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땅끝 해남으로 떠나는 '자발적 유배' 여행
인생에 쉼표가 필요할때, 스스로를 멀리 유배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 도심에서 벗어나 나 자신에게 잠시 멈춤의 시간을 선물하기 좋은 ‘찐’ 해남을 소개한다.
‘제주도 다음은 남해안이다’ 혹은 ‘남해안을 제주도처럼 즐겨보자’는 생각으로 남해안 여행 개발을 두루 하고 있는데, 그중 해남에 주목하고 있다. 올해 해남을 두 번 답사했는데 제법 넓은 땅이었다.
해남에서의 동선은 자연스럽게 수직으로 그어졌다. 고산 윤선도 고택(녹우당)과 두륜산 대흥사, 달마산 미황사와 땅끝 등 해남의 주요 관광지를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동선이 수직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해남의 공간감을 두루 느껴보려고 일부러 수평으로 동선을 짜보았다. 수직으로 이동하면서 느끼지 못했던 광활함이 있었다. 낮은 언덕에 끝없이 펼쳐진 밭이 무안의 무한 언덕만큼 평온함을 주었고, 너른 해남 벌판은 우리 밥상을 책임지고 있었다.
풍요로운 밥상, 넉넉한 어른과 교감하는 고장
‘땅끝 해남 스테이’ 구성을 위해 두 번의 답사를 마쳤다. 해남 여행은 나에게 무엇이었나를 반추해보니 ‘좋은 어른을 만나는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되짚어보니 해남의 좋은 여행감은 좋은 어른들과의 만남에서 왔다. 해남에 다녀가면 마음이 배가 불렀다. 도시의 속도를 늦춰주는 평온함이 있는데, 그것은 해남 어른들과의 만남에 기인했다.
집안 단위에서는 곳간에서 인심이 나지만 마을 단위에서는 벌판에서 인심이 난다. 해남이 그랬다. 전라도에서 농경지가 가장 넓은 지방자치단체 중 한 곳인 덕분에 한때 인구가 24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금은 7만 명에 못 미치지만. 해남 벌판에서 나는 풍부한 농산물에 더해 진도와 완도에서 올라오는 다양한 해산물까지, 해남의 밥상은 늘 풍요로웠다.
해남 어른들은 마음 씀씀이가 넉넉했다. 기다려줄 줄 알았다. 여행자는 늘 우유부단하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그래서 여행자를 맞는 사람은 품이 넉넉해야 한다. 해남이 그랬다. 별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편안했다.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줄 아는 여유가 있었다.
화원요 정기봉 명인과의 찻자리도 그랬다. 사람을 가리지 않았고 그저 자리의 비좁음을 걱정했다. 언제 어떻게 오든 탓하지 않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와의 만남에서 장인의 높은 자존감과 어른의 푸근한 품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선대부터 어렵게 해남 녹청자를 복원했지만 그 우월함을 강조하지 않고 청자의 다양한 스펙트럼 중에서 녹청자의 위치도 있다는 것만 환기시켰다.
북평에서 만난 어른들도 그랬다. 주인인데도 객처럼 조심스러워했다. 해월루 마당에서 플라멩코 공연을 준비했는데, 입구에서 발길을 돌리셨다고 했다. 혹시나 불편해할까 봐. 황급히 기별해서 공연에 모시니 활기찬 추임새로 공연자를 북돋아주었다. 한옥에서 플라멩코를 추는 무모한 실험을 적극 응원해주었다.
공연이 끝나고 이장님이 ‘만원짜리 한 장이면 기분 좋게 취할 수 있는 곳’이라며 손목을 잡아당겼다. 가막(가게 막걸리)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직 장사 준비가 안 되었지만 휴가 나오는 아들 주려고 끓여놓았다는 장어탕 한 그릇을 내주어 황급히 막걸리 잔을 비웠다. 한 병 더 하라는 가게 주인의 배려에 이장님은 “집에 여자가 기다리고 있네” 하며 넉살 좋게 문을 열고 나온다.
이장님은 바빴다. 골목의 가게를 돌면서 공지사항을 전하며 이장의 책무를 다했다. 어느 가게에서 사정이 있어 참석을 못한다고 하자, “염병허네” 하고 제법 큰 소리로 혼잣말을 하고 나왔다. 이 말의 뉘앙스는 욕이 아니라 “뭐, 그럼 어쩔 수 없지”의 의미라고 했다.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자발적 유배 장소로 최적
객들의 저녁상이 부실할까 봐 ‘홍어카페’ 사장님은 홍어를 챙겨 오셨다. 이분이 운영하는 곳은 말 그대로 홍어카페다. 홍어 삼합을 먹는 곳이지만 고흐의 그림이 걸려 있는 카페다. 가게 구경을 청하자 멸치무침을 기어이 맛보게 했던 분이다. 이분의 소원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성터 위 빈집에 ‘진짜’ 카페를 여는 것이다.
