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수호신 김주성

[이슈]by 점프볼

신동파와 이충희, 허재, 그리고 서장훈…. 한 시대를 풍미해온 농구스타들이다. 지금 시대 한국농구를 상징하는 선수는 바로 김주성이다. 그가 없는 국가대표팀은 어떤 모습일지, 그가 없는 KBL과 동부는 어떨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대학생 시절 대표팀에 데뷔해 1990년대와 2000년대 한국농구의 희노애락을 모두 겪었던 그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함께 영예롭게 대표팀 자리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시안게임 5회 연속 출전

김주성은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을 시작으로 2010년 광저우까지 4회 연속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번 인천아시안게임까지 참가를 한다면 5회 연속 아시안게임 출전이라는 의미 있는 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농구는 물론이고, 전 종목을 통틀어 봐도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농구에선 서장훈이 4회 연속 출전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김주성은 “많이 나갔지만, 성적이 좋지 않았던 적이 많다. 참사에는 다 끼어있었다”며 쑥스러워했다. 소속팀과 대표팀을 오가며 쉴 새 없이 뛰어온 그는 늘 부상을 안고 있었지만, 아시안게임이 열리는 해에는 항상 대표팀을 지켰다.


Q. 매년 대표팀과 소속팀을 오갔는데, 힘든 점은 없나요?

2013년에 특히 많이 힘들었어요. 시즌에 들어와서 자꾸 부상을 당해서…. 3번이나 다쳤죠. 많이 힘들었어요. 하지만 일단 뽑혔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일터잖아요. 일터가 사라지면 돈을 못 버는 건데, 일터를 살리기 위해 노력해야죠.


Q. 아시안게임 5회 출전을 이루었는데, 대단한 기록입니다.

많이 했다고 해서 좋은 건 아닌 것 같아요. 기간에 비해 성적은 안 좋았으니까요. 제 농구인생에 오점이라고 해야 할까요? 물론 저 혼자만의 책임은 아니지만, 제가 제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라고 할 수 있죠. 그래도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던 건, 나름대로 좋을 때나 안 좋을 때나 대표팀을 지켰다는 점이에요. 지금이 농구가 치고 올라가는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이번 기회를 좋은 성적으로 이어가야 할 것 같아요.


Q. 세계대회 출전도 1998년 세계선수권(현 FIBA 월드컵)이후 처음이었죠.

월드컵 티켓을 따면서 많은 걸 느꼈어요. 티켓을 거머쥐었다는 자체가 저에게 굉장히 큰 의미였죠. 후배들도 세계대회에 출전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요.


Q. 처음 겪었던 세계선수권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

전 막내여서 거의 벤치에만 있었어요. 세계적인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는 게 좋은 경험이었죠. 보면 눈이 즐거웠어요. 플레이가 고급스러워서 느끼는 바가 많았죠. 그런 걸 보면서 제 자신을 더 채찍질 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기술은 과거, 신체능력은 지금

김주성이 처음 성인무대에 등장했을 때만 해도 그는 만인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이미 대표팀에 서장훈이라는 거목이 있긴 했지만, 김주성 정도의 키에 그처럼 빠르고 높이 뛰는 선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2m가 넘는 선수들이 가드처럼 뛰어다니며 덩크슛을 꽂는다. 김주성은 과거와 현재 선수들의 성향에 대한 질문에 기술은 과거 선수들이 더 뛰어난데 반해, 지금 선수들은 신체능력으로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있다고 분석했다.


Q. 서장훈과 김주성의 비교는 많은 이들의 관심사였습니다.

서장훈 선배와 대표팀에서 같이 뛰었을 때 장점이 많아 재밌게 농구했어요. 상대 팀으로 만났을 때는 막기 힘든 선수였죠. 골밑 플레이가 좋고 슛도 정확한 선수였으니까요. 프로 초기에는 서장훈 선배를 막을 방법이 없었어요. 제가 성장하고 서장훈 선배가 나이가 들었을 때야 격차가 조금 줄어들었죠. 만약 서장훈 선배의 나이차가 2~3년 정도 밖에 나지 않았더라면, 저는 평생 서장훈 선배의 그늘에 가려졌을 거예다. 진심으로 한 번도 라이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선수 시절 내내 조금이라도 따라잡자는 생각뿐이었죠. 다시 말하지만, 나의 경쟁상대가 아닌 멘토이셨습니다.


