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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싱싱한 키위 있습니다" 이 용달차에 요즘 MZ 난리났다

by중앙일보

“싱싱한 키위 있습니다. 고당도 멜론도 있습니다. 구경은 공짜” 다마스 용달차 트렁크를 열고 길가에 좌판을 깔아놓은 모양새가 언뜻 과일이라도 파는 차인가 싶어 다가 가보니 플라스틱 바구니에 티셔츠가 담겨있다. 멜론부터 키위, 바나나와 아보카도 등 과일이 프린트된 흰색 티셔츠다. 이곳의 상호는 ‘김씨네 과일.’ 이마저도 박스 한 면을 찢어 매직으로 어설프게 쓴 간판이다.


김씨네 과일 가게의 주인은 티셔츠 아티스트 김도영(29) 씨. 동료와 함께 망사로 된 검은색 조끼를 입고 초록색 손수건을 목에 둘러맨 채 호객행위를 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과일 장수다. 최근 다마스를 타고 전국을 순회하며 티셔츠를 파느라 정신없다는 그를 지난달 23일 만나 인터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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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네 과일 가게 전경. 과일을 새긴 티셔츠를 전국을 돌며 판매한다. [사진 김도영]

플리마켓에서 시작, 생활형 티셔츠 장수

김씨네 과일 가게의 시작은 지난 5월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플리마켓(벼룩시장)에 참여하면서부터다. 광고 관련 전공으로 대학을 다니면서 지난 2013년부터 벌써 9년째 티셔츠 작업을 해 왔다는 김도영 씨. 이번에는 어떤 티셔츠를 만들어볼까 고민하다가 과일을 떠올렸다고 한다. 시장에서 판매하는 품목 중 티셔츠에 새기기 좋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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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부산푸드필름페스타에서 열린 행사에 참여해 티셔츠를 판매하고 있다. 동료 조용일(왼쪽)씨와 김도영(오른쪽)씨. [사진 김도영]

토마토·자두·포도·바나나 등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과일을 디지털 프린트로 새겨 넣은 흰색 티셔츠를 만들었다. 이왕 과일 무늬니 과일 담는 빨간 바구니에 담아 팔기로 했다. 바구니마다 제품을 알리는 박스 종이를 올려두고 소개 멘트도 재밌게 적었다. 체리 티셔츠에는 ‘정신 체리자’, 멜론 티셔츠에는 ‘고당도 차트 1위 멜론’, 복숭아 티셔츠에는 ‘저스틴 비바피치쓰’라고 적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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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티셔츠들. [사진 김도영]

반응은 뜨거웠다. SNS를 타고 김씨네 과일 가게의 모습이 알려지면서 문의가 폭주했다. 본래 플리마켓에서만 일시적으로 판매하려고 만들었던 과일 티셔츠의 상품성이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김 씨는 “과일이 워낙 공감하기 쉬운 소재인 데다 새겨 넣으면 은근히 귀엽고 긍정적이기도 해 남녀노소 다 즐길 수 있는 티셔츠가 된 것 같다”며 “가족티나 커플티로 사 가는 분들도 많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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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에 판매 공지를 하면 이른 시간부터 줄이 생길정도로 인기가 많다. [사진 김도영]

다마스 타고 전국 방문 판매

이후 다마스에 과일 티셔츠를 싣고 대전, 대구, 부산 등 전국을 돌기 시작했다. SNS 계정에 언제 어디에서 티셔츠를 팔 것이라는 일정과 장소를 올리면 사람들이 몰려왔다. 아무래도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려지다 보니 1020 젊은 세대들이 많다. 오픈 2시간 전부터 수십 명씩 줄을 서는 것도 예사다. 한 번에 500여장 정도씩, 넉넉히 프린트해가도 동나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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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판매를 알리는 SNS 게시물. [사진 김도영]

앞면만이 아니라 뒷면도 꼼꼼하게 인쇄를 넣고 완성도도 고려해야 하다 보니 한 번에 많이 찍기는 어렵다고 한다. 한 번은 지방에서 하루 만에 티셔츠가 다 팔려 용산 사무실로 돌아와 밤새 티셔츠를 찍고 다시 내려간 적도 있다고 한다. 부산 사는 손님이 부산 왔을 때 못 샀다며 다른 지역까지 따라온 적도 있다. 김 씨는 “일부러 웃기려고 한 건 아닌데, 과일 장수처럼 티셔츠를 판매한다는 점을 재밌게 봐주는 것 같다”며 “단순히 티셔츠를 하나 사는 게 아니라 사는 과정 자체를 경험으로 즐기는 것”이라고 나름의 인기 이유를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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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과일 가게처럼 상자에 담고 전단지, 비닐 봉투 등을 준비했다. [사진 김도영]

김흥국 랩티로 인지도, 온라인보다 오프라인

“티셔츠는 하고 싶은 말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어릴 때부터 티셔츠에 ‘꽂혔던’ 김도영씨는 티셔츠를 단순한 의류가 아닌 문화로 해석하길 즐긴다. 마치 빈 도화지처럼 하고 싶은 말을 드러내기 최적화된 캔버스라는 의미다. 때론 광고판 같기도 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표현 수단으로 티셔츠를 바라본다.


과일 티셔츠를 제작하기 전에는 주로 인물 위주의 티셔츠 작업을 해왔다. 힙합 문화에서 파생된 ‘랩티(rap tee)’가 그것이다. 랩티는 가수 등 유명인의 허가를 받지 않고 팬들이 굿즈 형태로 만든 해적판 티셔츠를 의미한다. 김씨가 만든 티셔츠 중에는 ‘김흥국 티’가 가장 유명하다. 따로 판매는 하지 않고 몇장 제작해 지인들이나 주변 래퍼들에게 증정했는데 살 수 있는지 문의가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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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로 출장 판매를 하러 갔다. 지역에 맞춰 한라봉, 감귤 티셔츠도 판매했다. [사진 김도영]

지난 2019년부터는 ‘파도타기’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주로 온라인으로 티셔츠를 판매하고 있다. 김씨네 과일가게는 잠깐 하려고 만들었지만, 이제는 너무 유명해진 일종의 스핀오프(파생상품) 브랜드인 셈이다. 과일 티셔츠가 유명해지면서 ‘국티원탑’이라는 애칭도 얻었다. 한국에서 가장 잘하는 래퍼를 재미있게 표현하는 ‘국힙원탑’에서 온 별명이다.


김씨네 과일가게는 당분간 온라인보다 오프라인 판매 위주로 진행할 예정이다. 홈쇼핑 출연도 계획하고 있다. 온라인이 당연한 시대에, 오프라인으로 일일이 만나 티셔츠를 담은 비닐을 건네는 경험 자체가 귀한 콘텐트이자 김씨네 과일 가게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김 씨는 “팝업이나 협업 제안이 많이 오고 있는데, 상품 가치보다는 경험 가치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만들어 가려고 한다”고 계획을 전했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