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의 손예진요? 저도 이제 40대에요”

[트렌드]by 점프볼

[김종수의 농구人터뷰(40)] ‘아리공주' 강영숙

“손예진……요? 아악! 제발 그러지마세요. 그것 언제적 얘기인데요”

’아리공주‘ 강영숙(41‧186cm)은 10년이 훌쩍 넘는 기간동안 WKBL에서 활약하며 롱런 센터로 이름을 날렸다. 정규시즌 평균 5.96득점, 4.57리바운드, 1.04어시스트는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출장 경기수를 살펴보면 그것도 아니다. 2000년 겨울리그부터 시작해 2014~15시즌까지 무려 457경기를 소화했다. 기록과는 별개로 얼마나 알토란같은 존재였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 그녀도 ‘손예진’이라는 말에는 손사레를 치며 빠르고 강한 부정의 리액션을 보였다. “워워…, 큰일나요. 어지간한 연예인들도 손예진하고 비교되면 굴욕을 당하거나 욕을 먹잖아요. 하물며 저는 운동인인데…, 연예인들만큼 예쁘지도 잘 관리되지도 못했고요. 그래도 살짝 느낌은 있었나봐요. 하하핫…, 이제는 완전히 아줌마가 되어서 예전에 비하면 그 느낌마저도 더 옅어졌겠지만 어쨌든 좋게 봐주신다는 것이니까 감사할 뿐이죠”


자칫 민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도 기분좋게 받아넘기는 유쾌한 성격이 돋보였다. 보통 미녀 선수로 불리는 상당수가 가드 쪽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체격좋은 빅맨으로서 그런 애칭이 붙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의 인기와 매력지수가 짐작됐다. 더불어 특유의 밝은 분위기는 선수 시절이나 지금이나 여전해보였다.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와 달리 강영숙의 플레이 스타일은 매우 터프했다. 공격적으로 리바운드 쟁탈전을 벌였고 상대가 자신보다 큰 국내선수든 외국인선수든 가리지않고 거칠게 몸싸움을 펼쳤다. 육탄전이라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강하게 포스트업을 쳤고 그 가운데 과격한 신경전이 벌어져도 결코 주눅들지 않았다. 늘 시선은 공을 향해 있는지라 공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몸을 날리고 바닥을 굴렀다. 소위 말하는 선이 고운 농구, 예쁜농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수비 등 궂은 일에 먼저 나서는 살림꾼이었다.


“선수라면 누구나 화려한 역할을 하고 싶죠. 그래야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물론 기록도 잘 쌓아가서 연봉협상 등에서 메리트도 있고요. 하지만 그 모든 것들에 앞서 선수라면 팀이 이기는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돋보이면 뭐해요. 팀이 지면 의미가 없지않을까 싶어요”


항상 팀 위주로 생각하는 마인드를 입증하듯 강영숙은 팀이 이기는데 많은 역할을 해냈다. 상황에 따라서는 1개도 끼기 힘든 우승반지를 무려 11개나 차지했다. 열 손가락을 다 채우고도 한 개가 남는다. 그러한 공헌도를 인정받아 2010~11 시즌에는 정규리그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감독이나 동료들 입장에서는 함께 하는 것으로도 든든한 스타일이었다.


우리은행 시절 팀선배였던 이종애(47‧187cm) 극동대 교수는 “밝은 성격에 성실한 자세가 돋보였던지라 어딜가든 예쁨받을만한 후배였다. 몸을 사리지않고 헌신적으로 뛰어다니고 강한 몸싸움도 불사하는지라 기록외적인 팀 공헌도가 높은 유형이었다고 생각한다. 선수시절처럼 감독으로도 성공적 커리어를 이어갈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살아남기 위해 몸을 키우고 힘으로 들이댔습니다”

Q.현재 대구시청 사령탑을 맡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2018년도에 정선화 선수랑 함께 일본에 3X3경기를 하러 간적이 있어요. 당시 정선화 선수가 대구시청에서 플레잉코치로 활약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정선화 선수가 프로무대로 다시 복귀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저에게 대구시청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들어오게 되면서 바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됐어요. 지도자를 하고 있는 선배들을 보면서 관심이 갔던 영역인데 마침 좋은 기회가 왔고 열심히 하고 있는 중입니다.


