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여행 ]

1억년 전 비경 간직한 풍문의 섬, 20㎏ 배낭 멘 백패커들의 천국

by중앙일보

인천 섬여행④ 굴업도 백패킹

중앙일보

굴업도는 사람이 엎드리고 일하는 모습을 닮은 형상이라고 한다. 드론을 띄워 섬 남쪽 개머리언덕 쪽을 촬영했다. 해안절벽 위로 점처럼 박힌 백패커의 텐트가 보인다. 손민호 기자

본래 섬은 풍문 같은 존재다. 먼바다 외따로이 떠 있는 섬이라면, 사람보다 사슴이나 송골매 같은 야생동물이 더 많은 섬이라면, 큰 섬까지 배 타고 들어가 작은 배 갈아타야 하는 섬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련하게 떠오르고, 불편해도 끌리는 미지의 존재. 섬으로 들어가는 여행은 어쩌면, 풍문을 찾아 떠나는 순례와 모험 사이의 것일지 모른다.


인천 먼바다에 오랜 풍문 같은 섬이 있다. 굴업도(掘業島). 이름도 낯설다. 엎드려 일하는 사람처럼 생긴 섬이라는 뜻이란다. 드론 띄워 내려다보니 초원 펼쳐진 개머리언덕이 아버지의 젊었을 적 등처럼 널찍하다. 수크령 흐드러진 이 해안 언덕이, 백패커라면 누구나 안달하는 꿈의 성지다. 사슴 뛰어놀고 송골매 날아다니는, 인공의 흔적이라곤 희미하게 드러난 길이 전부인 거짓말 같은 풍광에 이끌려 20㎏ 넘는 배낭 짊어진 백패커가 꾸역꾸역 찾아온다.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밤을 보낸다.

굴업도 약사(略史)

중앙일보

드론으로 촬영한 굴업도 북쪽 지형. 큰말해변과 섬에서 하나뿐인 마을이 보이고, 목기미해변 너머로 연평산과 덕물산이 보인다. 손민호 기자

굴업도는 작은 섬이다. 1.7㎢ 면적으로 여의도 절반만 하다. 섬은 대체로 평평하다. 가장 높은 덕물산(138m)을 비롯해, 연평산(128m), 개머리언덕(117m) 등 해발 100m 언저리의 산과 언덕이 길게 누운 섬 양쪽에 자리한다. 여객선 선착장은 목기미해변 곁에 있고, 섬의 유일한 마을은 큰말해변 주변에 있다. ‘큰말’이 큰 마을의 준말이다.


일제 강점기, 굴업도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민어 파시가 열렸다. 그 시절 섬에는 주민보다 외지인이 더 많았다. 어부도 많았지만, 접대부도 많았다. 그 흥청거렸던 세월이 섬 북쪽 목기미해변 너머에 반쯤 허물어진 건물 잔해와 기울어진 나무 전봇대로 남아 있다.

중앙일보

굴업도 백패킹에 동행한 유튜버 '치도(왼쪽)'와 백패커 '채울'. 스물여섯 살 동갑내기는 1박2일 내내 유쾌했고 발랄했다. 사진을 촬영한 장소는 옛날 민어 파시가 열렸던 목기미해변. 손민호 기자

30년쯤 전에는 핵폐기물 처리장이 될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굴업도 바다 밑에서 활성 단층이 발견돼 핵폐기물 처리장 건립 계획이 전면 폐기됐다. 활성 단층이 있다는 건 지진 위험이 있다는 뜻이다. 활성 단층이 발견된 해저 골짜기가 바로 민어 어장이었다.


그로부터 10년쯤 뒤엔 골프장이 들어설 뻔했다. 2006년 CJ그룹 계열사 C&I레저산업이 굴업도에 골프장·호텔 등을 갖춘 관광단지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CJ그룹은 섬의 98.5%를 사들이면서 210억원을 썼다.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거세지자 CJ그룹은 2014년 굴업도 골프장 사업을 포기했다.

중앙일보

굴업도 개머리언덕을 걷고 있는 치도와 채울. 지금 개머리언덕은 수크령이 만발했다. 손민호 기자

2021년 현재, 섬 주인은 여전히 CJ그룹이다. 그래도 주민 10여 명이 산다. 관광객을 상대로 밥도 팔고 방도 판다. 하나 섬의 나머지 1.5%를 소유한 이신숙(59)씨 가족의 민박집 말고는 분쟁 소지가 있다. 백패킹도 엄밀히 말하면 사유지 불법 침입에 해당한다. CJ그룹이 묵인하고 있을 뿐이다. 굴업도가 백패커의 섬이 된 지 10년이 됐다지만, CJ그룹 쪽에서 문제 삼은 적은 없다. ‘섬투어’ 현숭덕(51) 실장에 따르면 굴업도에는 여름 하루 평균 300명이 들어온다. 이 중에서 80% 정도가 백패커다.

한국의 갈라파고스

중앙일보

드론으로 촬영한 목기미해변. 물이 빠진 시각이어서 해안 사구가 훤히 드러났다. 손민호 기자

굴업도는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 섬이다. 하나 아름다운 섬이라고만 하면 곤란하다. 굴업도의 자연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가치를 품고 있다. 이를테면 지리학자에게 굴업도는 박물관 같은 섬이다. 약 9000만년 전 화산활동으로 생긴 지형이 거의 훼손되지 않고 남아있어서다. 토끼섬 주변 해안절벽과 목기미해변, 코끼리바위 같은 굴업도 명물들은 그림 같은 풍경을 넘어 지리학적으로 매우 희귀한 지형이다. 문화재청은 굴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하면서 “국내 어디서도 보기 힘든 해안지형의 백미”라고 평가했다.

