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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BMW 김누리 디자이너
"그림실력 만큼은 한국인 못따라오죠"

by중앙일보

BMW 3시리즈 인테리어 총괄한 디자이너 김누리씨

중앙일보

김누리 BMW 디자이너가 15일 오후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BMW 전시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왜 한국인 디자이너들이 두각을 나타내느냐고요? 입시미술 덕분이죠.”


한국인·아시아인 최초로 독일 BMW 본사 디자이너로 활동 중인 김누리(35)씨에게 한국인 자동차 디자이너의 경쟁력을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무슨 의미인지 묻자 그는 “그림 실력만큼은 한국인을 따라올 사람들이 없다”고 했다. 아무리 뛰어난 아이디어가 있어도 표현해내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는 얘기였다.


그의 말처럼 한국인 디자이너들은 세계 유수 완성차 브랜드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두각을 나타낸다. GM·벤틀리를 거쳐 현대자동차로 돌아온 이상엽 디자인센터장을 비롯해 볼보 XC60 메인 디자이너로 명성을 떨친 이정현씨, 폴크스바겐에서 사용자 경험(UX) 디자이너로 활동 중인 김소현씨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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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누리씨가 디자인한 BMW 3시리즈의 인테리어 디자인. BMW의 전통을 살리면서도 간결한 선으로 편의성과 심미감을 높였다. 기어 시프트 레버 주변에 엔진 시동 버튼을 포함해 편의 장비 버튼을 모아놨지만 복잡하지 않다. 김 디자이너는 이를 '기능적 섬(fuctional island)'라고 표현했다. [사진 BMW코리아]

김씨는 독일 프리미엄 완성차 브랜드 BMW에서도 대표 차종인 3시리즈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총괄했다. 지난 15일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코오롱모터스 BMW 전시장에서 그를 만났다. 지난주 3시리즈의 한국 출시에 맞춰 3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그는 “3시리즈 디자인을 맡은 건 생애 최대의 부담이자 영광이었다”고 했다.


Q : 입시미술이 경쟁력이란 얘기가 재미있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A : “외국 디자이너들도 뛰어나지만, 한국 디자이너의 그림 실력을 보면 깜짝 놀라요.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그대로 표현해낼 수 있기 때문이죠. 입시미술이 창의력을 죽인다고 하지만 세상에 배워서 쓸데없는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림 실력은 분명 한국인 디자이너들의 경쟁력입니다.”


Q : 예술가는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을 만들지만, 산업디자이너는 대량생산되는 제품을 만듭니다. 어떤 점이 매력적인가요.


A : “순수미술로 시작했지만 사람들이 내가 디자인한 제품을 사용하고 피드백을 주는 게 좋아서 진로를 바꿨어요. 작년에 3시리즈가 독일에서 출시돼서 길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데 뿌듯하더라고요. 세워져 있는 차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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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누리 BMW 디자이너가 15일 오후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BMW 전시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예중·예고를 나온 김씨는 국민대 공업디자인과에 진학하면서 인생 항로를 바꿨다. 처음엔 미국 우주항공국(NASA)에서 우주선을 디자인하는 걸 꿈꿨지만, 강렬한 자동차 디자인에 관심이 생기면서 진로를 한 번 더 바꿨다. 독일 유학을 준비하면서 자동차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정비기능사 자격증도 땄다. 이 경험은 그에게 큰 밑거름이 됐다고 했다.


Q : 디자이너와 실제 양산을 하는 엔지니어는 트러블이 있기 마련일 텐데요.


A : “엔지니어는 디자이너의 적이 아니라 한 배를 탄 동료죠. 정비기능사 준비를 한 게 큰 도움이 됐어요. 자동차의 구조를 알고 얘기하면 엔지니어들이 더 존중하거든요. 자동차 디자이너가 안 되면 정비사로 먹고 살지 하는 생각도 했어요. 하하.”


Q : HS-포르츠하임은 디자인에서는 최고의 학교인데요. 어떻게 지원하게 됐나요.


A : “대학교 4학년 때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기로 마음먹고 유학 준비를 했어요. 2009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BMW가 전시한 ‘비전 이피션트 다이내믹스’ 콘셉트카(i8의 전신)를 보고 매료됐지요. BMW 인턴십에 지원했는데 제 멘토가 바로 이 차의 인테리어 디자이너였어요. 운명적인 순간이었죠. 연예인을 보는 것처럼 행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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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누리 디자이너가 지난 10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미디어 시승회에서 이번 3시리즈의 디자인 철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BMW코리아]

Q : 3시리즈 디자인 콘테스트가 매우 치열했다고 들었습니다.


A : “4년 동안 토너먼트 형태로 진행됐어요. 처음 스케치를 내고 여기서 뽑힌 디자이너들이 다시 컴퓨터 디자인을 하고, 살아남은 최종 2명이 클레이(찰흙)로 실물 모형을 만들죠. 정말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어요. 일희일비하는 순간이 많았지만 자신은 있었어요. 승리의 비결이라면,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이 아니라 회사의 철학을 담은 디자인을 한 거라고 생각해요.”


김씨는 최고의 자동차 회사에서 디자이너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용기를 내면 기회는 열려 있다”고 조언했다. 재능 넘치는 한국의 수많은 디자이너가 꿈을 펼치기에 한국은 너무 좁은 시장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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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누리 BMW 디자이너가 15일 오후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BMW 전시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Q : 외국에 도전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A : “사실 내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큰 결심이 필요하죠. 말도 안 통하고 살아본 적 없는 곳으로 가야 하니까요. 한국에도 좋은 회사가 많지만 자리는 한정돼 있어요.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한국 디자이너들은 실력이 좋아요. 자신감을 갖고 도전하면 충분히 기회는 열려 있습니다. 후배들에게 기회가 있으면 가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나가라고 조언합니다.”


Q :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A : “지금까지 제 고객은 소비자와 내부의 결정권자였어요. BMW의 역사를 만든 수많은 디자이너가 있었잖아요. 크리스 뱅글이 새로운 BMW 디자인의 시대를 열었고, 지금은 제 보스인 아드리안 반 호이동크가 역사를 이어가고 있어요. 저도 언젠간 ‘결정하는 힘’을 갖고 싶죠. 제 비전과 디자인이 고객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