Q.예전과 비교해 실업팀 숫자가 확 줄어들었죠?

네. 그렇습니다. 현재 제대로 운영되는 팀은 사천시청, 김천시청, 대구시청 이렇게 세 팀이고요. 본래는 대전시청도 함께했는데 코로나 이후 해체된 상황이에요. 가뜩이나 팀도 적은데 많이 아쉽죠. 어쨌든 거기에 더해 대회가 있을 때마다 각지역 농구협회 소속팀들이 들쑥날쑥 참가하고는 있는데 상황별로 달라지는지라 꾸준함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전국체전같은 경우는 대학팀들도 참가해요. 때문에 경쟁이 가장 치열한 편이죠.


Q.대학팀, 실업팀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변화가 생긴 듯 싶어요.

맞아요. 남자선수들과 달리 여자선수들은 예전부터 대학을 안 거치고 바로 직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잖아요. 저때도 그랬고요. 하지만 지금은 살짝 풍토가 달라졌어요. 신인드래프트에서 낙방하거나 어렵게 들어가도 출장 시간을 얻기 부족하겠다는 판단이 서면 실력향상을 위해서 대학을 진학하기도해요. 더불어 그런 연장선에서 실업팀에도 변화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프로에서 은퇴한 언니들이 실업팀을 많이 찾았어요. 지금과 비교해 은퇴시기가 빠르기도 해서 ‘아직 나는 건재한데… 농구가 더 하고 싶다’ 이런 케이스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프로에 가지 못한 선수 혹은 중간에 그만둔 선수 등이 많이 오고 있어요. 일단은 농구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겠죠. 그러다 보니 프로팀에서도 실업팀을 눈여겨보고 있어요. 실업팀에서 뛰면서 다시 몸 상태가 좋아지고 부활하거나 혹은 기량이 더 늘어나는 케이스도 있으니까요. 염윤아, 이민지 등이 대표적인 선수들이죠. 


아참! 저에게 감독이 될 계기를 만들어줬던 정선화 선수도 여기에 해당될 수 있겠네요. 프로의 벽이 높은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설사 잘 풀리지 않는다해도 대학 혹은 실업팀에서 열심히 하다 보면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올 수 있으니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드리고 싶어요. 학창 시절 내내 농구만 했을텐데 그대로 끝내기에는 너무 아쉽잖아요. 성공 여부를 떠나 선수로서 실컷 뛰어보는 것도 이후에 후회하는 것보다는 나을 듯 싶어요.


Q.선수 강영숙과 감독 강영숙은 어떻게 다를지 궁금합니다.

다른 분들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선수 때는 나만 잘하면 됐는데 지도자가 되고 나니까 모두를 신경써야하잖아요. 잘하는 선수는 잘하는데로, 조금 아쉬운 선수는 그 나름대로 현재 상태보다 더 나아가게 만들어야 되는지라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거기에 여자선수들이다보니까 감정적인 부분에서도 더 세심할 필요가 있더라고요. 더불어 최근 세대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막 완전 예전 시대를 살아온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합숙을 하면서 다소 거칠게 농구를 배워온 세대에요.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당시의 방식이 몸에 배인 부분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고로 지도자를 하면 안되요. 강하게, 약하게 그런 뜻이 아니라 나와 다른 세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팀을 하나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요즘 젊은 세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를 어느 정도는 알고 접근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느낀 것이지만 저때는 관심받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하는 선수들이 많았던 듯 싶은데 요즘은 아니더라고요. 뭐랄까…? 즐기는 것 같아요.(웃음) 이런 것은 나쁘지 않아 보여요. 선수 시절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을 감독하면서 많이 느끼고 하루하루 배워가고 있습니다.


Q.본래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들었는데, 현역 시절 주장을 해봤던 경험이 지도자 생활에도 영향을 줬을 듯 싶어요.

