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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더오래

귀엽고 착한 우리 강아지가 무지개 다리 건넌다니…

by중앙일보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68)

중앙일보

한때 ‘예쁜 강아지’로 꾸며주기도 했지만 언제부턴가 제 편한대로 놔뒀더니 점점 꼬질꼬질해졌다. 특히 단독주택으로 이사 오자 온통 자기 세상, ‘마당 속의 들개’가 되었다. 그게 개다운 행복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진 박헌정

40여년 전 어느 여름날, 서울의 작은 한옥집 마루에 둘러앉아 저녁식사 하던 우리 가족 사이로 갑자기 괴물체가 뛰어들었다. 누런 개였다. 우리 강아지 ‘미미’에게서 태어나 어딘가로 분양된 ‘재롱이’가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친정집 문이 열려있으니 반가운 마음에 뛰어든 것이었다. 치와와 혈통이라고는 믿기 힘든, 정말 새끼 고라니만큼 큰 녀석은 가족들을 핥고 밥상까지 밀치며 수선 떨다가 또다시 신나서 뛰쳐나갔다.


자전거나 축구공을 갖기 힘들던 시절, 형들은 놀아주지 않고, 학원도 없고, 어머니는 바쁘시고… 내게는 오직 강아지 미미뿐이었다. 어느 부잣집에서 살다가 우리 집에 왔을 때는 이미 늙었는데 사람들의 일을 다 파악하고 있어 어른들은 “개가 개답지 않다”고 하셨다. 똑똑하다는 칭찬보다 영물 같아 정이 안 간다는 뉘앙스였다. 하지만 내겐 각별했다. 내가 가장 많이 돌봤는데 오히려 내가 보살핌을 받고 큰 것 같은 느낌이다. 재롱이가 성견이 되어 찾아왔을 때 이미 미미는 세상에 없어 모자 상봉은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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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도 엄연한 가족이다. 다만, 사람이 아닌 동물로서의 가족일 뿐이다. 하루 24시간 같은 공간에서 주인만 쳐다보며 사는데 가족이 아니면 무엇이라 칭할까? 사진 임인학

이후에도 개를 몇 번 키웠지만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이나 여건, 지식이 많지 않던 때라 오래도록 건강하게 키우기 쉽지 않았다. 사람이 남긴 음식으로 키우고, 목욕은 빨랫비누로 여름에나 한두 번? 개는 개대로 집을 지켜 밥값 하던 시절이었다.


거기 비해 당시 말로 ‘애완견’이던 미미는 늘 품에 안겼고 마당과 방, 가끔은 골목까지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실내에 들어올 때는 자기가 알아서 걸레에 발을 삭삭~ 닦았고 샴푸 풀어 씻기면 여유롭게 즐기면서 고마운 눈빛을 보냈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무의식 속에 강아지는 사람과 같이 사는 게 당연한 생명체라는 인식이 박혔고, 어른이 된 후 개야말로 사람이 그 성정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맑고 정의롭다는 ‘개찬양론’을 갖게 되었다.


글 쓰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강아지 이야기는 늘 욕만 먹기 때문이다. 전에 반려견 문화에 대해 ‘견주가 조금 더 책임감 갖자’며 나름대로 균형 있게 썼는데("우리 애는 안 물어요" 개를 사람으로 착각하는 개 주인들, 2019.6.17) 어떤 이는 나를 포함해 견주와 강아지를 싸잡아 비난하고, 견주들은 견주들대로 개에 대한 대접을 왜 그 정도밖에 생각 못 하냐며 성토했다. 그런데 개 이야기를 또 꺼낸다. 우리 강아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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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가 약 기운 때문에 밤새 자지 않고 돌아다니니 결국 9년 전에 사용하던 육각장을 꺼냈다. 육각장이 9년 동안 많이 녹슨 것처럼, 우리 강아지도 많이 녹슬어 있었다. 사진 박헌정

요즘 우리 ‘단추’가 아프다. 어느 날 갑자기 발작을 했고, 간질이라 해서 약 먹곤 좀 나아지다가 다시 심해졌다. 정밀검사를 받아보니 뇌에 염증이 생겨 짧게는 한 달, 길어도 일 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한다.


모두 우울해졌다. 아이들에게는 청소년기를 같이 한 친구이자 동생이고, 우리 부부에게는 아이들 키워내고 남은 모성애, 부성애의 ‘잔반’을 박박 긁어 먹이던 대상이었다.


강한 약 기운에 밤새 낑낑대며 쉴 새 없이 방 안을 돌아다니니 우리도 힘들어 결국 어릴 때 사용하던 육각장을 꺼냈다. 녀석이 처음 집에 오던 날, 저 안에 두고 배변훈련을 시키는데 하얀 실내화만 한 놈이 우리를 보며 너무 좋아 꼬리가 빠지게 흔들고 낑낑댔다. 애견샵 유리방에서 사람들에게 자기 좀 데려가 달라고 얼마나 애타게 버둥댔을까. 결국 하루를 못 견디고 꺼내 품에 안았다.


그 육각장은 9년 동안 많이 녹슬었고, 강아지도 녹슬었다. 강아지 수명은 13~15년, 아직 안심하고 있었는데 남보다 이른 시간에 불치병이 생겨 병든 할아버지 강아지가 되었다. 오랜 병치레로 목욕을 못 해 초췌하고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안에서 옅게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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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단추’는 아이들에게는 청소년기를 같이 한 친구이자 동생이었고, 우리 부부에게는 아이들 키워내고 남은 모성애와 부성애를 아낌없이 쏟아붓던 대상이었다. 사진 박헌정

하루 두 번, 반 컵의 사료에 기뻐 날뛰는 4㎏의 생명체… TV에서 자주 보는 천재견도 아니다. 능력이라곤 주인 반기는 것뿐, 거기에 견생 걸고 최선을 다했다. 모든 생명은 떠나게 되어있지만 이 죄 없는 놈이 얼마 안 되는 여명(餘命)을 통보받으니 마음이 무겁다.


사실 이미 밝은 빛의 희망은 버렸다. 희망에 조도(照度)가 있다면 녀석은 제 분수에 맞는 희망을 선택해야 한다. 밝고 화려하지 않아도 그저 오래도록 비추는 생명의 빛이면 된다. 깊은 밤 취침등 만큼의 빛, 그게 이제 현실에서의 최선이다. 이미 잃은 몸의 기능이 회복되기는 기대하지 않는다. 재롱 필요 없고, 말귀 알아듣지 못해도 상관없다. 악화되지 않고 이대로 행복하게 살다 가면 된다.


강아지 잃는 슬픔을 공감해줄 사람은 많지 않다. 장난으로 되받거나, 면박이나 주지 않으면 다행이다.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과 문화는 확산되고 있지만 아직도 동물 싫어하는 사람, 싫어하는 이상으로 역정 내는 사람, 키우는 사람의 행동에 반감 갖는 사람… 언제나 이쪽에서 피해야 할 상황뿐이다. 반려동물 주인들과 교류하며 위안받는 수밖에 없다. 호들갑스레 동물에게 호의호식시키는 게 아닌, 동물을 생명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 말이다.


약 기운 덕분에 컨디션이 하루씩 나아진다. 반대로 말하면 하루씩 소멸을 향해 다가가는 셈이다. 강아지를 통해 예행연습하지만 결국 우리 삶이 다 그런 식이다. 오늘 낮에는 살살 몸을 씻기고 햇살 아래서 조금씩 뛰는 모습을 보며 잠깐 안도감을 느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같이 있을 때 행복하게 사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