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하고도 아름답다, 설국 울릉도

[여행]by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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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는 국내 가장 많은 눈이 내리는 지역이다. ‘겨울 여행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이유다. 지난달 25일 북면 천부항에서 송곳봉 일대의 설경을 담았다.

울릉도는 겨우내 순백색이다. 국내에서 가장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 가는 길은 멀고 험하지만, 어디에도 없는 겨울 비경을 품고 있다. 해서 ‘겨울 여행의 끝판왕’으로 통한다. 이맘때 나리분지는 아예 거대한 눈 놀이터가 된다.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설원을 헤치고 다니며 눈장난을 할 수 있다. 지난달 설 연휴를 반납하고 들어간 울릉도에서 불행인지 다행인지 엄청난 폭설을 만났다. 대설이 지나간 뒤 찬란한 은빛 세상이 찾아왔다.

지난달 75㎝ 폭설 뒤 은빛설국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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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분지는 울릉도에서도 눈이 가장 많이 쌓이는 장소다. 자연설에서 노르딕스키와 이글루 등을 체험해볼 수 있어 겨울철에도 많은 산악인·백패커·스키어들이 찾는다. 백종현 기자

울릉도 여행은 녹록지 않다. 섬에 드는 방법이 뱃길 뿐인데, 이것부터가 난관이다. 배편은 포항·후포항(울진)·강릉·묵호(동해) 네 곳에만 있고, 3시간가량 파도를 뚫고 가야 한다. 문제는 겨울이다. 기상이 변덕스러운 겨울에는 파도와 바람이 거세고, 여객선 이용률도 낮아 배편이 결항하는 일이 잦다.


요즘은 사정이 나아졌다. 이태 전 9월 포항 영일만과 울릉도 사동항을 잇는 울릉크루즈(최대 승객 1200명, 자동차 200대)가 취항하면서 울릉도 뱃길이 한결 편해졌다. 울릉크루즈 박영인 과장은 “기존 쾌속선은 파고가 3m 미만이어야 운항할 수 있지만, 울릉크루즈는 5m까지도 운항할 수 있다”며 “연간 100일을 훌쩍 넘겼던 여객선 결항률이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덕분에 울릉도의 겨울 풍경도 달라졌단다. 섬을 찾는 여행자가 크게 늘었고, 손님이 없어 겨우내 문을 닫았던 가게도 겨울 장사를 시작했다. 지난해 크루즈 탑승객은 44만 명에 이른다.


지난달 22일 오후 11시 포항 영일만에서 출항하는 울릉크루즈에 몸을 실었다. 울릉도까지 장장 7시간에 달하는 뱃길이었지만, 몸은 편했다. 아무 데나 드러눕는 낡은 바닥형 좌석이 아니라, 침대 딸린 2인실 객실에 몸을 뉘었다. 샤워 시설도 있고, 조식도 딸려 나왔다. 오전 7시 20분,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울릉도 사동항 앞이었다. 동해 너머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올겨울 최강 한파’라는 뉴스로 전국이 떠들썩했던 지난달 24일. 울릉도에는 눈이 쏟아졌다. 그냥 눈이 아니라, 적설량이 75㎝에 이르는 폭설이었다. 눈을 피해 이틀 만에 숙소를 빠져나오니, 섬 전체가 은빛이었다. 도로와 자동차, 항구와 마을을 죄 삼켜버린 대설의 풍경은 어디서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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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라 윈터 피크닉’이 열리는 나리분지에서 캠핑 장비를 무료로 빌릴 수 있다.

울릉도에서도 가장 많은 눈이 쌓인다는 나리분지로 이동하니 더욱 현실감이 없었다. 지난 계절 더덕과 옥수수 따위로 무성했던 너른 밭은 아예 그 형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성인봉(984m)을 비롯해 나리분지를 감싼 봉우리들의 자태는 수묵화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서울에서 포항까지 자동차로 4시간, 다시 울릉도까지 뱃길로 7시간, 그리고 눈에 갇힌 이틀까지 이 모든 험한 여정이 단번에 용서되는 장관이었다.


나리분지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눈이 그쳤어도 경사가 심해 제설 작업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여행자는 멀찍이 차를 대고 두발로 고갯길을 넘었다.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에서 수많은 여행자가 미끄러지고 넘어졌다. 그래도 하나같이 아이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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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취항한 울릉크루즈. 하루 한 번 포항~울릉도를 오간다.

나리분지 안쪽에서는 ‘울라 윈터 피크닉(2월 28일까지)’이라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코스모스 리조트와 울릉크루즈가 겨울 울릉도를 띄울 심산으로 올해 처음 축제를 기획했단다.

자연설서 ‘노르딕 스키’ 즐길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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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분지에 쌓인 눈으로 이글루를 만들고 있는 여행자의 모습.

축제 분위기는 딱 겨울 울릉도다웠다. 나리분지에서 캠핑을 한 백패커 몇몇이 이글루를 만들며 눈 세상을 만끽하고 있었고, 설원을 누비는 스키어도 눈에 띄었다. 최희찬 울릉산악회장이 “나리분지는 북유럽에서나 즐기는 ‘노르딕 스키’를 자연설에서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귀띔했다.