중앙일보

굴업도 목기미해변 바위 해안. 물이 빠지면 9000만년 전 형성됐다는 원시 지형이 모습을 드러낸다. 손민호 기자

굴업도는 국내 최대 송골매 서식지이자,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1급 보호종 먹구렁이 서식지다. 세계적 희귀종인 왕은점표범나비와 검은머리물떼새도 굴업도에서 발견된다. 하나 굴업도를 대표하는 야생동물은 따로 있다. 개머리언덕 초원이 제 것인 양 어슬렁거리는 사슴 수십 마리다. 옛날 섬 주민이 방목하던 사슴이 세월이 흘러 야생동물이 됐다. 텐트를 치고 있으면 가까이 와서 기웃거리는 녀석도 있다.

중앙일보

개머리언덕의 마스코트 야생 사슴. 옛날 주민이 방목했던 사슴이 시간이 흘러 야생동물이 됐다. 중앙포토

난대성 식생의 북방한계선과 한대성 식생의 남방한계선도 굴업도에서 만난다. 한라산에 고도에 따라 다른 수목이 자라는 것처럼, 굴업도에서는 산과 해안에서 자라는 식물이 다르다. 굴업도 바다는 서해에서 수심이 가장 깊고, 굴업도 해변은 밀물과 썰물의 수위 차가 가장 크다. 백패커에게 굴업도가 성지면, 동물학자와 식물학자에게 굴업도는 갈라파고스고, 지리학자에게는 살아있는 교과서다.

별 헤는 밤

중앙일보

굴업도 백패킹의 하이라이트는 해가 진 뒤에 시작한다. 인공조명이라곤 은은히 비치는 텐트 불빛 말고는 없는 순전한 밤의 시간이 펼쳐진다. 중앙포토

굴업도 백패커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큰말해변을 지나 섬 남쪽 개머리언덕으로 향한다. 은근히 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개머리언덕에 먼저 도착해야 좋은 사이트를 차지할 수 있어서다. 굴업도 백패킹은 개머리언덕에서 밤을 보낸 뒤 이튿날 목기미해변 너머를 돌아보고 나오는 1박2일 여정이 대부분이다. 물때가 맞으면 토끼섬에 들어가거나 코끼리바위까지 갈 수 있다. 코끼리바위는 인상적이었다. 전국 곳곳에서 코끼리바위를 봤는데, 굴업도 코끼리바위가 제일 코끼리 같았다.

중앙일보

굴업도 코끼리바위. 물이 빠지면 바위까지 접근할 수 있다. 손민호 기자

선착장에서 개머리언덕 끝까지는 2.6㎞ 거리다. 하나 1시간이 더 걸린다. 배낭 메고 산 두 개를 잇달아 넘어야 해서다. 백패커 ‘채울(김채울·26)’과 유튜버 ‘치도(박이슬·26)’도 23㎏ 넘는 배낭 짊어지고 그 길을 걸었다. 땀이 뚝뚝 들었지만, 즐거운 표정은 잃지 않았다. MZ세대의 걸음은 씩씩했고 발랄했다.


백패커가 텐트를 치는 개머리언덕엔 초원 말고 아무것도 없다. 가게도, 화장실도, 전기도 없다. 굴업도 백패커의 배낭이 유난히 크고 무거운 까닭이다. 화기를 금지하지는 않지만, 백패커 대부분이 알아서 불을 쓰지 않는다. 굴업도까지 들어오는 백패커는 캠핑 고수가 대부분이다. 특히 자연주의 캠퍼가 많다. 쓰레기는 아예 만들지도 않으며, 외려 쓰레기가 보일 때마다 주워 담는다. 채울과 치도도 찬물에 먹는 간편식과 커피를 챙겨 왔다.

중앙일보

개머리언덕에서 일몰을 즐기는 치도와 채울. 손민호 기자

굴업도 백패킹의 하이라이트는 일몰과 함께 시작한다. 저녁 해가 하늘과 바다에 시뻘건 기운을 토해내고 사라지면, 굴업도의 새로운 주인이 나타난다. 굴업도의 밤을 지배하는 별이다. 인공조명이라곤 은은히 비치는 텐트 불빛이 전부였던 순전한 밤, 별이 이렇게 밝았었나 새삼 깨달았다. 개머리언덕에 팔베개하고 누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을 헤아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굴업도 이후 백패킹은 시시하겠다고.

중앙일보

굴업도 지도. 중앙포토

여행정보

중앙일보

굴업도 들어가는 배 안에서 채울과 치도. 승객 대부분이 백패커였다. 손민호 기자

굴업도는 인천항에서 남서쪽으로 85㎞, 덕적도에서 남서쪽으로 13㎞ 떨어져 있다. 인천항에서 굴업도로 바로 들어가는 배가 없어 덕적도에서 갈아타야 한다. 인천항에서 덕적도까지는 1시간 남짓 걸린다. 덕적도에서 1시간가량 기다린 뒤 갈아타는데, 덕적도~굴업도 노선은 홀숫날과 짝숫날에 따라 노선이 달라진다. 짝숫날은 덕적도에서 출발한 배가 문갑도~지도~울도~백아도~굴업도 순으로 들어가고, 홀숫날은 역순으로 순회한다. 하여 백패커는 홀숫날을 골라 굴업도에 들어간다. 짝숫날에는 덕적도~굴업도 노선이 2시간 남짓 걸리고, 홀숫날엔 1시간이 채 안 걸린다. 홀숫날을 골라도 인천항에서 굴업도까지 3시간이 걸린다. 경북 포항에서 217㎞ 거리인 울릉도도 세 시간 뱃길이다. 굴업도는 먼 섬이다. 그래도 백패커는 찾아간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