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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단독] 그날 박원순 "산에 간다, 낮12시 돌아와 발표하겠다"

by중앙일보

서울시 고위 관계자 "비서실 정무라인도 9일에서야 미투 인지"

박 전 시장 "12시에 공관으로 돌아오겠다"고 말하기도

9일 오전 "시장 신변 중대 문제, 사임 가능성 있다” 얘기 퍼져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실종 당일인 9일 오전 비서실 등 측근 사이에서 박 전 시장 신변에 중대 문제가 발생하면서 사임 가능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서울시 정무라인으로, 박 전 시장 집무실과 같은 층을 사용하며 보좌하는 이른바 ‘6층 사람들’ 사이에 9일 오전 박 전 시장 거취에 중대한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얘기가 돌면서 고한석 전 비서실장 등 핵심 측근이 비상대기에 들어갔다고 한다.


서울시 고위 관계자는 15일 중앙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박 전 시장은 사망 전날(8일) 밤까지도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며 “다음날 오전 뭔가 ‘미투(Me Tooㆍ나도 당했다)’ 등으로 시장 신변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 것을 알고 대응을 어떻게 하느냐를 놓고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한석 전 비서실장조차도 박 전 시장의 성추행 피소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실종 당일 오전에서야 정무라인은 ‘어떤 일이냐’를 중심으로 시장 안위와 관련해 치명적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것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논의했다”고 말했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9일 오전 비서실장을 중심으로 성추행 피소를 인지했고 “시장 신변에 중대 문제가 발생해 사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까지 퍼지면서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서울시 고위 관계자 인터뷰와 서울시 전ㆍ현직 간부 발언 등을 토대로 박 전 시장의 8일 오후 3시부터 공관을 나온 것으로 확인된 9일 오전 10시 44분까지의 상황을 재구성하고 의문점을 짚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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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8일 오후 3시 : “‘불미스러운 일’ 들은 젠더특보, 시장에 문의”


임순영 서울시 젠더특별보좌관은 8일 오후 3시 박 전 시장을 만났다. 서울지방경찰청에 박 전 시장을 상대로 한 고소장이 접수되기 약 1시간 30분 전이다. 임 특보는 지난해 1월 박 전 시장에게 여성정책을 자문하기 위해 지방전문임기제3급(국장급)으로 서울시에 채용됐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국가인권위원회, 한국인권재단 등을 거쳐 2012년 5월부터 11월까지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보좌관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임 특보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고소 건을 보고한 게 아니라 주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다는데 물어보라’고 했기에 박 전 시장을 직접 만났다”고 주장했다. 임 특보는 “실수한 것 있으시냐”며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물었지만, 성추행 관련 내용은 듣지 못했다고 한다. 박 전 시장은 “일정상 바쁘니 나중에 얘기하자“ 정도로 답하고 자세한 언급을 회피했다. 다만 임 특보는 “박 전 시장이 자신이 한 일을 되돌아보면서 (성추행 건을) 짐작했을 수는 있을 듯싶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임 특보에게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전달한 주변인이 시 내부 인사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다. 젠더특보가 외부에서 소식을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젠더특보가 양성평등, 성폭력 피해자 지원 업무를 담당하고 여성 시민단체 등과 친분이 있는 만큼 이들로부터 박 전 시장 관련 소식을 접해 들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서울시 고위 관계자는 “6층 정무라인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사전에 알았다면 곧바로 고한석 전 비서실장을 통해 박 시장에게 보고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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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8일 오후 9시 30분 : 공관 회의서 박 전 시장 “내일 다시 얘기하자”


8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구청장들과 서울 성북구 한 음식점에서 예정된 만찬을 가진 박 전 시장은 수행비서와 함께 종로구 가회동 공관으로 돌아온다. 박 전 시장은 9시 30분께 공관으로 임 특보를 다시 불렀다고 한다. 임 특보는 비서관 2명과 함께 공관으로 갔다. 이 자리에선 보고 내용을 추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입니까’ 등을 묻는 정도의 대화가 오갔다고 한다. 항간에 알려진 ‘대책회의’ 수준은 아니라는 게 서울시 고위 관계자의 주장이다.


이 자리에서 박 전 시장은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고 말했고 회의는 곧 끝났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 전 시장이 심각성을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서울시는 주장한다. 앞서 만찬장에서도 박 전 시장의 표정은 밝았다. 만찬에 함께 했던 한 구청장은 “오후 3시에 (피고소) 힌트를 받았다면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후 만찬장에서 어떤 감정적 동요가 안 보였다”고 말했다. 식사 내내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도 없었다고 했다.


공관 회의 참석자들은 서울시 정무라인 비서관 이상 직책자들일 가능성이 높다. 정무라인 공무원은 청와대, 국회 등 정치권과 교류하며 박 전 시장의 정치적 행보를 돕는 역할을 한다. 박 전 시장이 대권 행보를 위해 직접 채용한 빅데이터·언론·법률 등 다방면의 전문가들로 구성돼 있다. 비서진을 포함해 20여명이 근무하며, 고 전 비서실장, 장훈 전 소통전략실장 등 지방 별정직 27명은 박 전 시장 사망 후 면직됐다. 임 특보는 14일부터 휴가를 내고 시청에 나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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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9일 오전 10시 : 기류 급랭…“미투로 시장 신변 중대문제 발생”


6층 분위기가 얼어붙기 시작한 것은 9일 아침부터였다고 한다. 고 전 비서실장을 중심으로 박 전 시장이 미투 건으로 신변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이야기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서울시 고위 관계자는 “비서실장도 성추행 피소 사실을 인지한 시점이 9일 오전이었다”며 “이후 비서실은 어떤 일이 발생했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 증언이 맞다면, 박 전 시장을 고소한 전직 여비서 A씨의 경찰 조사가 끝난 9일 새벽 2시 30분 이후 상황의 심각성이 모종의 경로를 통해 박 전 시장 측에 전달됐고 이후 시장 사임이 검토되는 등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을 거라는 유추가 가능하다.


박 전 시장은 9일 오전 서울시청사로 출근하지 않고 공관에 머물렀다. 공관을 나선 것은 오전 10시 44분이었다. 이때쯤 “신변과 관련해 중대 발표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박 전 시장은 측근에 “산에 심기를 정리하러 간다. (산에) 갔다 와서 발표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후 12시경에 공관으로 돌아오겠다”는 말도 남겼다. 하지만 이후 연락이 두절되면서 비서실의 움직임은 미투 대책보다 ‘안전문제’로 초점이 바뀌기 시작했다. 서울시 고위 관계자는 “박 전 시장 생사가 위태로운 긴박한 상황 속에서 전혀 여유가 없었다”고 했다. 이날 경찰에 소환된 고 전 비서실장은 박 전 시장과의 마지막 통화 시간을 “오후 1시 39분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에 대해선 답하지 않았다.


김현예·윤상언 기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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