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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더오래

지독한 복수극의 허무한 결말…오페라 ‘운명의 힘’

by중앙일보

한형철의 운동화 신고 오페라 산책(28) 


클로드 베리 감독의 프랑스 영화 ‘마농의 샘’은 프랑스에 있는 작은 마을의 우물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인간의 탐욕과 숨겨진 혈육에 의한 처절한 복수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찌할 도리 없이 되돌릴 수도 없는 비극적인 운명이 전설적인 배우 이브 몽땅과 시선이 꽂히는 배우 엠마뉴엘 베아르의 함축된 연기로 펼쳐지지요.


샘에 대한 욕심이 발단되어 한 가족(3대)이 비극적 최후를 맞는 ‘마농의 샘’은 테베의 오이디푸스로 대표되는 그리스 신화의 비극과도 연결되어 있지요.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테마곡은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의 주제 선율이랍니다. 1862년 베르디가 발표한 이 작품은 비극적인 운명에 맞닥뜨린 연인 레오노라와 돈 알바로, 그리고 레오노라의 오빠 돈 카를로간의 파국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 우쭐대지만, 인간은 사실 한 치 앞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가 아닌가요. 허나, 작곡가 베르디는 우리의 영혼까지 옥죄는 운명으로부터 우리 모두를 위로하려는 듯 오페라 마지막에 가서야 평화의 아리아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중앙일보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다룬 영화 〈마농의 샘〉. [영화 마농의 샘 포스터]

극적인 긴박감을 암시하는 도입부에 오보에를 필두로 여러 목관악기가 교차하며 ‘주제 선율’을 연주하고, 리드미컬한 선율의 서곡이 흐른 뒤 막이 오릅니다. 레오노라는 사랑하는 알바노와 함께 야반도주할 작정입니다. 막상 떠날 시간이 되자 잠시 주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알바로는 그런 그녀를 위로하며 그녀의 뜻에 따르기로 하지요.


그때 레오노라의 아버지가 나타나 칼을 뽑아 들고, 알바로를 향해 자기 딸을 유괴하려 한 죄목으로 처벌하겠다고 위협합니다. 알바로는 저항하지 않고 그가 들고 있던 권총을 땅에 던지는데, 아뿔싸! 뜻하지 않게 권총이 발사되고 아버지는 그 총탄에 맞아 숨지고 맙니다. 놀란 두 사람은 도망치고, 그들은 잔인한 운명의 늪에 빠지게 되지요.


돈 카를로는 여동생이 아버지의 살해범과 함께 달아났다고 생각하고, 복수하기 위해 그들을 찾아다니는 중입니다. 알바로와 같이 도망치다가 그를 놓친 레오노라는 그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오빠를 피해 숨어다니지요.


피난처인 수도원에 도착한 레오노라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고백적인 아리아 ‘거룩하신 성모여!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를 부릅니다. 수도원장이 그녀에게 쉼터를 제공해주자, 그제야 레오노라는 다소 마음의 평안을 얻고 피 흘리는 아버지 모습의 환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지요.


한편, 레오노라와 함께 도망치던 그 날 밤 그녀를 놓친 알바로는 그녀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군대에 입대하고, 전쟁터에서 레오노라를 그리워합니다.

중앙일보

스스로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지독한 운명. [사진 Flickr]

그때 비명을 듣고 한 사람을 구했는데, 하필 그가 카를로였네요.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원한 우정을 맹세합니다. 그 후 나팔 소리와 함께 모두 전장으로 달려갔는데, 전투가 끝난 뒤 이번에는 카를로가 부상당한 알바로를 간호해주게 되지요.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 알바로는 카를로에게 상자를 건네주며 보지 말고 그대로 태워 달라고 당부하고, 카를로는 약속을 맹세합니다. 허나 카를로가 맹세를 어기고 상자 속을 뒤지고, 상자에서 레오노라의 초상화를 발견한 그는 결국 그 친구가 알바로임을 알아챘답니다.


결국 그는 알바로에게 결투를 신청하지만, 알바로는 운명이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을 뿐, 아버지를 죽이지도 동생을 유혹하지도 않았음을 해명합니다. 그녀를 사랑했을 뿐이라고 말이지요. 다행히 주위의 군인들이 두 사람을 떼어놓아 결투는 면했지만, 알바로는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하며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5년의 세월이 지나고, 알바로가 수도 중인 곳이 공교롭게도 레오노라가 의탁한 수도원이랍니다. 물론 은둔하며 지내기에 서로는 알지 못하지요.

카를로가 그의 은신처를 알아내 찾아옵니다. 그가 또다시 결투를 신청하자, 알바로는 우정을 언급하며 더는 피를 흘리지 말자고 호소하지요. 그러나 카를로는 알바로의 피만이 자신의 더럽혀진 명예를 씻을 수 있다는 아집으로 두 자루의 칼을 꺼내며 결투를 압박합니다. 두 사람의 팽팽한 긴장은 2중창 ‘알바로, 숨어도 소용없다’에서 집요하게 이어집니다. 알바로는 그에게 용서를 구하고 자비를 베풀어주기를 거듭 반복하여 간청하지만, 카를로가 조상을 모욕하고 뺨까지 때리자 결국 결투를 받아들이게 되지요. 이 긴장된 순간에 주제 선율이 애절하게 흐릅니다.


레오노라는 동굴에서 유명한 아리아 ‘신이여, 평화를 주소서’ 노래합니다. 알바로에 대한 사랑과 슬픔으로 가득 찬 삶에 대한 회한을 담은 기도랍니다.

그때 동굴 앞에서 결투 끝에 칼에 찔린 카를로와 연인 알바로를 보게 됩니다. 드디어 두 사람이 해후한 것이지요. 허나 기쁨도 잠시, 칼에 찔려 다쳐 쓰러져 있는 오빠를 발견하고 그녀가 다가가는 순간, 카를로는 숨을 거두기 직전 혼신의 힘을 다해 그녀를 찌릅니다. 죽은 줄 알았던 연인 레오노라를 다시 만난 그 순간에 그녀가 죽다니… 지독한 복수, 잔인한 운명이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그녀는 잔인한 오빠를 용서하고, 알바로에게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자며 숨을 거둡니다.


작품의 제목도 참 고약합니다. ‘잔인한 운명’ 정도이면 될 텐데, ‘운명의 힘’이라니! 베르디는 우리 인간이 아무리 용을 써도 도저히 피하거나 극복할 수 없는 그런 비극을 그리고 싶었는가 봅니다.


작곡가는 가혹한 결말이 다소 마음에 걸렸는지, 4막 마지막에 가서야 “저주하지 말라”는 수도원장의 기도로 우리 모두에게 연민과 위로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를, 그리고 어떠한 운명 앞에서도 의연하게 살아가기를 바란 것이겠지요.


오페라 해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