맞아요. 어느 정도 도움을 준 것 만큼은 분명하죠. 다수를 상대로 의견을 주고받고 소통하는 것은 분명 해본 사람과 안해본 사람간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해도 계속해서 노력하다보면 성격 등에서도 변화가 오더라고요. 사실 당시에도 제가 최고참급이라 주장은 한 것은 아니었어요. (전)주원 언니, (정)선민 언니, (진)미정언니 등과 함께 뛸 때도 주장을 했었거든요. 군대로 따지면 상병 정도 위치였다고 해야할까요. 어쨌거나 저에게는 쉽지 않을 수도 있는 자리였지만 언니들이 많이 도와주고 후배들도 잘 따라줘서 잘 마쳤던 기억이 납니다.


Q.성격이 둥글둥글 되게 좋았나봐요?

아뇨.(웃음) 꼭 그렇지도 않았어요. 나름 터프함으로 무장하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 농구스타일 보셨으면 아실걸요. 몸싸움 자주하고 되게 터프하게 플레이를 했어요. 어찌 보면 골병 들기 딱 좋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제가 이름값이 높았던 슈퍼 루키도 아니고 기술적으로 엄청 뛰어난 선수도 아닌지라 선수 생활 초기에는 기회도 많이 못 받았거든요. 거기에 신발 신고 186cm인데 당시 경쟁했던 선수 중에는 저보다 큰 선수들도 많았어요. 빠르지도 못했고요. 


이렇게 얘기하니까 단점 투성이인 것 같기는 하지만 진짜로 그랬어요. 그렇다고 힘들게 들어온 프로무대에서 뒤쳐질 수는 없잖아요. 어쨌든 생존해야 되니까 몸을 키우고 힘으로 막 들이댄거죠. 어깨도 넓고 골격도 좋은 편이라 잘한 선택같아요. 학창 시절에도 그런 면이 있었지만 프로에서는 아예 저만의 특화된 장점으로 승화시켜버렸죠. 골고루 전천후로 잘하면 더할나위없이 좋겠지만 그렇지않은 경우에는 ‘내가 어떤 부분을 잘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중요한 듯 싶어요. 또 팀마다 저같은 스타일이 필요하기에 조직농구에도 잘 스며들어갔고요. 그렇게 플레이했던 덕분에 기록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나름대로 오랜기간 뛸 수 있었잖아요.

“다가오는 남자들요? 주변에서 알아서 다 차단했다고 하더라고요”

Q.두 딸의 엄마로 알고있어요. 요즘 농구인 2세들이 핫한데 농구를 시키실 생각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맞아요. 현재 7살, 6살 연년생으로 딸 둘을 키우고 있습니다. 일단은 아직 어려서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렵지만 적어도 한명 정도는 농구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어요. 남편이나 저나 키가 크기 때문에 아무래도 아이들도 클 가능성이 높잖아요. 실제로 지금도 또래들보다 큰편이고요. 아예 농구에 관심이 없거나 다른 쪽을 원하면 할 수 없지만 흥미를 가진다면 가르쳐보고 싶습니다.


Q.현 남편 분과 오랜기간 연예를 하신 것으로도 유명해요.

맞아요. 한 10년차에 결혼을 했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주변에서는 ‘마음 안변하고 서로 오래갔네’라고 말씀도 하시더라고요. 일단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 제일 컸다고 생각하고요. 제가 운동선수인 관계로 합숙을 했던 이유도 조금은 영향이 있겠죠. 뭘하고 싶어도 운동말고는 시간내기가 어려웠거든요(웃음) 지금은 연애 등도 자유롭다고 들었는데 그때는 제재도 있고해서 연애를 하기는 쉽지 않은 환경이었습니다. 일부에서는 ‘다른 이성들에게 관심이 들어오거나 그런 적은 없었냐고?’물어오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답변을 해보자면, 저는 그때 지금의 남편을 만난다고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잘 생기지 않았고 설혹 관심을 표한다해도 주변에서 알아서 커트를 해줬다고 들었습니다. 나중에 듣고 ‘왜 그랬냐고?’ 따졌던 기억이 납니…, 하핫! 농담입니다.


Q.손예진이라는 별명도 붙고 미녀 센터로 유명했어요. 한창 주변의 인기를 실감하던 시절도 있었죠?