Q. 어떤 이들은 김주성 선수가 일찍 도전했다면 NBA도 가능했을 거라고 하는데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저를 판단했을 때는 말이죠. 농구를 빨리 시작했던 것도 아니고, 센스가 좀 더 좋았던 것뿐인 것 같아요. 단지 아쉬웠던 건 미국캠프 같은 걸 경험하거나, 잘 먹고,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았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있어요.


Q. 국제대회에서 뛰는 모습을 보면 또 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국제대회라고 특별한 노하우는 없어요. 지기 싫고, 창피 당하기 싫으니까 악착같이 한 거죠. 힘은 안 되지만, 발을 걸어서라도 이기고 싶고, 국제대회에 나가면 악으로, 깡으로 하겠다는 생각은 있었어요. 아무래도 많이 나가보다 보니까 몸싸움 방식이나 요령은 좀 아는 것 같아요, 국제 룰은 몸싸움을 충분히 인정해주거든요. 그런 부분을 인지하고 들어가죠. 저도 좀 더 거칠게 하는 편이고요.

Q. 과거에 비해 장신 후배들이 많이 늘었어요. 후배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제가 누굴 평가할 위치는 아닌 것 같아요(웃음). 지금도 충분히 잘 하고 있어요. 열심히 하려고 하는 의지가 보여요. 거들먹거리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 하는 모습이 기특하죠. 요즘 선수들을 보면 과거 선배들과 반비례 하는 것 같아요. 예전 선배들은 기술이 좋았던 반면, 요즘 선수들은 기술은 다소 떨어져도 신체능력으로 커버를 하는 것 같아요. 문제는 외국도 그만큼 커졌다는 거죠(웃음). NBA도 일단 신체능력이 좋은 선수를 먼저 뽑는다고 하더라고요. 기술은 그 다음에 가르쳐도 되니까요. 김종규, 이종현 등도 모두 신체능력이 좋아요. 예전엔 2m 이상 되는 선수는 느리다는 편견이 많았는데, 이제는 많이 빨라진 것 같아요. 아직은 어리다 보니까 부족한 면도 있지만, 잘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더 좋아질 거라 믿어요.


Q. 수많은 국제경기를 치렀는데, 어떤 경기가 가장 기억나나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하고 2013년 FIBA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월드컵 티켓 땄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그동안 열심히 안 뛰었던 적은 없지만, 2013년에는 정말… 피를 토하는 한이 있어도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3, 4위전에서 대만을 만났는데, 대만은 안 만나길 바랐던 팀이었어요. 존스컵에서 지기도 했고요. 근데 존스컵은 대만 홈이라 불리할 거란 생각은 했죠. 대만이 저희한테 약하긴 해요. 먼저 무너지더라고요.


Q. 대표팀에서 가장 잘 맞았던 파트너가 있다면?

(김)승현이 형이랑 가장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승현이 형과 경기 할 때가 제일 재밌었죠. 일단 승현이 형한테 공을 주고 뛰면 됐어요. 안 보고 있는 것 같아도 다 보고 있거든요. 어떻게든 패스가 왔죠. 예전 한중 올스타전 할 때도 재밌었어요. 승현이 형이 은퇴한다고 했을 때도 아쉬웠어요. 문자로 “내가 생각했을 때도 형이 최고였던 것 같아”라고 보내기도 했죠. 허재 형 이후로 제일 좋은 선수였던 것 같아요. 승현이 형과 프로에서 한 번쯤 같이 뛰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아쉽죠. 지금 생각해봐도 형들이랑 같이 농구했을 때가 재밌었고, 기억에 많이 남는 것 같아요.


Q. 국제대회 편파 판정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 같아요.

2010년 아시안게임 때 중국을 이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편파 판정이 나왔을 때 기분이 엄청나게 안 좋았죠. 평정심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 했어요. 한국으로 오면 되갚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훈련장도 저~기 멀리 있는 데로 잡고요(웃음). 확실히 그 때 중국의 전력이 예전보다는 약해졌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Q. 2002년에 데뷔해 2018년까지 프로선수로 뛰었습니다. 신인 때 이토록 오래 선수 생활을 할 줄 알았나요.

이렇게 오래할 줄 몰랐습니다. 그렇다고 선수 생활을 짧게 할 생각도 없었죠. 당장 열릴 경기에 맞춰 앞만 보고 달려왔을 뿐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시즌에는 뒤에서 후배들을 지켜보면서 옆도 보고 뒤도 돌아보는 시즌을 보냈어요. 열심히 뛰는 후배들의 모습을 보게 됐고, 벤치에 있는 선수들은 어떤 심정일지도 느끼게 됐죠.


