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에서 '좌익', 北에서 '부르주아'…그렇게 잊힌 노래 부른다

[컬처]by 중앙일보

월북 작곡가 김순남·이건우 곡 부르는 소프라노 서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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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남(1917~미상)과 이건우(1919~1998)는 각각 1948년, 50년 월북한 작곡가들이다. 금지됐던 이들의 노래는 88년 모두 해금됐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음악은 생소하다. 소프라노 서예리(44)는 “꼭 들어봐야 한다. 작곡가들의 엄청난 천재성에 슬퍼지는 음악”이라고 소개했다.


독일 다름슈타트 음대의 교수인 서예리는 2003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데뷔한 후 20세기 이후 서양의 현대음악 분야에서 독보적 활동을 하고 있다.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그는 코로나19 상황에도 김순남과 이건우의 가곡을 부르기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 공연 제목은 ‘소프라노 서예리가 들려주는 잊어진 노래들’. 이달 27일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예정됐던 무대 공연은 취소됐지만 서울 신사동의 오드포트에서 영상 녹음을 하고 다음 달 14일 온라인 공개한다.


두 작곡가는 좌익 활동으로 해방 이후 수배되거나 수감 생활을 했다. 김순남은 음악의 제도권에 들어가지 못하다 47년부터 도피 생활을 했고 이건우는 48년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됐다. 북에서의 삶은 달랐다. 이건우는 사망할 때까지 작곡을 했지만 김순남은 북한에서도 부르주아 음악인으로 몰려 유배 생활을 했다.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김순남의 정확한 사망 시점은 알려지지 않는다.


서예리는 “그들의 사상이나 월북 행적 같은 것과 상관 없이, 노래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음악을 높게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20세기 음악의 현대적 기법을 수용하면서도 한국인이 공유하는 정서와 사고가 자연스레 스며들어있다. 서양음악을 흉내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고유의 것을 계속 간직했다.” 서예리는 특히 42년 서울에서 발표된 김순남의 노래 ‘철공소’를 예로 들었다. “망치 때리는 소리를 음악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나. 그 정답이 이 노래에 있다. 피아노의 화음들이 스릴 넘치는 긴장감을 갖고 흘러갈 때 노래가 함께 어우러진다. 노래를 하면서도 한 폭의 그림이 눈 앞에 보이는, 천재적 음악이다.”


김순남의 경우엔 월북 후 모스크바의 차이콥스키 음악원 유학 당시 ‘천재’ 칭송을 들었다. 음악학자인 고(故) 노동은 중앙대 음대 교수는 2010년 글에서 “김순남은 러시아의 대표적 음악가인 하차투리안, 쇼스타코비치가 ‘우리가 배워야 한다’며 칭송했던 이”라며 “윤이상에 앞선 세계적 음악가였다”고 평했다. 하지만 김순남은 모스크바 유학 1년만에 북한으로 소환돼 부르주아 예술의 낡은 사상의 음악가로 비판받고 주물공장의 노동자가 됐다.


서예리는 “대학교 4학년 수업 시간에 김순남과 이건우의 노래를 처음 접했다. 20세기 음악에 관심이 많던 차였는데 마음에 이렇게 탁 와닿는 한국 가곡을 만나니 벅찼다”고 했다. 그는 또 “현대적인 작곡어법이 탄탄하고 한국적인 정서가 생생한 곡을 고르고 보니, 그들이 월북한 작곡가들이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작곡가들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는 잘 몰랐다. 노래와 음악이 좋았다. 그런데 이런 곡이 한국에서 많이 불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정말 안타까웠다.”


그는 지난해 한국가곡연구소가 기획한 이건우 가곡 녹음에도 동참했다. 바리톤 정록기, 독일 피아니스트 홀거 그로쇼프와 함께 월북 이전 남긴 가곡 14곡을 불렀다. “유학부터 시작해 독일에서 20년을 살았다. 서양음악 연주를 직업으로 하며 독일에서 살다보니 정체성이 혼란스럽고 모호했다. 그럴 때마다 내 뿌리를 들여다보는 심정으로 이런 노래를 찾아 불렀다.” 그는 또 “서양인들은 이들의 노래를 들으면 멋있고 새롭다며 정말 좋아한다. 5음 음계, 시김새, 떨림음 같은 한국적인 기법이 서양인에게는 신비하다”라고 했다.


독일의 다름슈타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음악의 총아들이 모여 페스티벌을 열기 시작했던 도시다. 존 케이지, 백남준, 윤이상 같은 인물들이 여기에서 예술의 최신 경향을 공유했다. 서예리는 지난해부터 다름슈타트 음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다름슈타트 음대 또한 20세기 이후 음악에 중점을 둔다.” 그는 학생들에게 윤이상ㆍ박영희 등 한국 작곡가의 노래를 전하는 한편 자신도 한국어로 된 노래를 부른다. “내년 2월엔 독일 작곡가가 한국어 가사로 쓴 노래를 부를 예정”이라고 했다. 독일의 성악 전공 학생들에게 독일어 발음을 가르친다는 그는 “한국 가곡을 부를 때도 정확한 발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번 공연 ‘소프라노 서예리가 들려주는 잊어진 노래들’에서 그는 김순남의 ‘진달래꽃’‘산유화’와 이건우의 ‘금잔디’‘엄마야 누나야’‘동백꽃’, 윤이상의 ‘편지’‘그네’‘달무리’를 부른다. “부르고 싶은 노래의 반도 안되는 곡목이다. 더 복잡하고 어려운 곡도 많지만 일단 쉽게 들을 수 있는 1단계 노래들만 골랐다.” 잊힌 작곡가들의 묻혔던 노래를 앞으로도 몇차례 더 부르겠다는 다짐이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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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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