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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예술이 된 좀비 몸짓, 무용가의 치밀한 계획이었군

by중앙일보

157만 관객 돌파한 ‘#살아있다’

무용가 예효승이 단계별 동작 지도

유아인 추천으로 영화 안무 데뷔

“고도로 계산된 동작에 관객 몰입”

중앙일보

정체불명 바이러스 소재 영화 ‘#살아있다’에서 감염자(좀비) 안무를 담당한 예효승 현대무용가. 임현동 기자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전염병이 영화 몰입을 돕는 걸까. 6일까지 관객 157만명을 빨아들인 영화 ‘#살아있다’(감독 조일형)는 정체 모를 바이러스의 실태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데 충실하다. 감염자들은 거친 호흡 속에 몸을 비틀며 식인의 의지를 담은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든다.


포인트는 이게 전문가가 디자인한 동작이란 점. 이른바 ‘K-좀비’ 돌풍을 불러일으킨 영화 ‘부산행’과 15일 개봉할 속편 ‘반도’, 넷플릭스 시리즈 ‘킹덤’ 등도 모두 좀비 안무가들의 손을 거쳤다. ‘#살아있다’에선 글로벌 무대에서 활약해온 현대무용가 예효승씨가 이 역할을 담당했다. 예씨가 영화 속 동작을 재연하며 들려준 몸짓 안무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감염자 연기 포인트는 호흡에 있다?

벌벌 떤다, 손이 앞으로 뻗는다, 다리가 꺾인다, 상체가 숙어진다, 문고리를 잡는다, 더욱 격렬하게 떤다….


‘#살아있다’에서 준우(유아인) 집에 들이닥친 옆집 남자 상철(이현욱)이 안구 출혈과 함께 보인 몸짓 순서다. 예씨가 이번 영화에서 처음 맡은 ‘안무’라 가장 고심했다고 한다. 고도로 계산된 몸짓 언어로 관객 몰입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상철은 감염자의 전개과정을 대변하는 캐릭터다. 준우가 목격하는 상황에서 몸의 이상 반응과 돌변을 초기, 중기, 말기에 걸쳐 한달음에 보여줘야 했다.”


이때 중요한 게 호흡 조절이다. “먼저 몸 안에서 이상 세포가 충돌하는 듯 가쁘게 숨 쉬다가 이어서 신체 내 진동이 좀 더 폭력성을 보이기 시작한다. 말기 땐 내가 아닌 제3자에 의한 뒤틀림으로 바뀐다. 이 과정을 계산대로 해야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번 영화 속 감염자 중 캐릭터가 부여된 건 10여 명. 감염 후에도 애초 직업적 특성대로 행동한다는 설정에 맞춰 한 달간 각자 캐릭터(소방관, 경찰관, 경비원 등)를 염두에 둔 몸짓 훈련을 했다. 나머지 수백명 감염자들도 모여서 합을 맞췄다고 한다.

#현대무용가의 좀비 안무는 뭔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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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특유의 꺾기와 현란한 몸짓으로 이를 재연해 보였다. 임현동 기자

현대무용을 전공한 예씨는 벨기에 세드라베 무용단, 프랑스의 캐럴린 칼슨 아틀리에 드 파리 무용단, 소치 동계올림픽 폐막식 조안무 등을 거쳐 현재 블루포엣 댄스씨어터의 대표를 맡고 있다. 영화 작업도, 좀비 안무도 이번이 처음이다.


평소 친분 있던 유아인이 그의 공연을 관람하고선 감독에게 추천했다고 한다. “관절을 꺾고 비트는 춤 스타일이 좀비 동작과 들어맞는다고 느낀 듯하다”고. 공포물을 안 좋아해 안무를 맡고 나서야 ‘베놈’ ‘워킹데드’ ‘월드워Z’ ‘28일 후’ 등을 찾아봤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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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특유의 꺾기와 현란한 몸짓으로 이를 재연해 보였다. 임현동 기자

한정된 아파트 공간에서 생존자들의 사투를 그린 ‘#살아있다’는 여느 좀비물에 비해 대낮에 활보하는 감염자들이 클로즈업돼 보이는 장면이 많다. 생존자이자 관찰자인 준우의 시선과 미묘하게 변화하는 감정이 중심이라서다. 처한 상황에 따라 폭력성보다 나약함이 돋보여야 하는 좀비도 있는데, 미세한 움직임에 이런 감정을 싣는 게 안무 몫이다.


“늘 몸을 관찰하고 의식적으로 움직여본 전문가라야 동작 팁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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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특유의 꺾기와 현란한 몸짓으로 이를 재연해 보였다. 임현동 기자

영화엔 예씨도 감염자로 출연했다. 준우(유아인)와 유빈(박신혜)이 아파트 8층으로 대피했을 때 엘리베이터 앞에서 감염자 무리를 이끄는 역할이다. 흐느적거리면서 발작적으로 움직이는 몸짓이 ‘춤 고수’답게 유려하다.


“완성된 영화를 보니 효과음과 CG 덕에 원래보다 움직임이 강화돼 보이더라. 공연 무대와 또 다른 경험이라 즐겁게 임했다.”

#은밀한 베드신도 ‘디자인’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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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의 좀비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안무가의 역할은 춤 소재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발레리노 지망생이 등장하는 영화 ‘여교사’(2017)를 공동제작한 필름케이의 김정민 대표는 “발레 안무가를 모셔 춤 안무와 배우 훈련, 대역 캐스팅에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바람난 가족’(2003)에서 전직 무용수 출신 30대 주부를 연기한 문소리는 현대무용가 안애순으로부터 훈련받았고 영화엔 안애순 무용단원들도 출연했다.


오지호·이지현 주연 ‘미인’(2000, 감독 여균동) 땐 현대무용가 안은미가 합류했다. 여주인공의 전신 누드, 육체의 탐닉 묘사에 주력한 영화에서 ‘베드신 안무’로 화제가 됐다. 그는 당시 “남녀 팔과 몸의 위치에 따라 감정의 스펙트럼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에로영화 속 노출과는 다른, 두 몸이 만들어내는 선과 몸의 언어에 신경 썼다”고 밝힌 바 있다.

#각광받는 K좀비 안무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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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의 유아인.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최근 한국영화의 몸동작 디자인을 선도한 이로는 리듬체조 코치 출신 박재인 안무가가 첫손에 꼽힌다. ‘댄싱퀸’(2011)의 춤이나 ‘국제시장’(2014)의 파티 장면, ‘사물의 비밀’(2011)의 정사 장면 등에서 음악과 어우러진 몸짓을 고안한 그는 ‘곡성’(2016)에서 ‘바디 무브먼트 컴포저’라는 직책을 크레딧에 올렸다. 이후 영화 ‘사바하’(2018), 넷플릭스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 등에서도 기괴한 몸짓을 전담하는 안무가가 필수가 됐다.


‘부산행’ ‘창궐’ 등에서 액션에 능한 특징을 보이는 ‘한국형 좀비’를 주도하는 안무가로는 전영이 있다. 본 브레이킹 댄서 출신으로, 박재인과 함께 ‘부산행’(2016)을 맡은 데 이어 ‘킹덤’을 통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몸짓 디자이너가 됐다. 오는 15일 개봉하는 강동원 주연 ‘반도’에선 더 빨라지고 진화한 K-좀비가 나오는데, 전영도 좀비로 출연한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