Q. 32번이 영구결번이 되어 체육관에 걸렸습니다. 32번을 달게 된 계기가 있나요?

고등학교 때는 33번을 달았어요. 센터의 번호라고 여겨지던 시기여서 그냥 달았죠. 55번을 달고 있는 선수들이 많아 저는 33번을 선택했어요. 하지만 이후 NBA 선수들을 보니깐 32번을 다는 센터들이 많더군요. 그래서 프로에 와서 32번을 달았습니다. 그때는 그저 그런 번호였지만, 지금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나와 농구 인생을 함께한 번호니까요.

금메달 연금 기부한 김주성

김주성은 국가대표팀에서도 활약이 대단했다. 205cm의 큰 키에 정확한 슛까지 갖춰 다른 나라 선수들도 막기 힘들어했다. 김주성은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과 2014 인천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아시아 정상에 대한 한국농구계의 오랜 염원을 이루어주었다. 두 번의 금메달 덕분에 그는 국가로부터 연금도 받게 됐다. 하지만 김주성은 이를 남을 위해 쓰기로 결심한다. 이러한 결정 뒤에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을 키운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몸이 불편한 가운데서도 아들 뒷바라지를 해온 부모님을 보며, 그는 농구선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Q. 기부를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사실 기부를 많이 하고 싶었어요. 부모님 몸이 불편하셔서 어렸을 때부터 힘들게 살아왔거든요. 어렸을 때는 기부를 하려면 큰 돈이 필요한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더군요. 작은 기부가 모여 큰 기부가 되더라고요.


Q. 기부활동을 꾸준히 하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아무래도 큰 금액으로 기부를 하게 되면 부담이 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작은 것부터 나눠준다면 꾸준히 기부활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돈이 없으면 재능기부를 하면 되지요. 그것도 기부 활동 중 하나입니다. 과거와 달리 기부문화가 많이 바뀌었잖아요. 많은 사람이 적은 금액부터 재능기부까지 여러 형태로 기부활동을 펼치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마음을 주면 기부를 꾸준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Q. 김주성 선수에게 부모님은 어떤 분인가요?

제가 프로농구 선수가 된 것은 가족의 힘이다. 부모님의 몸이 좋지 않으셨기에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죄송스러웠죠. 그래서 악으로, 깡으로 버텨냈어요. 덕분에 프로농구선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Q. 두 번의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받는 연금도 기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두 개 따면 연금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어떤 방법으로 기부를 할까 생각해왔기에 쉬운 결정이었습니다. 어렵게 딴 금메달인 만큼, 그 연금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역시 저에게는 큰 의미가 될 거예요. 큰 액수는 아니지만 값진 금메달로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게 됐어요. 부모님과의 약속을 지킨 거 같아 기분이 좋아요.


Q. 기부활동 중 어느 것이 가장 기억에 남나요.

연탄 기부가 가장 기억이 나요. 아직도 연탄을 사용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은 보통 평지가 아닌 골목 언덕 끝에 사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고지대이기 때문에 연탄을 배달할 경우 인건비가 붙어 더 비쌀 수 밖에 없죠. 그 사실을 알고 많이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더 의욕을 가지고 연탄 기부활동을 해왔죠. 연탄 한 장이라도 많은 분을 위해 좋게 쓰였으면 합니다.


김주성은 ...

1979년 11월 9일생인 김주성은 부산에서 태어나 동아중, 동아고를 졸업했다. 중앙대 시절, 일찌감치 성인대표팀에 이름을 올린 그는 2002년과 2014년 아시안게임 우승을 거머쥐었다. 또한 소속팀 DB(TG삼보, 동부)를 2003년, 2005년, 2008년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2004년, 2012년, 2015년, 2018년에도 챔피언결정전에는 올랐지만 준우승에 머물렀다. 2017-2018시즌을 끝으로 커리어를 마쳤으며, 현재는 친정팀 DB에서 코치를 맡고 있다. 프로농구 사상 1만 득점을 돌파한 3명(서장훈, 추승균) 중 한 명이며, 최초로 1,000개의 블록슛을 기록하기도 했다.


사진_ 문복주, 유용우, 한필상 기자

2022.09.23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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