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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영국 왕자 '발레 수업' 비웃은 美 앵커에…"소년들도 춤을 춘다" 역풍

by중앙일보

발레 수업하는 英 왕자에

美 앵커 "얼마나 가는지 보자" 비웃어

댄서 수백명 ABC 방송국 앞에서

뮤지컬 재현하며 항의 퍼포먼스

"소년들도 춤을 춘다" 해시태그도


지난 26일 뉴욕의 타임스퀘어 앞에서 남성 댄서 300여 명이 모여 유명 뮤지컬 '페임'의 한 장면을 선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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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뉴욕 타임스퀘어 앞에서 스펜서의 발언에 항의하는 뜻으로 뮤지컬 페임의 한 장면을 재현하고 있는 댄서들의 모습. [사진 인스타그램]

게릴라 공연처럼 보이는 이 모습은 사실 공연의 얼굴을 한 '시위'였습니다. 이들은 한 방송 앵커의 남성 발레 비하 발언에 항의하기 위해 방송국 스튜디오 앞에 모여 일종의 항의 퍼포먼스를 벌인 겁니다.


비난의 대상은 미국 유명 방송국인 ABC의 아침 뉴스 프로그램, ‘굿모닝 아메리카’의 앵커 라라 스펜서(50)였는데요. 문제의 사건은 스펜서가 22일 생방송 ‘핫뉴스’ 코너에서 영국 왕실의 6살 조지 왕자가 이번 가을 학교에서 배우게 될 커리큘럼을 설명하던 중 발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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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abc방송의 '굿모닝 아메리카' 프로그램에서 조지 왕자의 발레 수업에 대해 비웃듯이 이야기한 라라 스펜서의 모습. [인사이드에디션 캡처]

스펜서는 “장차 잉글랜드의 왕이 될 왕자가 참여할 수업에는 수학, 과학, 역사와 같은 일반 과목 외에도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시문학, 그리고 발레가 포함돼 있다고 합니다. 왕자는 이 발레 수업을 매우 행복해한다고 하는데 과연 얼마나 갈 지는 지켜봐야 겠군요(We will see how long that lasts)”라며 남성 발레 수업을 비웃듯이 말한 것이 미국 공연계를 발칵 뒤집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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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조지 왕자.[AP=연합뉴스]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는 스타 연출가 제리 미첼은 “라라, 진심인가요? 우리는 발레를 합니다. 발레를 하기 때문에 토니상(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수상하는 권위 있는 연극상)을 받기도 합니다. 지금은 2019년입니다. 정신 차려요”라는 메시지를 담은 셀카 동영상을 올렸습니다.


또 다른 안무가인 트래비스 월 역시 스펜서의 코멘트에 대해 "당신은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매우 심각한 문제, 집단 따돌림에 기름을 부은 것"이라고 자신의 SNS에 밝히며 불편한 심경을 숨기지 않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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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뉴욕 타임스퀘어 abc 방송 스튜디오 앞에서 춤을 통해 항의 퍼포먼스를 선보인 댄서들의 모습. [사진 인스타그램]

비욘세, 리한나 등 유명 팝가수와 작업한 안무가 브라이언 프리드먼은 "댄서로 자란 나는 어릴 적 끔찍한 괴롭힘을 경험했다"며 "그녀의 행동은 춤추는 어린 소년을 비웃어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던졌으며, 누군가는 그녀와 같은 행동을 하는 이들 때문에 그들의 열정을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는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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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소년들도 춤을 춘다(boys dance too)" 해시태그가 달린 게시물. [사진 인스타그램]

SNS에는 발레 수업을 듣는 소년들의 사진과 함께 "소년들도 춤을 춘다(#boysdancetoo)" 해시태그가 게시물이 폭주했습니다.


그러자 스펜서는 23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신중하지 못했던 코멘트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발레뿐 아닌 어떤 영역일지라도 그것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고 밝혔는데요.


또 26일에는 생방송을 통해 “그 발언은 멍청하고 몰지각한 것이었다. 소년 댄서들이 자신의 커리어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지 이제야 깨달았다”며 사과의 방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뱉은 말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워싱턴포스트(WP)는 26일 "스펜서가 사과했지만 피해는 이미 발생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남자 댄서들에 대한 차별적 시선은 집단 괴롭힘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WP는 이 기사에서 "미국에서 춤을 추는 사춘기 소년들을 대상으로한 한 연구에 따르면, 응답자 중 93%가 놀림과 괴롭힘을 겪었고, 70%가 언어폭력 혹은 신체적인 학대를 경험했다. 춤을 추는 10대 소년들이 괴롭힘을 당할 가능성은 일반 청소년들보다 7배 높았다"고 전했죠.


성 역할 고정관념이, 재능있는 청소년의 꿈을 꺾고 있다는 지적이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닐지 돌아볼 때입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