에게도 친숙한 트레일이다. 2018년 한국의 제주올레가 터키의 리키안 웨이와 우정의 길 협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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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르타쉬의 불꽃. 바위틈에서 이렇게 불이 활활 타오른다. 이런 불구덩이가 산기슭에 수십 군데 있다.

안탈리아시에서 미라(Myra)까지 리키안 웨이의 주요 코스를 걸었다. 산을 오르면 3000년 전 도시가 나타났고, 해변을 걸으면 오늘의 터키가 눈에 밟혔다. 신이 빚은 장엄한 자연과 인간이 일군 위대한 도시가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모퉁이를 돌거나 고개를 넘을 땐 자주 걸음을 멈췄다. 누천년 쌓인 시간이 불쑥 튀어나와 여행자를 놀랬다. 리키안 웨이를 걷는 건, 공간 여행과 시간 여행을 동시에 경험하는 일이었다.

꺼지지 않는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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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아의 도시 올림포스. 폐허가 된 수천년 전 시청 건물에서 아이가 뛰어놀고 있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키메라(Chimera)를 아시는지. 머리는 사자, 몸은 염소, 꼬리는 뱀의 형상을 한 괴물이다. 입에서 불을 뿜는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이오바테스의 명령으로 영웅 벨로로폰이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를 타고 키메라를 무찔렀다. 이오바테스는 리키아의 왕이었다.


허무맹랑한 전설에도 근거가 있게 마련이다. 리키안 웨이가 지나는 츠랄르(Cirali)라는 작은 마을 뒷산에 키메라 전설이 내려온다. 놀랍게도 산기슭 바위틈에서 불꽃이 올라온다. 수천년간 한 번도 꺼지지 않았다는 신성한 불꽃이다. 츠랄르에서 30분 정도 산길을 오르면, 신화보다도 더 황당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 신비의 현장이 야나르타쉬(Yanartas)다. ‘야날’이 ‘불’이고 ‘타쉬’가 ‘돌’이니 불타는 바위라는 뜻이다. 한낮에도 너덜지대 여남은 곳에서 올라오는 불꽃이 보이지만, 해가 지면 훨씬 많은 불꽃이 보인다.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비가 아무리 내려도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대는 화산 활동 지대가 아니다. 지중해 연안 석회암 지대다. 불꽃이 나오는 구덩이를 조사했더니 메탄가스가 다른 지역보다 많이 검출됐다고 한다. 그렇다 해도 최소 2500년이나 바위틈에서 불꽃이 올라오는 이유는 설명하지 못한다. 세상에는 신화를 빌려와야 납득되는 비경도 있다.

폐허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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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년 세월을 견디고 아직도 서 있는 올림포스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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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르타쉬는 해발 2365m 타흐탈르산 발치에 있다. 타흐탈르산의 다른 이름이 올림포스산이다. 그리스의 올림포스산이 터키에도 있다. 산 아래 해변에는 올림포스라 불리는 리키아의 고대 도시도 있다. 지금의 올림포스는 평화로운 폐허였다. 도시 유적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시청, 신전, 광장, 시장, 무덤 등 없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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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암벽 동굴. 산기슭을 따라 암벽 무덤이 들어선 유적지다.

올림포스인은 불을 신성시했다. 불의 신 헤파에스투스를 숭배했다. 야나르타쉬의 영향 때문일 테다. 야나르타쉬와 올림포스는 7㎞ 거리다. 야나르타쉬에서 흘러내린 개천이 올림포스까지 이어진다. 이 도시에 키메라와 관련한 흥미로운 전설이 내려온다. 키메라를 물리친 벨로로폰을 기리기 위해 올림포스에서 달리기 경기를 했단다. 키메라의 불꽃을 횃불에 담아 해안의 올림포스까지 달려오는 시합이었다. 이 횃불 달리기가 훗날 올림픽 성화 봉송의 기원이 됐다고 한다. 어디까지가 신화고, 어디까지가 역사일까. 보면 볼수록 모르겠고, 알면 알수록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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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도시 테르메소스는 해발 1800m 산꼭대기에 숨어 있었다. 사진은 4200명까지 수용했던 원형 극장이다.

리키안 웨이가 지나는 도시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은 도시가 미라(Myra)다. 『론리 플래닛』에서 미라를 소개한 글을 인용한다. ‘시간상 딱 한 곳의 리키아 암벽 무덤만 봐야 한다면 미라의 유적지를 선택하자.’ 리키아 유적 중에서 무덤이 특히 높은 평가를 받는데, 그중에서도 미라의 무덤 유적은 특별하다. 가이드북은 암벽 무덤이라고 적었지만, 산 전체가 동굴 무덤으로 가득하다. 정교하게 판 동굴에 돌무덤이 칸칸이 들어가 있다. 리키아인은 높은 곳에 묻힐수록 천국에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고 믿었다. 그래서 산꼭대기에 무덤을 들였다. 높은 곳의 무덤일수록 높은 사람의 무덤이라고 한다.

터키의 마추픽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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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메소스. 무너져 내린 돌 무더기 속에서도 옛 모습을 간직한 유적이 남아 있었다.

리키안 웨이는 3000년 묵은 옛길이다. 오랜 세월 잊혔던 길이 현대적 의미의 트레일로 거듭난 건 영국 출신 케이트 클로라는 여성 덕분이었다. 안탈리아에 살던 그는 1980년대 리키안 웨이를 수없이 답사하며 이정표를 설치하고 트레일을 조성했다. 그녀는 리키안 웨이의 방향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잡았다. 그래서 현재 리키안 웨이를 걷는 탐방객 대부분이 페티예에서 시작해 안탈리아시를 종점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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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800m 산꼭대기에서 만난 붓꽃. 안탈리아 지방 고유종이라고 한다.

안탈리아시 외곽의 고대 도시 테르메소스(Teremessos)가 리키안 웨이의 종점으로 통한다. 테르메소스도 어처구니없는 유적이다. 해발 1800m 산꼭대기에 1만 명이 살았다는 도시가 숨어 있다. 역사는 아무도 모른다. BC 70년 로마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미 그때 테르메소스는 고대 국가로서 모습을 갖춘 상태였다. 테르메소스는 리키아 유적이 아니라 산에 숨어 살던 피시디안(Picidian)의 유적이란 사실만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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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메소스는 터키의 마추픽추라 할 만하다. 산길을 1시간 가까이 오르면 산 정상에서 고대 도시가 거짓말처럼 나타난다.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최대 4200명을 수용했다는 원형 극장도 있고, 대형 목욕탕 건물과 거대 광장도 있다. 폐허가 된 도시에는 이름 모를 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자료를 뒤져보니 안탈리아 지역 고유종 ‘테르메소스 키그뎀(Teremessos Cigdemi)’이었다. 가을에 피는 붓꽃의 일종으로, 안탈리아 고유종 250개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꽃이라고 한다. 21세기 동양에서 온 여행자처럼 3000년 전에도 이 꽃을 한참 들여다본 사람이 있었을 테다.


안탈리아(터키) 글ㆍ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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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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