아…, 그 시절도 그랬지만 지금도 이런 이야기 나오면 솔직히 많이 민망합니다. 대단한 배우와 닮았다고 해주시니 여자로서 기분좋은 부분도 있죠. 하지만 상대가 너무 강력해요(웃음). 손예진은 같은 배우들 사이에서도 알아주는 외모잖아요. 닮았다기보다는 잠깐 스친 모습에서 그런 느낌이 있었던 듯 싶은데 그러기에도 상대가 상대인지라…, 손예진 말고 추자현 닮았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어쨌든 현재는 나이도 있고 체격도 더 커져서 그때 그 느낌 조차 없을거에요. 제가 구태여 언급하지않아도 역대 농구선수 중에 예쁜 분이 정말 많아요. 저는 끼지도 못합니다. 다만 빅맨 포지션인데다 골밑에서 몸싸움도 터프하게 하는데, 그런 것 치고는 선방했네. 그런 의미 아닐까요? 


지금은 저도 아줌마고 해서 그때 그 시절 추억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난처한 마음도 있고 그랬습니다. 제 입으로 제가 손예진이네 하는 말은 한적이 없음에도 그런 식으로 소개되거나 기사가 나가면 딱 욕먹기 좋거든요. 사람들 입장에서는 ‘빅맨치고는…’하면서 좋게 봐주려고 하다가도 ‘뭐! 손예진?’이렇게 나올 수도 있잖아요. 저뿐 아니라 많은 운동선수들이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쨌든 단 한분이라도 ‘느낌있네’라고 생각해주신 팬분이 있으면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전하고 싶어요. 

“정선민 언니와는 함께 뛰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됐습니다”

Q.농구는 어떤 계기로 시작하시게 된 것인가요?

자의반 타의반으로 중학교 1학년때 시작했어요. 키가 컸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죠. 집안에 키크신 분들이 꽤 계세요. 고모 할머니도 예전에 농구를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집근처 동주여중으로 진학하게 됐는데 그때쯤 농구얘기가 나와서 소개시켜준 선생님과 직접 찾아가서 농구를 하게된거죠. 어떤 분들은 여기에 대해서 재미있는 일화나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다고 하던데 저는 좀 밋밋한 것 같아요. 아! 생각나는 일화가 하나 있네요. 당시 여학생들은 커트머리였거든요. 운동부는 더 짧았을 수도 있고요. 그때 체육관으로 찾아갔는데 안에 머리가 짧은 선배들이 우르르 앉아있어서 ‘어? 남자부로 잘못왔나?’싶어서 깜짝 놀라 문을 닫고 나갔던 헤프닝도 있었어요.


Q.처음에는 어떤 포지션을 맡았을까요?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쭉 센터였어요. 프로에 가서는 저보다 장신자들도 적지 않았지만 농구를 배우던 당시 또래 중에서는 계속 큰 축에 속했으니까요. 학교마다 전통이라는게 있잖아요. 저희 동주같은 경우는 유독 빼어난 슈터를 많이 배출했다고 하더라고요. 빅맨포지션은 드물었던 듯 싶어요. 그래서 당시에 선배들이 ‘동주 출신 중에서는 너가 2번째로 나온 이름 값 좀 있는 센터다’라고 말했던 기억도 납니다. 프로에서는 몸싸움을 많이하는 센터로 불렸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몸싸움을 그렇게 많이하지는 않았어요. 이유는 간단하죠. 프로에서는 몸싸움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고, 학창시절에는 구태여 그렇게 하지 않아도 공격을 성공시킬수 있었으니까요.


Q.고등학교 1학년 때는 계약금 1억 원을 미리 줄테니 본인들 팀으로 오라는 제안까지 받았다고 들었어요.

막 2학년 올라가려던 때였을거에요. 제가 기량적으로 나쁘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얘기도 나왔겠지만 당시는 IMF가 터지기 전이라 각 농구단 별로 여유가 있던 시절이에요. 저 뿐만아니라 1억 얘기 나온 친구들도 좀 있었을겁니다. 당시는 농구좀 한다싶으면 1억은 물론 많게는 3억까지도 받았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1학년이었으니까 좀더 성장하면 더 받을수있을 것이다고 판단했어요. 하지만 이후 반년만에 IMF가 터지면서 그런 말들이 싹 사라지고 말았죠. 저희가 신인드래프트 1기거든요. 처음 주자라는 점에서 저희도 힘들었지만 바로 윗언니들이 가장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Q.하지만 실업팀 숫자가 부쩍 줄어들면서 예상보다 낮은 2라운드로 지명받았어요. 다소 실망스런 마음은 들지 않았나요?

