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장이 말려도 지구대 남은 여경…끝내 '무궁화 4개' 달았다

[라이프]by 중앙일보

처음엔 다들 “죽었다 깨나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시간이 흘러도 “어렵지 않겠나. 선례가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마침내 “너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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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은 서울 광진경찰서 화양 지구대장이 10일 저녁 건대역 '맛의 거리'를 순찰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모두 이지은(44) 광진경찰서 화양지구대장이 들었던 말이다. 그는 지난해 말 총경으로 승진해 무궁화 4개가 달린 계급장을 달았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을 해낸 것이다. 그 일은 일선서 지구대장이 경정에서 총경으로 승진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실제 그런 승진 루트는 경찰 창설 이래 이 대장이 처음이라고 한다. 지난 10일 서울 광진구 화양동 화양지구대에서 만난 이 대장은 “그동안은 스펙만 좋았지 알맹이가 없었다. 지구대에 와서 관상용 근육이 아닌 진짜 코어 근육을 단련시킨 것 같다”고 말했다.

유학, 변호사 자격증 딴 뒤 현장으로 유턴

이 대장은 2017년부터 지구대장으로 일했다. 서울 은평경찰서 연신내지구대장으로 부임해 마포경찰서 홍익지구대장을 거쳐 지난해부터 화양지구대장으로 근무했다. 이전엔 경찰청이나 지방청 정책부서, 경찰서 내근직에 몸담았다. 그의 ‘스펙’에 부합하는 경력이었다.


이 대장은 경찰대 17기 출신(97학번)으로 서울대 사회학 석사와 영국 케임브리지대 범죄학 석사, 한림대 법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6회 변호사시험까지 합격했다. ‘고스펙자’로서 앞날이 탄탄대로였을 그가 2001년 경찰 입문 이후 16년 만에 현장을 선택했다. 왜 그랬을까.


이 대장은 “처음에 경찰대에 들어갔을 때 되고 싶었던 경찰은 현장에서 범인을 검거하고 주민들과 범죄를 예방하는 현장의 경찰이었다”며 “영국 유학에 로스쿨 공부까지 하다 보니 ‘현장과 먼 곳에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전국에서도 치안 수요가 상위권에 드는 연신내지구대장에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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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은 서울 광진경찰서 화양 지구대장이 10일 저녁 관내 순찰을 위해 총기를 점검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고위공직자 관사 우범지대에 있어야”

지구대장이 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관내에서 강간 사건이 발생한 장소 앞으로 이사한 것이었다.


“범죄를 업무로서가 아니라 나의 생활로 느끼고 싶었어요. 가보니까 왜 사람들이 ‘여기 밤에 무서워요’‘골목길 무서워요’하는지 알겠더라고요. 내 일이 되니까 치열하게 고민하게 됐습니다.”


이 대장은 “그런 의미에서 모든 고위 공직자들의 관사는 우범지대에 있어야 한다. 주변 환경이 빨리 개선 될 것”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지구대장을 그만두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공동현관 1층에 도어락이 없는 세대를 찾아가 설치를 권유하는데 집주인은 “경찰이 오면 집값이 떨어진다”고 문전박대를 했다. 이 대장은 “그때 ‘아무도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라고 안 했는데…정말 그만둘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떠올렸다. 그러나 동시에 ‘범죄 예방은 경찰 혼자서는 못하겠구나. 공동체 협조를 얻어내는데 경찰이 신경을 많이 써야겠구나’라고도 느꼈다고 한다. 지구대장 1년 차를 마친 그에게 민갑룡 전 경찰청장(당시 차장)이 “현장 경험도 했고 승진해야 하니 본청(경찰청)으로 들어오라”고 권유했는데도 거절한 것도 그래서였다.


동료들을 향해서도 눈을 돌렸다. 독직폭행으로 고소를 당한 동료 경찰관이 있었다. 그의 소송 합의금과 변호사 선임비용을 위한 모금 운동을 진행했는데 이틀만에 1억4000만원이 모인 것이다. 이는 현장 경찰관의 책임 부담을 덜기 위한 경찰법률보험 시행을 앞당기는 계기가 됐다.

“‘거봐, 안된다니까’란 말 듣기 싫었다”

이 대장은 “‘안전’한 곳으로 가서 승진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지만, 조직으로 봐선 슬픈 일 아니냐”며 “열정적이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현장으로 나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바꿔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구대장 4년 차가 됐을 땐 “거봐 안된다니까. 고집 피우지 말고 경찰서 과장으로 가라”는 말도 들었다. 이 대장은 “사실 오기로 여기까지 왔다. 여기서 승진이 된다면 본청, 지방청만 바라보는 경정들이 지구대도 돌아보지 않을까. 제 진심이 닿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대장은 지난해 경찰의 부실대응이 논란이 된 인천 층간소음 흉기 난동 사건도 언급했다. 훈련과 인원 부족을 지적하면서다. 이 대장은 “경찰관은 범죄 현장에서의 공포심과 두려움을 훈련으로 극복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인천 사건 이전에 테이저건을 한 번도 격발 안 해 본 직원들이 많았다. 훈련도 움직이는 피사체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 실전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출동 경찰이 현장을 이탈해 비난의 대상이 된 데 대해서는 “2명이 출동해 가해자, 피해자 분리에 나서면 사실상 단독출동이나 다름없다”며 “지구대 인원은 줄어들 대로 줄어들었다. 기동대로, 수사부서로, 스토킹 등 여청 기능으로 뽑아갔기 때문이다. 다시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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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은 서울 광진경찰서 화양 지구대장이 10일 저녁 출동준비를 위해 대기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미니스커트는 행운의 네 잎 클로버

이 대장은 이전에도 경찰 안팎에서 주목받은 적이 있다. 2012년 경찰청 수사구조개혁단 경감 시절 검사의 경찰 출석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했다. 당시 선글라스에 미니스커트 차림도 화제였다. 그는 외부에 강의를 나갈 때도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는다. 이 대장은 “기분이 좋아지고 자신감이 생기는 옷이 있지 않나. 중요한 일에는 행운의 네 잎 클로버처럼 아끼는 옷을 입고 나가는데 그 옷이 항상 미니스커트였다”고 말했다. 요즘은 옷 고르는 시간이 아까워 근무복 바지에 점퍼 차림으로 다닌다고 한다.


그는 지난해 총경 승진자 87명 중 8명인 여성 경찰관 중 한 명이다. 여경 무용론, 여경 혐오 등이 사회적 이슈가 되는 것에 대해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 피해를 보는 여성 경찰관은 보호해야 하고, 언론 대응도 세련되게 해야 한다. 장기적으론 업무의 성별 구분 자체가 없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경찰의 꽃’이라고도 불리는 총경이 된 이 대장은 앞으로 ‘실전형 리더’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매뉴얼과 보고서는 완벽한데 왜 현장에선 구멍이 날까. 위에서 아무리 보고서를 잘 써 내려보내도 현장에서 실행되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생각한다. 현장을 모르거나 책임지지 못하는 리더가 아니라 명확한 판단을 내리고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는 리더가 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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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2_별톡 그래픽=전유진 기자 yuki@joongang.co.kr

위문희 기자 moonpight@joongang.co.kr, 박건 기자 park.kun@joongang.co.kr

2022.01.14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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