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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편찮은 부모 앞 우승하겠다"…이 약속 지킨 '당구 캄보디아댁'

by중앙일보

“10년 동안 꿔왔던 꿈을 드디어 이뤘습니다. 매번 혼자 대회에 다녔는데, 엄마·아빠가 보는 앞에서 처음 우승했습니다. 부모님 건강검진을 지원해 준 윤재연 사장님(블루원 대표이사) 고맙습니다. 남편은 어려운 아이들을 돕겠다며 지금 캄보디아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여보! 제가 우승했어요~.”

‘캄보디아 댁’ 으로 불리는 당구 선수 스롱 피아비(32)가 한국어로 밝힌 소감이다. “편찮으신 부모님 앞에서 우승하겠다”고 다짐했던 피아비가 그 약속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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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비가 27일 블루원리조트 LPBA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다. [사진 PBA]

피아비는 26일 경주 블루원리조트에서 열린 프로당구 ‘블루원리조트 LPBA 챔피언십’ 결승에서 이미래를 4-3(11-9, 10-11, 11-0, 11-1, 9-11, 3-11, 9-4)으로 꺾었다. 결승은 7전4승제 11점 제(최종 7세트만 9점)로 치러졌다.


피아비는 첫 세트에 하이런(한 이닝 연속 최다점) 7점을 몰아쳐 기선을 제압했다. 2세트를 내줬지만, 3세트를 11-0으로 완벽하게 따냈다. 에버리지 2.200을 기록하며 4세트도 11-1로 가져왔다. 5, 6세트를 내준 피아비는 7세트 4이닝까지 3-4로 끌려갔다. 하지만 피아비가 5이닝에 6점을 쓸어 담으면서 9-4로 역전승을 거뒀다. 경기가 끝난 뒤 피아비는 무릎을 꿇고 감격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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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찮은 부모님 앞에서 우승 하겠다고 다짐했던 당구 캄보디아댁 스롱 피아비가 약속을 지켰다. 27일 블루원리조트 LPBA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다. [사진 PBA]

관중석에서는 그의 부모님이 딸의 경기를 지켜봤다. 지난달, 피아비는 시집온 지 12년 만에 처음으로 부모님을 한국에 모셔왔다. 어머니 석 젠털(50)이 어지럼증세를 보였지만, 캄보디아 병원에서 정확한 진단을 못 내렸다. 한국에서 진단 결과 석 젠털은 목에서 결석이 발견됐다. 캄보디아에서 감자 농사일을 하며 힘들어하던 아버지 찬 스롱(51)은 심장 쪽에 이상이 있어 이달 말 시술을 받기로 했다.


지난 15일 충북 청주에서 만났던 모친 석 젠털은 캄보디아식 합장 인사를 하며 “외국인은 보험 적용이 안 돼 치료비가 많이 든다고 들었는데, 한국에서 도움을 줘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소속팀 블루원엔젤스 구단주가 건강검진비를 지원해줬고, 충북대학교 병원에서 진료에 도움을 줬다. 당시 피아비는 “엄마 아빠에게 꼭 트로피를 선물하고 싶다. 목숨 걸고 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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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건강검진과 치료를 받은 피아비 부모님. [사진 피아비]

피아비는 16강에서 오수정, 8강에서 이지연을 2-0으로 연파했다. 4강에서 김가영을 3-2로 꺾은 데 이어 결승에서도 풀세트 접전 끝에 승리했다. 피아비는 지난 시즌 블루원리조트 챔피언십, 에버콜라겐 챔피언십에 이어 프로당구 개인 통산 3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이날 우승상금 2000만원을 획득, 누적상금 9940만원을 기록하게 됐다.


피아비는 “캄보디아에서는 머리에 살짝 물을 뿌리면 행운이 깃든다는 속설이 있는데, 아빠가 첫 경기부터 결승까지 매일 물을 뿌려줬다. 결승 날에는 ‘더 많이 뿌려 달라’고 했다”며 “한국에 와서 후원도 받고, 돈도 벌었는데 부모님에게 새로운 집을 사드리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 스롱 찬은 “우리 딸이 한국에서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걸 직접 확인하니 뿌듯하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어머니 석 젠털은 “최근에 돌아가신 피아비의 외할머니가 하늘에서 손녀를 도와주셨나 보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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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다문화 당구 아카데미에서 만난 피아비와 남편 김만식씨가 하트를 만들어 보이고 있다. 박린 기자

캄보디아 캄퐁참에서 부모님 감자 농사를 돕던 피아비는 2010년 청주에서 작은 인쇄소를 하던 김만식(61)씨와 국제결혼 했다. 이듬해 남편을 따라간 당구장에서 처음 큐를 잡았고, 남편이 사준 3만원 짜리 큐로 인생을 바꿨다. 이날 경기장에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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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비는 고국을 찾아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구충제, 학용품, 신발 등을 전달하는 봉사활동을 한다. [사진 피아비]

피아비는 “남편은 현재 캄보디아에 머물며 사업을 구상 중이다. 상금을 모아 캄보디아의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게 목표인데 거기에 도움 되는 일을 찾고 있다”고 전했다. 종종 고국을 찾아 캄보디아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구충제와 학용품, 신발을 나눠줬던 피아비는 현지에 홍수를 피해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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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