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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한국의 실리콘밸리, 판교

담배·커피 5분, PC 미조작 15분…당신, 놀고 있군요

by중앙일보

주 52시간에 깐깐해진 게임업계

5분 넘는 딴짓, 근무시간서 제외

지각·야근 줄고 칼퇴근 효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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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넥슨 차장은 이달 초부터 15분 이상 자리를 비울 땐 인트라넷에 접속해 이유를 적는다. ‘실장님과 미팅’ 등 사유가 있으면 근무시간, 없으면 근무시간이 아니다. 사정은 방마블 과장도 비슷하다. 다음 달부터 15분 이상 컴퓨터를 조작하지 않으면 ‘자리 비움’ 메시지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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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엔씨 과장네 회사는 조금 다르다. 김넥슨 차장네나 방마블 과장네가 자기 자리에 앉아 PC를 조작하고 있는지가 기준이라면, 김엔씨 과장네는 직원이 ‘업무 공간’에 머물고 있는지를 본다. 옥상 흡연실이나 사내 카페 등 ‘비업무 공간’에 5분 이상 머물면 해당 시간은 근무 시간에서 제외된다. 사내 스파, 헬스장 등도 비업무 공간이다. 대신 구내식당이나 사내 도서관, 화장실에 머무는 건 근무로 쳐준다.

포괄임금제 폐지와 동시에 업무시간 효율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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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업계 빅3로 불리는 소위 '3N(넥슨, 넷마블, 엔씨소프트)'에 업무 시간 체크 바람이 불고 있다. [사진 각 사]

게임업계의 거인 ‘3N(넥슨ㆍ넷마블ㆍ엔씨소프트)’에 ‘업무시간 체크’ 바람이 불고 있다. 사례 속 김넥슨 차장, 방마블 과장, 김엔씨 과장처럼 이들 세 회사에 몸담은 임직원들은 일과 중 ‘딴짓’을 자제하게 됐다. 포괄임금제가 폐지되는 데다, 주 52시간제가 도입되면서 근무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할 필요가 커졌기 때문이다. 넥슨은 이달부터, 넷마블과 엔씨소프트는 다음 달부터 이런 시스템을 정식 도입한다.


일단 직원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다. 업무 시간을 타이트하게 지키는 만큼, 퇴근도 눈치 보지 않고 할 수 있어서다. 포괄임금제 폐지 이전 ‘자투리 노동’처럼 여겨졌던 야근 역시 앞으로는 제대로 보상을 받게 됐다. 한 예로 엔씨소프트의 경우 연봉 5000만원 선(인센티브 제외)인 개발자가 주 6시간 정도 추가 야근을 하고 있다면, 이제는 매월 70만원을 더 가져갈 수 있다. 또 세 회사 모두 ‘자리를 비운 이유’만 제대로 소명하면 자리를 비워도 그 시간만큼은 근무 시간으로 인정받도록 했다.

지각 줄고, 칼퇴근 늘어

사무실 분위기도 확 바뀌고 있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글을 올린 한 엔씨소프트 직원은 “(업무시간 측정 이후) 지각쟁이들이 일찍 오고, 도시락을 먹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고 했다.


사내 커피숍 이용 패턴도 달라졌다. 과거엔 커피숍에 앉아 음료를 마시는 ‘매장파’가 많았다면, 이젠 음료를 자신의 자리로 가져가는 ‘테이크 아웃파’가 절대다수다. 엔씨소프트 측은 “대응 방안 등이 직원 간에 자연스레 공유되면서 불만이 줄고 있다”며 “휴게공간이 카페, 헬스장 등으로 좁게 설정되고, 근무공간을 넓게 인정해주는 만큼 얼마든지 커피 등을 즐기며 일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출근 시간 자체가 앞당겨지는 효과도 있다. 업무시간만 일하면 되는 만큼, ‘일찍 와서, 일찍 가자’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어서다. 익명을 원한 게임업체 관계자는 “예전엔 버릇처럼 야근하는 분위기가 있어서 그럴 바엔 아예 늦게 출근하겠다는 직원이 많았는데, 이젠 자기 근무시간만 채우면 눈치를 안 보고 퇴근할 수 있어서 전체적으로 출퇴근 시간이 앞당겨진 느낌”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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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임금제 폐지한 게임 3N의 ‘쉬는 시간’ 타이머. 그래픽=신재민 기자

흡연자와 비흡연자 간 선호 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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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씨소프트의 '비업무 공간'인 사내 카페. 이곳에 체류하는 시간은 '비업무 시간'으로 간주된다. [사진 엔씨소프트]

모두 반기진 않는다. 우선 흡연자와 비흡연자 간 차이가 있다. 음료와 달리 담배는 회사 내에서 즐길 수 없는 데다, 정해진 흡연구역으로 이동하기엔 5분~15분이 다소 짧아서다. 물론 “담배를 피우며 일 얘기를 했다”고 한다면 이는 근무시간으로 인정받는다.

펄어비스 등 근무시간 체크에 거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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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슨 판교 사옥 로비. 넥슨은 포괄임금제 폐지 후 지난 9월부터 15분 이상 자리를 비울 시 업무 시간에서 제외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사진 넥슨]

일부에선 창의적인 작업이 많은 게임업계 속성상 온종일 자리에 붙어있는 게 얼마나 효과적일지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이다. ‘야근수당만큼 급여가 늘어날 것’이란 설명에도 고개를 젓는 이들이 많다. 각 회사가 개발자 1인당 월 70만~100만원 가까이 더 지불하기엔 비용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차라리 주어진 시간 내에 업무를 완수할 것을 독려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


실제로 2017년 업계 최초로 포괄임금제를 폐지한 펄어비스는 “포괄임금제 폐지와 업무시간 체크는 무관하다”며 업무시간 체크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이 회사는 야근 등 직원의 추가 업무시간만 확인해 보상한다. 이 회사 관계자는 “게임업계 특성상 일일이 업무시간을 체크하고 관리하면 일의 창의력이나 집중도가 오히려 더 떨어질 수 있다”며 “개발 능률을 올릴 수 있도록 복지나 근무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포괄임금제 폐지의 취지에 더 부합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미국 게임업계처럼 외주화 바람 거세질 듯

업무시간의 정확한 측정을 하기 시작한 회사들은 초과근무 승인도 더 엄격해졌다. 한 예로 넷마블은 초과근무 시 사전ㆍ사후 신청 및 승인이 필요하도록 규정을 바꿨다. 탄력근로제에 따라 종전 오전 8시~오후 10시였던 근무 가능 시간 역시 오전 9시~오후 8시로 좁혀졌다. 집중을 통한 업무 효율화를 위해서다. 이와 관련 넷마블 측은 “포괄임금제 폐지와 업무시간 효율화 등을 통해 직원들의 워라밸(일과 삶 간 균형) 증진은 물론 건강한 기업문화가 확고히 정착되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초과근무가 줄면 결국 미국 게임업계처럼 자연스레 게임 제작의 외주화가 더 많이 이뤄질 것이란 전망도 있다. 익명을 원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주 40시간인 기준 근로시간에 확실히 일하지만, 그래도 처리하지 못하는 부분은 반복해서 생길 수밖에 없다”며 “이 경우 초과수당을 지급하는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낮은 작업을 미국처럼 아예 외주 기업으로 돌리는 게 비용이 더 적게 드는 만큼, 외주화가 늘어날 것 같다”고 내다봤다.


판교=이수기ㆍ김정민 기자 retalia@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