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멍·강멍·논멍의 즐거움…작가 김탁환 인생을 바꾼 '곡성 밥상'

[여행]by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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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소설가 김탁환과 농부 과학자 이동현이 곡성 침실습지 '뿅뿅 다리'에 하늘을 보고 누웠다. 이 두 남자는 수시로 이렇게 섬진강에 나와 논다고 했다. 손민호 기자

곡성은 잘 몰랐다. 전북 남원과 전남 구례 사이에 있어 여행기자도 늘 지나치는 고장이었다. 남원이 가까워 전라북도에 속하는 줄 아는 사람도 많다. 곡성군은 전라남도에 있다. 곡성(谷城)이란 이름이 계곡이 많은 고장이라는 뜻이니 산도 많을 터이나, 지리산 자락이 너머에 있어 산행을 좋아해도 쉬 발길이 닿지 않았다. 섬진강이 곡성을 가로지르지만, 섬진강 하류의 구례나 하동, 광양처럼 강물이 바로 연상되지도 않는다. 이런 경우 여행기자는 흔히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연두와 초록이 교차하는 계절, 곡성으로 내려갔다. 섬진강 신록이 궁금해서만은 아니었다. 한 소설가가 거기 낡은 폐교 건물로 거처를 옮겼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다. 김탁환(54). 문단이 참여문학이 어쩌고 순수문학이 어쩌고 떠들던 시절, 이야기의 힘을 믿고 묵묵히 역사소설의 길을 걸었던 작가다. 시류에 맡겼다면 지금쯤 SF 작가가 됐을 법한 그가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 내려가 벼농사를 짓고 글 쓰며 산다는 소식에 궁금증이 일었다. 4월 28일 곡성에서 농부가 된 과학자와 농부를 꿈꾸는 소설가를 만나 이틀을 걸었다. 둘째 날 아침 봄비가 내렸다. 흙내가 확 끼쳤다.

발아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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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곡성 태안사 입구에 있는 능파각. 곡성으로 내려간 김탁환 작가가 이따금 산책하러 올라오는 숲길에 있다. 작가는 여기 난간에 기대어 책 읽다가 낮잠에 들기도 한단다.

김탁환이 정착한 자리는 ‘미실란’이다. 일본에서 미생물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동현(53) 대표가 2006년 옛 곡성동초등학교 터에 설립한 농업회사법인이다. 미실란은, 농부가 된 과학자가 연구·개발한 유기농 발아현미와 그 가공식품을 파는 회사다.


서울의 소설가가 곡성의 농부 과학자를 알게 된 건 2018년 3월 1일이다. 장편소설 집필을 마치고 지리산에 내려와 바람 쐬고 올라가는 길, 전라도에 사는 친구가 미실란에서 운영하는 식당을 예약했다. ‘밥cafe飯(반)하다’. 그곳에서의 밥 한 끼가 작가의 인생을 바꿨다. 훗날 작가는 “그날이 아니었어도 언젠가 만났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날의 밥상이 분수령이 된 건 분명하다. 그즈음 비건(Vegan·적극적 채식주의자)을 선언한 작가는 고기는커녕 젓갈도 안 들어간 미실란 밥상에 감동했다. 발아현미로 지은 밥과 동네에서 거둔 채소 반찬만으로 차린 유기농 채식밥상이었다. 이날 이후 소설가는 뻔질나게 미실란을 들락거렸다. 그리고 2020년 8월 소설가가 미실란을 알아가는 과정을 적은 에세이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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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미실란. 옛 곡성동초등학교 터에 들어선 농업회사법인이다. 사진 아래 무논이 미실란 논이다. 지난해에는 이 논에 630종의 벼를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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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란 마당의 텃밭. 온갖 쌈 채소를 심었다. 텃밭을 쌀 미(米) 자처럼 만들었다.

2021년 1월. 소설가는 곡성으로 아예 터전을 옮겼다. 1주일에 닷새는 곡성에서 살고 주말은 서울 집에서 보낸다. 요즘 유행한다는 ‘5도2촌(5都2村)’이 아니라 ‘5촌2도’ 생활이다. 곡성에서는 아침에 미실란에 출근해 오전에는 2층 집필실에서 글 쓰고 오후에는 이동현 대표와 논에 나가는 일상을 반복한다. ‘올해 심은 식물들. 벼(630개 품종), 해바라기, 배추, 국화, 바질, 상추, 가지, 곰취 등’. 지난달 출간한 『김탁환의 섬진강 일기』 2021년 11월 9일자에서 인용했다. 이날 일기만 보면 영락없는 농부의 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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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란 생태책방 '들녘의 마음'. 500종의 책이 있는데, 대부분이 생태 관련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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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구석에서 팔고 있는 쌀. 1g 단위로 판다. 책과 쌀 모두 우리의 양식이다.

