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내가 누군데 감히" 허세 떨다간···

[비즈]by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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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에서 부장으로 일하던 최수철(58)씨는 3년 전에 명예퇴직을 했다. 그는 퇴직 후에 본인이 내렸던 잘못된 의사결정에 대해 너무도 후회하고 있다. 최 씨가 퇴직하는 시점에 공기업들이 일률적으로 임금피크제를 실시했는데, 대상자인 선배들의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명예퇴직을 하게 되면 남은 기간의 급여를 일괄 지급한다는 조건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래 내가 뭘 못하겠어”하는 막연한 자신감으로 최 씨는 명예퇴직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가장 먼저 각종 보험부터 확인했다. 실업급여는 3개월 후부터 최고 금액인 월 130만 원씩 8개월 동안 받을 수 있었다. 건강보험은 지역으로 바뀌면서 매월 30만원 이상의 보험료를 부담해야 했다. 국민연금은 1961년생이므로 63세부터 받을 수 있었다. 실직상태이기 때문에 연금 보험료를 내지 않으면 월 110만 원 정도를 받을 수 있고, 만일 일정 금액을 내면 120여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일단 납부유예신청을 했다.







퇴직 후 유일한 월수입은 실업급여 130만원

그리고 본인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과 부채를 점검했다. 보유 재산은 거주하는 아파트가 6억 원, 고향에 상속받은 농지가 1억 원, 퇴직금(명퇴금 포함) 2억 원, 펀드 등 금융자산 7000만 원, 아파트 담보대출금 1억 5000만 원이었다. 그리고 소득공제용으로 가입했던 연금이 하나 있는 정도.

성실하고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막상 하나하나 따져 보니 참으로 암담했다. 외동아들이 대학 졸업반이어서 추가적인 학비 부담은 없지만, 결혼자금 2억 원 정도는 생각해야 했다. 지출 내역을 살펴보니 아무리 절약한다고 해도 아파트 담보대출 이자, 아파트 관리비, 보험료, 생활비, 품위 유지비 등을 고려하니 월 350만 원 정도는 필요했다.


들어올 소득은 없고, 나갈 비용은 많고…. 그나마 1년은 고용보험에서 나오는 실업급여로 어느 정도 충당한다고 해도 그 후가 문제였다. 알량한 국민연금도 앞으로 8년 후에나 받을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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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최 씨가 그동안 쌓아온 실력과 명성, 주변 지인들에게 베푼 것을 생각해 보면 지금 명예퇴직을 선택한 것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휴식과정이라고 생각됐다. 일단 부인과 그동안 하고 싶었던 유럽 여행부터 다녀왔고 색소폰을 배우는 등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들을 했다. 그리고 10년 이상 굴렸던 낡은 자동차를 처분하고 신차를 구매했다.


부인은 “아니, 앞으로 수입도 없는데 왜 돈을 쓰냐” 며 만류했다. 하지만 ‘주변에 나 최수철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해’라는 생각에 평소 갖고 싶었던 고급 자동차를 구매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현직에 있을 때는 간이라도 빼줄 것 같았던 거래처 사람들은 연락이 끊겼고, 어쩔 수 없이 취업하려고 알아보니 현업에서 손 떼고 오랫동안 관리자로 있었기 때문에 직장 경력을 살리기가 여의치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본인이 명예퇴직했음을 적극적으로 알리면서 총무나 관리와 관련된 일을 구한다고 광고하며 다녔다.


또한, 고용 노동 지원센터에 구직등록을 하고 와 서울시와 구청 홈페이지의 구직코너에 등록했다.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연락 오는 곳은 단순 판매직이나 다단계 업체, 자금을 투자해 회사를 공동운영하자는 곳이었다. 또 정상적인 회사에서는 터무니없는 급여를 제시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나 최수철이 누군데, 감히 그런 급여를 제시해. 차라리 집에서 놀고 말지.” 그러면서 시간만 흘러갔고, 통장의 잔고가 눈에 띄게 줄어가고 있었다.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늪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다.