홍어카페 사장님은 플라멩코 공연을 보기 위해 스카프를 두르고 하이힐을 신고 오셨다. 준비된 관객 덕분에 공연장이 완성되었다. 좋은 공연에는 공연자는 물론 관객의 준비도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홍어카페 사장님의 스카프 덕분에 해월루는 단숨에 스페인 이비자의 정열적인 노천카페가 되었다. 급히 숙소를 찾는 우리 일행을 위해 기꺼이 공간을 내준 에루화헌의 나무님, 척박한 산중턱에서 한 땀 한 땀 나무를 가꾼 포레스트수목원 원장님, 작업실이 필요한 작가들을 위해 폐교를 레지던시로 일군 행촌문화재단 관장님 모두 여행에서 다시 보고 싶은 어른들이다. 이들과의 아름다운 교감을 기억하며 ‘땅끝 해남 스테이’를 구성해보았다.
여행은 때로 계산된 고립이다. 땅끝이라는 말이 주는 위태로움을 즐길 수 있는 해남은 ‘수고하고 짐 진 도시인을 위한 자발적 유배’ 장소로 제격이었다. 두 번의 답사 후 2박 3일의 ‘땅끝 해남 스테이’ 프로그램 구성을 위해 감안할 것을 정리해보았다. 세 번째 답사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일정을 짜보려고 한다. 두 번째 전문가 답사에서는 해남 여행 3대장이라 할 수 있는 대흥사(두륜산), 미황사(달마고도, 도솔암), 땅끝(탑과 전망대)을 일부러 뺐다. 이곳은 검증이 필요 없는 풍경 맛집이니까.
실제로 땅끝 해남 스테이를 구성할 때 이 3대장을 유효한 카드로 활용할 예정이다. 주연이 아니라 조연으로. 녹우당은 미리 신청하면 해남 윤씨 종가에서 나온 해설가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설명의 원칙은 관람객들이 알아들을 만큼만인데, 설명을 계속 들으면서 돌아볼 사람과 혼자 둘러볼 사람을 분리해서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가능하다면 고택에 잠시나마 들어가 겹처마를 확인해볼 것을 권한다.(허락을 받아야 가능하다).
녹우당에서는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뒷산의 비자림을 산책하거나 땅끝 순례 문학관을 둘러볼 시간을 주는 것이 좋다. 포레스트수목원은 인문학적 공간이다. 거창한 인문학이 아니라 인간이 그린 무늬가 있는 곳이다. 낙향해서 수목원을 가꾼 원장은 자신이 얻은 삶의 교훈을 소박한 조형물과 함께 적어놓았다. 그 조형물들을 하나하나 발견하고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좇아가며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른쪽 수목원 구간은 잘 가꿔져 사진 찍기에 좋은 곳이 많고, 등산로 구간은 잘 보전되어 있어
산책하기에 좋다. 보해매실농원에서는 뜻밖의 풍경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원래 매실 과수원을 보호하기 위해 길가에 심은 동백나무가 큰 구실을 한다. 나지막한 언덕과 어우러져 유럽의 어느 전원을 걷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성을 보러 갔다 근위병의 근사한 교대식까지 보고 나온 느낌이다. 매화가 피기 시작하고 동백이 지기 시작하는 시기에 가면 제격이다.
술 한잔, 차 한잔 기울이며 숨 고르는 시간
조선시대 제주로 가던 관선이 출항하던 포구에 객사로 지어진 건물을 복원한 해월루는 ‘바다에 달이 비친다’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다. 이곳에서 이진성지까지 변방을 지키는 수군만호의 심정으로 산책할 만한 길이 펼쳐진다. 드문드문 성벽길이 복원되었다. 다음에 갈 때는 달이 바다에 비칠 때를 기다려 해월루에서 술잔을 기울여볼 생각이다. 해월루에서 첫 잔을 비운 뒤에는 남창리 이장님을 따라 달빛 막걸리 투어를 해볼 생각이다.
가막(가게 막걸리)을 시작으로 홍어카페를 거쳐 뜨끈한 국물이 있는 기사식당까지 두루 둘러보려 한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음식점이 즐비한 땅끝마을과는 또 다른 매력을 주는 공간이다. 이미 서울에서도 유명해진 해창막걸리 대신 지역 예술가들의 캘리그래피가 담긴 삼산막걸리를 들고 골목을 휘저어볼 생각이다.
해남에서는 숨을 시간이 필요하다. 하루, 안 되면 한나절이라도 완벽히 혼자만의 시간을 주어야 한다. 임하도, 오시아노, 시하바다, 목포구등대를 돌며 ‘여기가 나의 유배지다’ 싶은 곳에 내려주고 하염없이 방황하게 한 뒤 거두어볼까 한다. 청보리가 날 때의 냔냔이농원, 철새가 날아들 때의 고천암 갈대숲 그리고 매화가 피고 동백이 지는 시기의 보해매실농원도 다 좋을 것 같다. 해남에는 좋은 어른들이 있으니까.
기획 이인철 글 고재열(여행감독) 사진 고재열, 해남군청,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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