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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여행썰명서

자리물회, 된장 풀고 제피 넣고 빙초산 뿌려야 완성되는 진짜 제주의 맛

by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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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잡은 자리돔. 꼭 붕어처럼 생겼다. 손민호 기자

제주도를 대표하는 생선은 무엇일까? 그 귀하다는 다금바리? 회로 먹는 은갈치? 겨울 생선의 맹주 대방어? 아니다. 돔이다. 돔 중에서도 자리돔이다. 참돔도 아니고, 옥돔도 아니고 자리돔이다. 자리돔을 알면, 그러니까 자리물회에 밴 제주의 고단한 삶을 들은 적 있으면 당신의 제주도는 더 각별해지리라 장담한다. 5월의 제주 바다는, 자리돔이 일으키는 물결로 반짝이는 계절이다.

자리돔은 무엇인가?

돔의 한 종류다. 붕어처럼 생겼다. 다 커야 10㎝ 정도다. 제주 연안 바다에서 산다. ‘자리돔’은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고 자리를 지킨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제주 사람은 ‘자리’라고 줄여 부른다.

제주는 옥돔 아닌가?

제주에서 옥돔은 생선 이상의 생선이다. 크고 예쁘고 맛있어 예부터 대접이 달랐다. 제주에서 ‘생선’은 옥돔을 가리킨다. 제주에서 생선국은 옥돔국을 말하고, 심지어 고깃국도 옥돔국을 이른다. 옛날에는 전복과 함께 제주의 대표적인 진상품이었다. 제사상에도 꼭 오른다.

그럼 옥돔이 대표 생선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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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돔으로 완성한 상차림. 자리강회, 자리구이, 자리젓, 자리물회로 한상이 거하게 차려진다. 손민호 기자

옥돔은 수심 200∼300m 깊은 바다에서 산다. 귀하고 비싼 몸이다. 반대편의 생선이 자리돔이다. 자리돔은 크지도 않고, 비싸지도 않고, 귀하지도 않다. 원체 흔한 생선이어서 진상품은커녕 제사상에도 못 올랐다. 대신 밥상에는 무시로 올랐다. 젓갈을 담가 먹기도 하고 회나 구이, 조림으로도 먹는다.

자리돔이 흔해서 대표 생선이란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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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귀포시 보목항구의 이른 아침. 포구에 자리돔이 가득 나와있다. 손민호 기자

제주의 고된 일상이 녹아 있어서다. 옛날 갯가에서 자리돔을 팔 때 단위는 마릿수나 무게가 아니었다. 양동이였다. 옛날에는 갯가의 자리 할망(할머니)이 중산간(내륙 산간지역)까지 자리를 이고 들어가 “자리 삽서(자리 사세요)”를 외쳤다. 바다의 자리돔과 중산간의 메밀을 맞바꿨다. 자리젓은 뭍에 사는 제주 여자들이 입덧할 때 찾는다는 음식이다. 전복 껍데기에 자리젓 올려놓고 잿불에 살짝 익힌 뒤 밥상에 올렸다. 쓱쓱 밥에 비벼 먹는데, 잊기 힘든 맛이다.

자리돔은 어떻게 잡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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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쇠소깍의 태우 체험. 멀리 보이는 뗏목이 제주 전통 뗏목 태우다. 손민호 기자

자리돔은 잡지 않는다. 뜬다. 뜰채 같은 도구로 건져 올린다. 자리돔은 수면 아래에서 몰려다닌다. 옛날 제주 어부는 수경으로 바다의 자리를 찾았다. 자리돔이 보이면 놀래서 수면으로 올라오게 했다. 자리돔을 뜬 배가 ‘태우’다. 배라기보다는 구상나무로 만든 뗏목이다. 쇠소깍에 태우 체험 프로그램이 있다.

연안에서 살면 1년 내내 잡히는 것 아닌가?

맞다. 그러나 5월에서 8월 사이에 가장 많이 잡힌다. 맛도 봄 자리가 제일 낫다. 여름에 알을 낳으면 살이 물러져 맛이 떨어진다. 봄 자리는 보통 회로 먹고 여름 자리는 구이로 먹는다.

제주 바다 어디에서도 잡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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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지기오름에서 내려다본 보목포구, 앞에 보이는 섬이 섶섬이다. 손민호 기자

제주 바다 전역에서 잡히지만, 자리돔으로 유명한 마을이 두 곳 있다. 섬 서남쪽 귀퉁이의 모슬포와 서귀포 보목이다. 두 마을의 자리돔이 다르다. 모슬포 자리가 보목 자리보다 크고 뼈가 억세다. 모슬포 앞바다가 보목 앞바다보다 물살이 거칠고 빨라서다. 하여 모슬포에서는 자리를 주로 구워 먹는다. 날로 먹기에는 뼈가 크고 단단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바다가 잔잔한 보목에선 주로 자리를 물회로 먹는다. 해마다 5월이면 보목에서 자리돔 축제를 열렸다.

자리물회? 한치물회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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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자리물회. 물회에 제피 잎을 얹었다. 손민호 기자

한치물회는 관광객을 위해 개발한 메뉴다. 제주에서 물회는 자리물회다. 제주 전통 물회는 빨갛지 않다. 된장만 풀어서 누렇다. 처음에는 된장 특유의 누린 내가 부대낄 수도 있다. 하나 익숙해지면 되레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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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물회. 고추장을 풀어서 빨갛다. 손민호 기자

먹는 법이 따로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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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피나무 잎. 곶자왈에 들어가면 흔히 볼 수 있다. 손민호 기자

된장물회에 제피나무 잎을 넣어 먹는다. 쌀국수에 고수를 얹는 것처럼 제피 잎을 추가한다. 후추보다 강한 맛과 향이 확 올라온다. 요즘엔 제주에서 된장자리물회를 주문해도 제피를 안 줄 때가 많다. “제피 없어요?”라고 물으면 식당 할망이 힐끗 쳐다보며 되묻는다. “제주꽝?(제주 사람이에요?)” 제피는 고수처럼 호불호가 갈리는 향신료다. 한 번 맛을 들이면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제피가 없으면 물회 맛이 심심하다.

제피만 넣으면 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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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물회. 된장만 풀어서 국물이 누렇다. 손민호 기자

한 단계가 더 남아있다. 제주 사람은 물회에 빙초산을 넣어 먹는다. 빙초산은 강력한 신맛을 내는 식품 첨가물이다. 피부에 닿으면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 제주 사람은 빙초산 두어 방울을 떨어뜨려야 비로소 물회 맛이 난다고 입을 모은다. 빙초산이 자리 뼈를 연하게 하는 역할도 한다는데, 함부로 도전할 바는 못 된다. 뭍 사람을 위해 빙초산 대신에 사과식초가 놓인다. 제피의 후추 향과 빙초산의 신맛이 된장 물회의 누린 맛을 잡아준다.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인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