그때 학교를 둘러싸고 사건 사고가 좀 많았어요. 학교 뿐 아니라 선생님까지…, 약간 좀 복잡했어요. 한때는 1순위 얘기까지 나왔지만 나중에 뒤로 밀려서 2라운드 5순위(전체 10순위)로 지명을 받게 됐죠. 하지만 또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제가 진짜로 잘했으면 더 높은 순위로 뽑일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독보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으면 모든 주변 환경까지 깨트릴 수 있었을 테니까요. 물어보시니까 대답하는건데 솔직히 조금 실망스런 마음도 있었어요. 그때 한창 대만을 많이 가는 분위기였어요. 대만행도 생각해봤고, 어떤 실업팀에서도 스카웃 제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프로는 한번 가봐야하지않나라는 생각을 했고 툭툭털고 입단하게 된거죠. 받아들여야 되는 현실이니까요.

Q.당시 또래 중에서 대어로 꼽히던 선수들로는 누가 있었을까요?

일단 지명 순위가 말해주듯 전체 1순위로 뽑힌 홍현희 선수는 대어중의 대어라고 할 수 있었겠고요. 강윤미도 알아주는 센터였죠. 저랑 홍현희, 강윤미 이렇게 ‘센터 빅3’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가 제일 후순위로 지명됐고요. 현재는 동기들 대부분이 은퇴한 상태네요.


Q.처음에는 활약이 미미했어요. 아무래도 출장 시간을 많이 못가져간 탓도 있겠죠?

그렇죠. 우리은행에 입단했을 때 이미 탄탄한 포스트가 만들어져 있었어요. (이)종애 언니도 있었고 홍현희 선수는 저와 드래프트 동기지만 순번에서 차이가 컸고요. 무엇보다 다들 마르고 잘뛰던 선수들이었어요. 당시 팀컬러도 거기에 맞춰져 있었고요. 반면 저는 거기에 맞는 기동성을 발휘할만한 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진지하게 저에 대해 생각해봤죠. ‘어떻게하면 경기를 뛸 수 있을까?’ 일단 죽었다 깨어나도 스피드에서의 경쟁은 불가능하겠고 살아남을길은 몸싸움, 수비집중 등을 통해 다른 스타일로 가야겠구나 깨닫게됐습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팀에서 참 잘해주셨어요. 언니들도 마찬가지고요. 활약은 미미했지만 당시 기억이 나쁘지않은 이유죠.


Q.대기만성형으로 꼽혀요. 신한은행으로 트레이드 된후 블루워커로 명성을 떨쳤어요.

사실 트레이드가 된 배경에는 제가 FA를 앞두고 있다는 점도 이유가 됐을거에요. 이런저런 것을 떠나 저는 출장 시간에 목마른 상태였고 팀에서는 그만큼 주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FA자격을 얻으면 떠날 것이다고 예상하고 미리 트레이드를 하게된거죠. 하지만 인생은 참 얄궂은게 트레이드되어서 바로 기회를 얻지는 못했어요. 부상을 입어서 1년 반정도를 쉴 수밖에 없었거든요. 멀쩡할 때는 기회가 없고 뛰려고 하니까 부상을 당하고,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정말이지 운동선수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멘탈관리를 잘해야되는 것 같아요. 몸과 마음은 따로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라 어느 한쪽이 흔들리면 같이 무너질 수 있거든요. 


어쨌든 부상 회복이 어느정도 된 후에 임달식 감독님이 오시고 난 다음 기회도 많이 주시고 성장할 수 있게 밀어주셨죠. 제 농구인생에서 굉장히 고마운 분입니다. 그동안 출장기회에 엄청 목말라 있던 상태에서 코트에서 뛰는 시간이 늘어가니까 너무 신이 나더라고요. 뭘해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이게 자신감이구나 싶었죠. 더불어 당시 멤버가 너무 좋았어요. (정)선민 언니와 함께 농구를 같이하면 자연스레 잘할 수밖에 없고 (전)주원 언니의 패스를 받으면 넣을 수밖에 없는(웃음), 그런 상황이었죠.


