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여행 ]

풍수지리 몰라도 감탄 연발···3대가 지킨 ‘혼불’ 속 명당

by중앙일보

행복농촌② 남원 노봉마을

중앙일보

전북 남원의 노봉마을은 대하소설 『혼불』의 주 무대다. 최명희가 '만세의 복을 누리게 한다'고 묘사했던 청호지의 풍경이 그저 그윽하다. 저수지 너머 언덕에 혼불문학관에 들어앉아 있다. 백종현 기자

전북 남원은 이야기로 기억되는 고장이다. 숱한 우리 고전이 이 땅에서 잉태했다. 시내 한복판 광한루원은 ‘춘향전’의 무대, 동북쪽 아영면 상성마을은 ‘흥부전’의 발생지로 통한다. 서북쪽 사매면 노봉마을 역시 그러하다. 대하소설 『혼불』의 배경지로, 곡진한 이야기와 느긋한 풍경을 품고 있다.

‘천추락만세향’

중앙일보

혼불문학관. 최명희의 유품과 '혼불'의 주요장면을 디오라마로 볼 수 있는 장소다. 문학관 앞 바위에 『혼불』속 문구가 새겨져 있다. '천추락만세향'은 천 번의 가을 동안 즐겁고 만세 동안 복을 누린다는 뜻이다. 백종현 기자

『혼불』은 최명희(1947~98)가 17년에 걸쳐 쓴 대하소설이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종갓집 3대 며느리들의 인생 역정과 당대의 풍속사가 생생하다. 주 무대였던 ‘매안마을’이 실제 남원 노적봉(568m) 북쪽 기슭에 들어앉은 노봉마을이다.


외지인 하나만 들어도 개 짖는 소리로 동네가 쩌렁쩌렁 울리는 한적한 시골. 46가구 85명이 노봉마을에서 살아간다. 『혼불』의 터전에 왔음을 알아채는 건 쉽다. 식당‧카페‧민박 등등 곳곳이 ‘혼불OO’하는 식의 간판을 달고 있다. 『혼불』의 흔적을 물으면 “우린 전래동화가 아니라 『혼불』을 들으며 자랐다”며 밭일하던 할매도 해설사를 자처한다. 소설의 부제 ‘꽃심을 지닌 땅’을 새긴 정승이 마을 입구에 기세등등하게 서 있다. 문자 그대로 문학마을이다.

중앙일보

'혼불'의 무대인 옛 서도역.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촬영지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장소다. 백종현 기자

마을 들머리의 옛 서도역은 소설에서 주인공 효원과 강모가 드나들던 장소다. 2001년 폐역이 됐지만, 1932년 개설 당시 모습이 남아 있어,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으로 꼽힌다.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등장한 뒤로 관광객이 부쩍 늘었단다.


소설에 등장한 청호지도 실재한다. 양반가를 지켜 나가려는 맏며느리 청암부인은 이 저수지를 두고 “노적봉과 벼슬봉의 산자락 기운을 느긋하게 잡아 묶어서, 큰 못을 파고, 그 기맥을 가두어 찰랑찰랑 넘치게 방비책만 잘 강구한다면 가히 백대 천손의 천추락만세향(千秋樂萬歲享)을 누릴 만한 곳”이라고 했다. 풍수지리에 대한 안목은 없지만, 과연 ‘만세의 복을 누린다’는 명당임이 대번 느껴진다. 덕분에 긴 세월 『혼불』은 잊히지 않을 것만 같다. 청호지 너머 언덕에 혼불문학관이 있다. 그곳에서 마을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오이 따고 시골 밥상 꿀꺽

중앙일보

이맘때 노봉마을 농가의 주 수입원은 오이다. 오이를 직접 따보고 시식도 할 수 있다. 백종현 기자

노봉마을 여행법은 간단하다. 전반전이 문학 기행이라면, 후반전은 농촌 체험이다. 노봉마을은 시설 작물 재배 농가, 그러니까 하우스 재배가 주를 이루는데 요즘은 오이 수확이 한창이다. “샛노란 오이꽃이 얼마나 곱고 향긋한지 몰랐던 사람은 깜짝 놀란다”고 김용익 마을 위원장은 말한다. 하여 오이 수확 체험(1만원, 10명 기준)은 늘 반응이 좋단다. 갓 딴 오이를 시식해보고, 5개까지 수확해 갈 수 있다. 혼불문학관 인근 혼불체험관에서는 도자기·목공예(1만원, 20명 기준) 등을 배워볼 수 있다.

중앙일보

노봉마을 앞 '혼불마루'의 인기 메뉴인 혼불 밥상.토마토겉절이·갈비찜·뽕잎장아찌 등 17개 반찬이 올라온다. 백종현 기자

옛 서도역 앞에는 정갈한 시골 밥상을 내는 ‘혼불마루’가 있다. 대표 메뉴는 ‘혼불 밥상(1만5000원)’. 갈비찜이 상 한가운데 놓이지만 주인공은 따로 있다. 밥부터 장아찌 하나까지 마을에서 난 농산물로만 음식을 만든다. 요즘은 토마토겉절이·부추말이·토란대볶음·고구마순김치 등 17개 찬이 올라온다. 당연히 계절마다 찬이 달라진다.


마을 카페 ‘슬로우빌 혼불’은 다담을 나누기 좋은 장소다. 현미로 만든 천연 발효 흑초를 비롯해 개복숭아·아로니아 등으로 맛을 낸 음료(5000원)를 내놓는다. 마을에서 수확해 1~5년 가량 숙성시킨 것들이다. 원액이 담긴 병마다 생산자인 마을 어르신들의 사진이 붙어 있다. 음료 하나에도 오랜 시간과 정성이 깃들어 있다.

중앙일보

마을 카페 '슬로우빌 혼불'. 1~5년가량 숙성한 흑초·아로니아 등으로 맛을 낸 음료를 내놓는다. 백종현 기자

중앙일보

혼불체험관에서는 목공예를 배워볼 수 있다. 백종현 기자

백종현 기자 baek.jonghy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