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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홍대 클럽의 떼창, 댄스곡인 줄 알았더니 판소리였네

by중앙일보

밴드 이날치가 만든 춤곡 수궁가

‘범 내려온다’ 유튜브 200만회 조회

춤출 수 있는 국악 재해석에 열광

갑질횡포 등 현대적 코드도 녹여

중앙일보

밴드 이날치. 왼쪽부터 이철희(드럼), 권송희(보컬), 장영규(베이스), 이나래(보컬), 신유진(보컬), 정중엽(베이스), 안이호(보컬). [사진 우상희 스튜디오]

멀리서 토끼를 발견하게 된 자라, 즉 별주부가 목청을 높인다. “호생원!” 별주부는 육지로 힘들게 올라오느라 몸에 힘이 빠져 ‘토’ 발음이 그만 ‘호’가 됐다. 그의 실수로 토끼 대신 호명된 호랑이가 신나게 달려내려 온다. “용봉탕이 몸에 그렇게 좋다는데 먹어보자”며 자라에게 달려들 판이다. 판소리 ‘수궁가’ 중 범 내려오는 대목의 내용이다.


요즘 홍대를 비롯한 조명 번쩍이는 클럽에서 이 대목을 청중 모두가 따라부르는 ‘범 떼창’ 이 펼쳐진다. 21세기 난데없이 등장한 판소리 떼창은 지난해 결성한 밴드 이날치 덕분이다. 이날치가 수궁가를 4박의 강렬한 비트로 재해석한 노래 ‘범 내려온다’는 유튜브 조회수 200만을 넘겼다.


이날치의 멤버는 소리꾼 안이호·권송희·이나래·신유진, 베이스 장영규·정중엽, 드럼 이철희. 팀을 기획하고 구성한 감독은 그 중 장영규. 영화 ‘부산행’ ‘곡성’의 음악을 맡았고 ‘어어부 프로젝트’ ‘비빙’으로 전위적 음악을 했던 이다. 그가 소리꾼들과 만든 이날치는 올 5월 ‘수궁가’로 앨범을 냈다. ‘범 내려온다’를 비롯해 ‘별주부가 울며 여짜오되’ 등 11곡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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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이날치의 공연 장면. [사진 LG아트센터]

소리꾼 안이호는 “청중이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한 건 지난해 말 공연부터였다. ‘범 내려온다’에서도 놀랐지만 ‘약성가’를 따라할 때는 너무 놀라 가사를 까먹을 뻔했다”고 했다. 아픈 용왕에 대한 처방전인 약성가 가사에는 몸에 좋은 약재의 이름이 줄줄 이어진다. “백복령, 사향, 오미자, 회향, 당귀, 천궁, 강활….” 소리꾼도 외우기 힘든 걸 외워 부르는 청중들 모습은 ‘이날치 팬심’을 증명한다. 이날치는 최근 배우 이병헌과 피자 CF도 함께 찍었다. 인기 비결은 뭘까.


“한국 음악의 세계화, 국악의 현대화 같은 말에 갇히고 싶지 않다.” 장영규는 이날치의 음악에 거창한 분류법은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처음부터 상업적 시장으로 가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춤출 수 있는 음악, 몸이 먼저 반응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려 했다.” 이날치의 출발은 2018년 무대에 오른 ‘드라곤 킹’이다. 수궁가를 변용한 음악극으로, 광주광역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공연했다. 장영규는 당시 연출가 양정웅에게 음악을 의뢰받고 “진지하게 가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수궁가를 선택했다”고 했다.


인기 비결의 상당 부분은 수궁가가 쥐고 있다. 안이호는 “판소리의 다른 바탕들도 재미가 있지만, 수궁가는 제일 유머러스하다”고 설명했다. 적벽가는 전쟁 중 죽고 사는 사람들 이야기라 무겁고, 춘향가와 심청가는 인간의 근원적 고민으로 내용이 깊다. 흥보가는 해학적이긴 하지만 발랄한 정도까지 갈 수는 없다. “동물들의 이야기라 마음 놓고 웃길 수 있는 게 수궁가”라는 설명이다. 장영규는 특히 “판소리로 들은 안이호의 수궁가엔 남다른 유머가 있었다. 안이호의 일정이 안 됐다면 수궁가를 안 했을 것”이라고 했다.

수궁가의 유머는 뒤집으면 풍자가 된다. 안이호는 “수궁가의 별주부는 현대의 영혼 없는 직장인 같다. 용왕에게 잘 보이면서 별짓을 다 해 주류에 들어가고자 애쓰는 이다. 능력은 출중하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중간 관리자를 보는 듯 애잔해진다.”


이날치는 이렇게 수궁가에서 살아남기, 사내정치, 갑질횡포, 속고 속이는 승자 없는 게임 등 현대적 코드를 발견해냈다. 국악으로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은 본래 예전부터 수궁가에 주목했다. 안숙선과 김덕수는 1995년 아쟁·대금과 전자 기타, 색소폰으로 함께 하는 ‘토끼 이야기’를 만들었다.


판소리 수궁가 완창은 세 시간이 넘는다. 이날치는 이 중 열한 대목을 골라 ‘춤출 수 있는 리듬’과 결합했다. 장영규는 “춤추기 좋은 130bmp의 리듬을 먼저 정해놓고 눈대목들을 골랐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히려 원래 빠르지 않은 대목을 더 많이 썼다”고 했다. 느린 장단, 4박 아닌 대목을 가져와 빠른 4박의 리듬과 충돌이 일어나는 지점을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묘하게 안 어울리는 것들이 공존하는 데에 사람들이 반응을 했다.”


이들의 목표는 사람들이 지금처럼 판소리를 준비 없이 듣도록 하는 것이다. 안이호는 “일상에서 심심할 때 틀어놓고 즐겼는데 알고 보니 판소리였다는 반응이 나오는 음악을 하고 싶다”고 했다. 굳이 애써 듣지 않아도 되는, 춤출 수 있는 판소리를 꿈꾼다. 이날치(1820~92)는 조선 후기에 판소리로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던 명창이다. 본명은 이경숙, ‘날치’는 줄도 날아다니듯 잘 탄다고 해서 붙은 예명이다. “이날치의 시대에 사람들은 판소리를 이렇게 즐기지 않았을까. 둠칫둠칫 하면서.” 안이호의 말이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