Q.비슷한 포지션의 정선민 선배를 멘토로 자주 꼽더라고요.

맞아요. 다들 아시다시피 농구적인 측면에서는 나무랄데가 없는 완벽한 선수잖아요. 경기력이나, 코트 안팎에서의 모습이나…, 정말 정석적이고 교과서같은 선배였어요. 옆에서 선배로서 가르쳐주신 것도 있었지만 가장 좋았던 점은 훈련, 연습경기시에 계속 부딪혀 볼 수 있었다는 점이에요. 어찌보면 저만의 메리트잖아요. 딴팀 선수들은 시합 때나 겨룰 수 있는데, 저는 수없이 선민 언니랑 맞상대를 하다보니 그 자체로 기량이 쭉쭉 늘더라고요.


Q.정선민과 함께 뛸 때는 센터로, 하은주와 있을 때는 파워포워드로 뛰었죠?

그랬죠. 어차피 골밑에서 뛰는 것은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선민 언니와 (하)은주는 포지션은 물론 스타일도 많이 달랐으니까 거기에 맞춰서 변화된 플레이를 해야 했죠. 선민 언니같은 경우 워낙 공격력이 좋잖아요. 제가 옆에서 궂은 일을 많이 해주면서 언니가 원활하게 플레이하게 만들어 주는게 맞죠. 은주랑 호흡을 맞출 때는 활동량을 더 높여야 될 때도 있었지만 사실 함께 뛰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어요. 다들 아시다시피 은주가 플레잉 타임을 많이 가져가지는 않았으니까요. 임감독님께서 상황에 맞게 배분을 잘해주셨어요.


Q.KDB생명에서 신정자와 더블 포스트를 맞추기도 했어요. 플레이 스타일이나 호흡적인 측면에서 또 달랐을 것 같아요.

그렇지도 않아요. 신정자 선수가 플레이 스타일이 또 달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표팀에서도 호흡을 맞춰보고 그래서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문제는 외국인선수도 있는지라 국내선수들만 의식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포스트의 한축은 무조건 외국인선수잖아요. 사실 그곳에서의 큰 기억은 없어요. 잠깐 뛰었으니까요. 그리고 얼마있지않고 또 우리은행으로 트레이드 되었어요. 저한테는 거의 선수 생활의 황혼기였죠. 

“캐칭 수비, 제 나름대로 요령을 터득했습니다”

Q.기억에 남는 외국인선수로는 누가 있을까요?

일단 저는 타미카 캐칭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우리은행시절에 잠깐 같이 뛰었고 이후 신한은행으로가서는 제가 수비해야 되는 입장이 됐죠. 사실 캐칭은 지금도 역대 최고 외국인선수중 한명으로 꼽히고 있잖아요. 정말 잘해도 너무 잘했죠. 내외곽을 넘나드는 득점머신이자 시야도 좋았고 파워, 기동력, 운동능력 어느것 하나 빠지는 부분이 없었죠. 사실 수비 자체가 안된다는 평가도 있었던 선수에요. 어쨌든 경기에서 이기려면 캐칭을 누군가는 막아야 했는데 제가 그 역할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전 두려울게 없었어요. 어차피 제가 득점으로 승부하는 선수도 아니었고 그런 역할이라도 잘해야 출장시간을 많이 가져갈 수 있었으니까요. 일단 짐작하시겠지만 정상적으로는 캐칭 수비가 안되죠. 결국 더티하게 수비하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몸싸움하고, 최대한 어렵게 골을 넣게 하는 거죠. 그러다보면 캐칭도 사람인지라 체력도 떨어지고 멘탈적으로도 짜증이 나지않겠어요.


Q.예전 선수들 얘기 들어보면 옷잡아 끄는 것은 기본이고 꼬집기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랬다는 말은 저도 들은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간혹 때리기는 했지만 꼬집지는 않았어요.(웃음) 때린다는 것도 일부러 막 치고 그런 것은 아니고 동작 중에 이어져 때리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충돌이나 가격도 감수하고 과감하게 움직임을 가져가는 것이죠. 그러다보면 제가 때릴 수도 있고 맞기도 해요. 사실 농구처럼 몸으로 부딪히는 스포츠에서 그런 식의 플레이는 안나올 수가 없어요. 비농구인이 볼 때는 예전보다 많이 줄어든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저희들의 눈에는 다 보여요. 최대한 심판의 눈을 속이면서 하는 플레이가 더 발전한 것 뿐이죠.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외곽슛을 많이 쏘는 추세라 외곽에서의 반칙도 장난아닌 듯 싶더라고요.