축제장 한편에서 노르딕 스키와 신발, 스틱도 빌릴 수 있었다. 실력은 둘째 치더라도 장비를 갖추고 설원 위에 서자 자동으로 인생 사진이 완성됐다. 천부 버스정류장과 나리분지를 오가는 셔틀버스는 물론이고 야영장 이용과 캠핑 장비 대여 모두 공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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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식당’의 엉겅퀴소고깃국.

울릉도 여행의 절반은 사실 먹는 즐거움이다. 울릉도에 내리면 누구나 뜨끈한 국물 요리부터 찾게 된다. 장시간 뱃길을 달리며 헛헛해진 속을 달래기 위해서다. 이번에는 명성 높은 오징어내장탕·따깨비칼국수 대신에 엉겅퀴소고깃국으로 첫 끼를 시작했다. 울릉도 특산물인 물엉겅퀴는 타지역 산과 달리 뻣뻣하지 않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울릉도에서는 보통 시래기처럼 된장국에 넣어 먹는데, 얼큰하게 끓여낸 소고깃국에도 무척 잘 어울렸다.


꽁치물회도 울릉도 대표 향토 음식이다. 현포항 앞 ‘만광식당’이 소문난 맛집인데, 길쭉하게 썰어낸 꽁치 살을 오이·배·상추 등과 함께 고추장·된장·설탕에 섞어 비벼 먹는다. 의외로 비린 맛이 전혀 없어, 호불호 없이 즐길 수 있다.


나리분지에서는 절대 빈속에 마을을 뜨면 안 된다. 산채비빔밥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 네 곳이 분지 안쪽에 포진해 있는데, 저마다 강력한 손맛을 자랑한다. 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겨울에도 갖은 나물 반찬이 상에 올라온다. 일명 ‘씨껍데기술’로 불리는 나리분지 전통주에 울릉도 더덕전까지 곁들이면 천국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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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갱이 와플과 독도새우빵.

젊은 감성의 카페도 속속 생기고 있다. 서면 태하리의 카페 ‘래우’에서 독도새우 닮은 독도새우빵을 내놓는다. 머리에는 초콜릿 앙금, 꼬리에는 치즈 앙금이 들어간다. 코스모스 리조트 내 카페 ‘울라’에서는 울릉도 해양심층수 소금을 넣은 소금라떼가 인기 메뉴다. 송곳봉과 코끼리바위 등 절경을 누릴 수 있어 투숙객이 아닌 손님도 즐겨 찾는 다. 사동항 카페 ‘미당’에서는 울릉도 홍감자를 똑 닮은 홍감자빵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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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동항 ‘울라 웰컴하우스’. 맛집, 여행 코스 등이 담긴 여행 카드로 나만의 일정을 짜볼 수 있다.

울릉도 겨울 여행은 아는 것이 힘이다. 기상에 따라 배편이 달라지거나, 관광지가 문을 닫는 경우가 잦아 관련 정보를 놓쳤다가는 헛걸음을 하기 일쑤다. ‘울릉군 알리미’는 울릉도 주민이 달고 사는 필수 앱이다. 대중교통 운행, 관광지 운영 여부 등 생활 정보를 실시간으로 알려준다. ‘윈디’라는 앱도 유용하다. 바람·파도를 비롯한 날씨 정보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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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대바위에서 본 저동항의 설경.

울릉도가 처음이라면 첫날 저동항 인근 ‘울라 웰컴하우스’부터 들르는 것이 순서다. 지난해 5월 개관한 여행자센터인데, 이곳에서 여객선 운항정보와 관광지 운영 상황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센터에 들어서면 벽면을 가득 채운 손바닥만 한 크기의 카드가 눈길을 끈다. 울릉도 대표 식당과 카페, 관광지, 여행 코스 등을 담은 일명 ‘보다 놀다 먹다’ 카드인데, 종류가 200여 종에 달했다. 카드 한장 한장이 안내지도이자 할인 쿠폰 역할을 해줘 취향대로 골라 담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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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면의 조각공원 ‘예림원’에는 애기동백이 벌써 꽃을 피웠다.

울라 웰컴하우스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섬 일주를 해봤다. 항구마을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저동항 명물 촛대바위를 시작으로, 해안 절벽을 따라 난 행남 해안 산책로를 걷고, 독도박물관을 구경했다. 북면 노인봉 자락의 조각공원 ‘예림원’에서는 매화와 애기동백이 벌써 꽃망울을 터트린 채 멋을 부리고 있었다. 일몰 풍경은 서면 남서일몰전망대에서, 저녁은 사동항 인근 고깃집에서 약소고기로 해결했다. 저 먼 울릉도에서 올겨울 가장 혹독하고 신나는 하루를 보냈다.


글·사진 백종현 기자 baek.jonghyun@joongang.co.kr

2023.02.1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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