지난해 12월 18일에는 미실란 건물 옛 교무실 자리에 ‘생태책방 들녘의 마음’을 열었다. 주로 생태 관련 책 500종을 들였는데, 책 300종의 소개 글을 작가가 일일이 써 걸어놨다. 책방 구석에선 1g 단위로 쌀도 판다. 책과 쌀을 나란히 파는 가게라니. 김탁환은 “이야기학교를 열어 동네 주민에 글쓰기도 가르친다”며 “이동현 대표와 문화생태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4월 30일에는 미실란에서 작은 음악회도 열렸다. 벌써 26번째 음악회란다.

걷다가 눕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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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사 능파각 가는 숲길에서 김탁환 소설가와 이동현 미실란 대표. 왼쪽이 소설가다.

김탁환은 농사짓고 글 쓰는 시간 틈틈이 곡성 구석구석을 걷는다. 글이 안 풀리거나 농사가 고되면 일단 걷는다고 했다. 가장 자주 걷는 길은 출퇴근 길이다. 읍내에서 미실란까지 걸어서 40분 걸리는데, 마을과 논 사이에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 있다. 가로수길에는 차가 다니지만, 옆으로 흙길이 있어 하루 두 번 곡성이 자랑하는 명승을 곁에 두는 호사를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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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곡성 읍내에 사는 김탁환 작가가 매일 출퇴근하며 감상하는 길이다. 가로수 바깥으로 사람이 다니는 길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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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으로 촬영한 장선습지. 미실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구불구불 흐르는 섬진강이 모퉁이 곳곳에 습지를 남긴다.

미실란에서는 짬짬이 장선습지로 산보를 나선다. 10분만 나서면 습지다. 미실란에서 키우는 개 ‘복실이’를 데리고 나가기도 하고, 견학 온 단체 손님과 어울려 걷기도 한다. 미실란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산책로는 태안사 가는 길에 있는 ‘숲멍길’이다. 자동차로 20분쯤 달려 태안사 어귀 조태일문학관 앞에 주차한 뒤 능파각까지 숲 우거진 계곡을 따라 1.5㎞를 걸어 올라간다. 자동차가 다니는 비포장도로 옆 계곡을 따라 오솔길과 데크로드가 잘 나 있다. 이 대표와 계곡을 올라간 뒤 능파각 난간에 걸터앉아 계곡물 소리 들으며 책 읽다가 까무룩 낮잠이 들었던 일화를, 김탁환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낮잠 일화도, 소년 같았던 얼굴도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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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습지 뿅뽕 다리 위에서 김탁환 작가와 이동현 대표.

김탁환이 숨겨둔 산책 코스는 침실습지에 있다. 침실습지는 국내에서 22번째로 지정된 국가보호습지다. 섬진강 중상류 강변에 들어선 하천습지로, 물버드나무와 갈대 무성한 강변 초원에 수달·삵·남생이 같은 야생동물이 산다. 침실습지에 사는 생물만 665종에 이른다고 한다. 마을 사람 무시로 다니는 동네 습지가 보호종으로 지정된 야생동물의 터전이다. 곡성에서 사람은 이렇게 자연과 어울린다.


습지에 자동차는 못 다니는 철제 다리가 있다. 다리 철판에 구멍을 퐁퐁 내 ‘퐁퐁 다리’다. 두 남자는 ‘뿅뿅 다리’라고 따로 부른다. 강물이 불면 구멍을 통해 물이 올라오는데, 그때 뿅뿅 소리가 난단다. 다리 복판에서 한참 ‘강멍을 때리던’ 두 남자가 하늘을 바라보고 다리에 드러누웠다. 그들을 따라 나도 누웠다. 등을 타고 발랄한 물소리가 올라오더니 이내 온몸을 감쌌다. 그러고 보니 곡성에서 만난 농부 소설가와 농부 과학자는 길을 걷다 여차하면 누웠다. 곡성의 산과 강처럼 자연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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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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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곡성군은 서울에서 자동차로 3시간 30분 거리다. 농업회사법인 ‘미실란’은 곡성 읍내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다. 곡성의 대표 관광명소인 섬진강 기차마을과도 가깝다. 미실란 ‘밥cafe 飯(반)하다’의 대표 메뉴인 ‘발아오색 낭만세트’는 100% 유기농 비건 식단이다(1인 1만5000원, 2인 이상 주문). 고기 반찬은커녕 생선 한 토막 안 올라온다. 흑미로 만든 죽과 누룽지 샐러드, 두부 지짐, 토란을 넣은 궁중 떡볶이 등이 반찬으로 나온다. 여느 고기 밥상보다 풍성하고 맛있다. 보통 이 밥상에 토란표고탕수(2만원)를 추가해 먹는단다. 김탁환은 조만간 평소 산책 나서는 길을 함께 걷는 ‘걷기 학교’를 열 계획이다.


곡성=글ㆍ사진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2022.05.0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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