Q.최근에는 악착같은 수비수나 살림꾼 유형이 많이 줄어든 듯 싶어요.

맞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다들 본인이 공격하는 것을 좋아해서 수비, 궂은 일에 집중하는 선수가 줄어든 것 같기는 해요. 예전에 진미정 선수 같이 수비잘하는 확실한 특급 디펜더가 있으면 감독도 다양한 전술을 펼치기 쉽거든요. 팀마다 비슷한 유형의 선수가 한명 씩은 있었던 듯 싶은데 요즘은 좀 귀해진 추세에요. 일단 그런 역할을 선호하지 않으니까요. 예전 신한은행만 예로 들어보자고요. 멤버가 워낙 막강했고 그 덕분에 우승도 많이 했다고 하잖아요. 사실이기는 하죠. 그러나 코트 밸런스가 좋았다는 부분도 잊어버려서는 안될 듯 싶어요. 당시 신한은행은 패스, 슛, 수비 등 특정 부분에서 뛰어난 선수들이 있었고 그로인해 톱니바퀴처럼 시스템이 척척 돌아갔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부분에서는 조금 부족한 듯 보여요. 공격수만 3명있다고 화력이 3배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누군가 그 공격이 원활 할 수 있도록 패스도 해주고 상대 에이스도 막아주면서 부담을 줄여줘야 균형이 맞는 것이죠. 다른 팀들이 KB나 우리은행을 못잡는 이유 중에 그부분도 큰 것 같아요.


Q.아무래도 미녀 운동선수하면 배구 선수들이 많이 꼽히잖아요. 한데 지금보니 농구 선수들도 만만치 않아요. 옷차림이나 그런 것의 영향도 있을까요?

다들 인정하다시피 배구 선수들 예쁘죠. 하지만 농구 선수들도 예쁜 선수들은 많지만 단순히 ‘아름다움을 표출하는 방식’에서는 불리한 점도 많아요. 일단 화장을 할 수가 없어요. 서로 수시로 몸을 비비고 부대끼는데 화장같은 것하면 막 번지고 지워지겠죠. 더불어 몸싸움이 수시로 일어나다보니 몸매 관리? 이런 것들은 생각도 못합니다. 힘에서 밀리기 싫으면 웨이트도 많이 하고 몸을 키워야되니까요. 반면 배구선수들은 신체접촉없이 뛰기만하니까 몸매라인 이런 것들이 더 예쁘게 만들어지는 부분도 있어요. 일부러 예쁘게 보이려고 신경쓰는 선수도 거의 없겠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는게 농구라는 종목이죠. 그래도 요즘은 뛰는 농구도 많이하고 미디어 노출도 잦아서 예전보다는 관리(?)를 하는 것 같기도 하더라고요.


Q.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제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죠. 지금 제 직책은 대구시청의 사령탑이니까, 현재 맡고 있는 팀과 선수들이 잘 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불태우고 싶습니다. 남편은 물론 시댁에서도 제가 지금 일을 편하게 할 수 있게 많이 도와주고 계세요. 덕분에 저도 팀에 집중할 수 있고 대구시청이 예전보다 경기력이 좋아졌다는 얘기도 들려오고있어 뿌듯하고 동기부여도 되고 그래요.


Q.마지막으로 여전히 농구인 강영숙을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인터뷰 제의가 들어왔을 때 잠시 선수 시절을 떠올려봤어요. 가슴이 막 뛰고 설레는 그런 기분이 들더라고요. 단지 회상만 잠깐 했을 뿐인데요. 그만큼 팬 분들께 받은 사랑이 컷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고맙고 행복한 일이죠. 현재도 지도자로서 응원해주시는 분들도 계시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팬분들만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앞으로 무엇을 하던지간에 늘 그 마음 잊지않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여자농구도 많이 사랑해주세요. 관심, 격려, 응원이 선수들에게는 가장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사랑합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루키 더 바스켓

2022.11.0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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