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테크 ]

한국이 세계 2위? 참담한 R&D···장롱특허가 혈세 먹어치웠다

by중앙일보

[혁신창업의 길]

한국은 무늬만 연구개발 국가

"박사·교수 창업 인센티브 늘려야"

정부 지원 연구개발 투자 비중 높지만

성과 미미한 'R&D 패러독스' 극복해야

중앙일보

신기술 개발 역량을 보유한 대학 교수나 석·박사급 인력의 창업을 활성화하기 위해선 인사 평가에서 연구나 학술 발표와 함께 기술이전·사업화 등도 반영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사진은 저명한 국제학술 논문 표지. 변선구 기자

딱 하나가 2등급, 60% 가까이는 ‘장롱 특허’.


정부 출연연구기관(출연연) 소속 1만여 명이 올해 등록한 특허기술의 현주소다. 사업화로 이어지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국내 출연연을 관장하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에 따르면 최근 5년(2016~2020년)간 출연연이 출원한 특허 건수는 3만9263건이었다. 이 가운데 특허청에 등록된 특허 건수가 2만6513건이다. 하루 평균 14~15개꼴로 특허를 등록한 셈이다.

출연연 특허 중 절반 이상은 ‘장롱특허’

현실은 어떨까. 대한변리사회가 특허등급 평가시스템을 통해 올해 19개 출연연이 특허청에 등록한 384건의 특허를 분석했더니 대부분은 ‘장롱 특허’였다. 변리사 446명이 출연연이 출원한 특허의 유효성과 범위·강도를 기준으로 10개 등급으로 나눴더니, 가장 우수한 1등급은 단 한 개도 없었다. 그나마 2등급이 1개(0.3%), 3등급 25개(6.5%), 4등급 136개(35.4%)였다. 절반 이상(57.8%)은 5·6등급이었다. 무늬는 연구개발 국가인데, 그 성과는 미약하다는 얘기다.


홍장원 대한변리사회장은 “사실 5~6등급 특허는 기업이 필요해서 사들일 만한 매력이 없는 ‘장롱 특허’ ‘장식 특허’ 수준”이라며 “국민의 혈세가 들어가는 국가 연구개발(R&D) 사업이 그만큼 비효율적이라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중앙일보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정부도 이 같은 문제점을 인정하고 있다. 김용래 특허청장은 지난해 8월 취임하면서 “한국은 세계적 수준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와 인구 수 대비 연구 인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성과는 저조하다”고 말했다. 이른바 ‘코리아 R&D 패러독스’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과학기술분야지표(MSTI)’에 따르면, 2019년 한국의 GDP 대비 R&D 비용 비율은 4.53%로 이스라엘(4.94%)에 이어 세계 2위다. 한국은 2010년 이후 10년 내리 2위를 유지하고 있다. 정부 R&D 비중은 GDP 대비 0.93%로 미국(0.65%)이나 유럽(0.595), 일본(0.48%)보다 높다.

국내 대학 기술이전료 870억 < 미 프린스턴대 1600억

R&D 경쟁력의 또 다른 한 축인 대학도 마찬가지다. 한국연구재단에 따르면 국내 대학의 기술이전 총수입은 870억원(2018년)이었다. 지난해 국내 대학 중 가장 많은 기술이전료 수입을 올린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100억원을 갓 넘는다. 국내 대학을 모두 더해도 미국 프린스턴대(2016년 기준 1600억원) 한 곳에 미치지 못한다.


현장에서는 “답답하다”며 갈증을 호소하고 있다. 중앙일보는 최근 과학기술일자리진흥원과 정부 R&D 과제를 받은 공공기술 기반의 창업 기업 103곳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R&D 지원 제도의 문제점을 말해 달라는 질문에 69개 기업(67%)은 “수요자 중심의 R&D 지원체계가 부족하다”(복수응답)고 답했다. 다음으로 “중장기 전략이 없는 일회성 지원”(59.2%), “비효율적인 행정 절차”(57.3%) 등이 문제라고 꼽았다.


익명을 원한 충청권의 H사 관계자는 “갈수록 행정문서 요구가 늘어나고 있다”며 “본연의 연구보다 서류 작업을 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이 문제다”라고 하소연했다. 수도권에 본사를 둔 E기업 관계자는 “장기적인 문제 해결과 종합 연구를 위한 지원사업 확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행정서류만 늘어나…이러면 답 없다”


정부의 R&D 성과를 높일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는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신뢰 기반의 제도 혁신이 필요하다”(61.2%)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이어 “연구분야 특수성과 자율성을 고려해야 한다”(50.5%), “도전적 연구를 장려해야 한다”(49.5%) 순이었다.


전문가들은 기술 기반의 ‘혁신창업’이 이 같은 한계를 벗어나는 해답이 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산·학 R&D를 기반으로 혁신창업이 이뤄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든 이스라엘이나 핀란드·덴마크 등과 같은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대학·출연연 연구실과 시장을 잇는 사업화 생태계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연구원 창업은 국가혁신체제(NIS·National Innovation System) 차원에서, 교수 창업은 지역혁신체제(RIS·Regional Innovation Ssystem)를 바탕으로 분리해 지원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김영환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교수 창업은 지역 연고를 바탕으로 현지의 기업과 협력을 통한 기술이전이나 창업 성과가 높게 나타나고, 연구원 창업은 국가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연구소 기업으로 주로 나타난다"며 “출연연과 대학은 창업의 기반이나 유인 등이 다르기 때문에 이에 맞는 맞춤형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중앙일보의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자문위원인 오세정 서울대 총장과 이광형 KAIST 총장은 창업의 걸림돌이 되는 낡은 규제를 빨리 풀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중앙일보

국내 대학이나 출연연 특허의 기술 사업화 비중은 매우 낮다. 사업화보다는 특허 출원 그 자체가 목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진은 특허 이미지.

“유능한 인재 끌어들일 보상 늘려야”

이광형 총장은 “창업자에게 무한책임을 묻는 연대보증의 경우 정책금융에서는 풀었지만, 민간 금융회사에서는 여전하다”며 “이 같은 연대보증을 불공정 거래로 간주하고 무효화할 수 있도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세정 총장은 “교수들이 적극적으로 창업에 나서기 위해서는 1주일에 하루, 8시간만 겸직을 허용하고 있는 현행 규제부터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축적의 길』저자)는 “혁신창업 스타트업에 유능한 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소득세와 양도세 규제를 유지하고 있는 스톡옵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며 “뛰어난 석·박사 인재가 연봉도 적고, 실패 확률도 높은 스타트업에 뛰어들 땐 그만큼의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문희철·권유진 기자 reporte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