지인이 새로운 형태의 비즈니스를 소개했는데, 초기에 큰 자금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명의를 빌려주는 것도 아니고, 나만 열심히 하면 많은 소득이 보장됐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동료의 통장에 입금된 금액과 내 통장에 입금된 금액의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욕심이 생겼다. 더욱 미친 듯이 일했다. 그렇게 1년 반이 지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최 씨가 그렇게 싫어했던 불법 다단계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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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자산 퇴직 1년 반 만에 바닥

본인의 가지고 있던 현금자산은 사업비와 생활비 등으로 모두 소진되고 오히려 부채만 늘었다. 잦은 신용카드 연체로 신용등급이 크게 떨어지면서 대출이율이 올랐다. 결국 사업을 정리하면서 소득이 중단돼 매월 늘어난 이자를 부담하기가 버거워졌다. 이런 상황이면 그나마 남아있던 집도 언제 은행 손에 넘어갈지 모르겠다.

퇴직자는 많은 위험에 노출되는데, 그중 돈과 관련된 부분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퇴직 후에는 수입이 끊기기 때문에 당연히 지출을 줄여야 한다. 보통 퇴직 전과 비교하면 30% 정도 줄인다고 한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새로운 일을 하거나 재취업이 쉽게 되면 문젯거리가 없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심각해진다.


퇴직하는, 특히 정년퇴직하는 사람은 다음 사항을 명심하자. 먼저 퇴직하는 시점에 본인이 가지고 있는 자산을 정리하자. 정기적금, 예금, 펀드 등 모든 통장을 꺼내놓고 통장별 잔고를 정확하게 파악한다. 그리고 장기 모기지론, 자동차 할부금, 신용 대출 등 가지고 있는 부채목록을 정리하자. 여기서 주의할 것은 신용카드 사용금액 중 결제하지 않은 사용액은 부채 항목에 추가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본인의 퇴직 시점에 가지고 있는 부채를 0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불요불급한 자산은 매각해 부채 상환에 사용한다. 제일 애매한 것이 부채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장기모기지론(15년 이상의 아파트 담보대출)인데, 과감하게 정리해야 한다. 퇴직 후 수입은 확 줄어들어 매월 몇십만원에서 백만원 이상의 금융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럽다.


또 한 가지 퇴직 후에 들어올 수입을 확인해야 한다. 퇴직 직후에 매월 지급되는 실업급여 금액과 기간을 확인해야 한다[고용보험 실업급여 홈페이지]. 국민연금의 수급 시기와 수급 금액을 확인한다[국민연금공단 홈페이지]. 그 외 연금저축보험 등 퇴직자가 개인적으로 준비한 연금들이 있다. 이는 금융감독원 통합연금 포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것은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수령해서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연금으로 수령할 것인가다. 퇴직 후에 언제 얼마의 연금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급되는지를 확인해 보면 현재 내가 생각하는 생활비를 연금으로 충당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 부족할 것이다.


그러면 앞에서 확인한 보유 자산을 활용해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 되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내가 몇 살까지 살 것인가다. 판단의 기준은 부부 중 부인으로 해야 하는데, 나이 차이가 있고 여성이 남성보다 6년 이상 오래 살기 때문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넉넉히 잡아야 한다. 90세까지 생존할 줄 알았더니 100살까지 생존하게 되면 10년의 공백이 생기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늪'

이렇게 계산해 보면 단순한 산술계산으로도 60세에 4억원의 자산을 가지고 100세까지 산다고 하면 월 83만3000원을 사용할 수 있고, 이것을 연령대별 연금액과 합하면 한 달 생활비가 얼마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참고로, 이 계산에는 물가상승분이 반영되지 않았고, 여유자금의 운용방법이 빠져 있다)

퇴직 후 생활비를 얼마를 생각하고 있든 간에 현실은 냉혹하다. 먼저 계산된 월 생활비에 맞춰서 생활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비용부담이 큰 사용자산인 자동차는 과감하게 처분하고, 휴대폰 통신사 바꾸고, 해외여행·골프는 꿈도 꾸지 말자. 이렇게 생활하면서 취업을 해 여윳돈이 생기면 그때 해외여행 가는 거고, 운 좋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이 생기면 친구들과 퍼블릭골프장을 찾는 거다. 이런 준비가 안 되면 100세 시대를 버틸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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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례자는 많은 퇴직자의 모습이다. 퇴직 전의 생활 중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데, 매우 고통스러운 선택이다. 그냥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다간 ‘늪’에 빠지게 된다. 서서히 빠져들다가 어느 순간에 코까지 빠지게 되면서 정신을 차리게 되지만, 그때는 빠져나오기가 불가능하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여유자금은 모두 소진했고, 이때 선택하는 것이 준비 안 된 창업을 해 그나마 남은 재산을 탕진하거나, 위 사례자처럼 불법 다단계에 빠져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생긴다.


박영재 한국은퇴생활연구소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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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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