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게 없다’는 오명에 가려졌던 원주의 과거와 현재를 거닐다

경향신문

원주 성황림은 마을의 신성구역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길흉화복에 관한 기도를 올렸다. 신목에 둘러싸인 당집 앞 금줄엔 소원을 적은 한지를 내걸었다. 마을 사람들의 여러 추억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신성한 원시림 ‘성황림’

재앙 막고 병 쫓던 자리에

이젠 재물·건강 소원 모여

유일한 천연기념물 마을숲

매주 토요일 인원 제한 개방


지름 1.8m, 높이 35m 전나무에 두른 금줄에 1만원짜리 지폐 한 장이 절반으로 접혀 꽂혔다. “누가 몰래 들어와 놓고 갔나 봅니다.”


강원 원주시 신림면 성남리 성황림은 ‘신성구역’이다. 평소 울타리 문을 닫아 보호한다. 소원성취의 욕망은 낮은 높이의 보호책(保護柵)으로 막기 힘들어 보였다. 지난 14일 만난 성남2리 이장이자 숲해설가인 고계환씨가 말했다. “이곳의 기운을 받으려는 무속인이나 일반인들이 종종 들어옵니다.”


이 전나무는 신목(神木)이다. 면적 5만4414㎡의 성황림은 온대 활엽수림의 보고인데 이 신목만 상록수이자 침엽수다. 전나무와 또 다른 신목인 엄나무가 당집인 성황당(城隍堂)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놓였다.


성황림의 고갱이 같은 이 공간에서 마을 사람들은 재앙을 막고, 병을 쫓아내며, 길한 것들을 품으려는 기도를 올렸다. 인간의 바람을 하늘에 전하는 행위는 지금도 이어진다. 당집 앞으로 20여m 떨어진 곳에도 금줄을 둘렀다. 신목과 당집이 신성구역임을 알리는 표시다. 소원을 적은 한지 쪼가리를 새끼줄 매듭 사이 걸어뒀다. 방문객들에게도 기회를 준다. 요즘 사람들은 주로 큰돈을 벌고,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고 소원한다. 마을 제관들은 매년 음력 4월8일과 9월9일 두 차례 열리는 성황제 때나 금줄 교체 뒤 촛불로 종이를 불태우는 소지(燒紙) 올리기를 한다.


한국 마을숲 중 유일한 천연기념물(제93호)이다. ‘성황림’은 보통명사인데, 원주 성황림이 생태나 보전 측면에서 독보적이라 성황림은 원주의 그것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됐다. 어느 학자는 다른 마을의 성황림을 원주 성황림과 구별하려 ‘성황숲’이라 표기한다. 일대가 그렇다. 신림(神林)면은 ‘신성한 숲’이라는 뜻을 지녔다.


마을 사람들은 숲의 영험한 기운을 믿는 듯하다. 성황림엔 자체 발원하는 샘물이 흐른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고씨는 “봄이면 샘물 덕에 초본 식물이 꽃동산을 이룬다. 전염병이나 나쁜 기운을 막는 마을 지킴이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이 샘물을 약수라고 불렀다. 피부병과 위장병에 효험이 있다는 경험담이 전해진다.


성소(聖所)는 공포와 금기도 주입한다. 성황림 입구 쪽 나무를 벤 사람이 바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마을 사람들 사이 구전으로 내려온다. 한편 성황림은 어린이들에게는 놀이터이기도, 청년들에겐 로맨스 공간이기도 했다.


한국 마을숲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새마을운동 시기 많이 사라졌다. 원주 성황림은 새마을운동을 거치면서 당집이 훼손됐다. 그때 낸 찻길이 성황림을 동서로 갈랐다. 1990년대 초반 출입제한과 보호 지역이 된 뒤 진행된 식물의 천이가 뚜렷했다. 전형적 온대 활엽수림의 생태를 고스란히 보전하여 DMZ 외에 남한에 존재하는 유일한 원시림이라는 평을 받는 곳이다.


신의 존재를 느낄 순 없었으나 여느 숲과 다른 점은 분명했다. 길을 내고, 나뭇가지를 쳐내는 꾸밈이 없었다. 햇살이 수목 사이를 뚫고 들어와 은은하고도 넓게 성황림 일대를 물들이듯 번졌다. 숲 한쪽에서 고씨의 지도에 따라 정좌를 한 채 긴 들숨과 날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자신을 비워내는 행위가 여느 숲과 다를까 싶지만, 원시림과 신성한 장소라는 인식 때문인지 그 호흡 명상의 여운은 오래갔다.


고씨는 성황림 마을에서 태어났다. 목수의 아들인 그도 나무 전문가다. 그는 살아 있는 나무와 풀에 더 관심을 가졌다. <나무는 민중이다>(필명 고주환·글항아리)와 <나무는 청춘이다>를 냈다.


성황림 안내 도중 질경이를 밟고는 이렇게 말했다. “제일 좋아하는 단어가 민초예요. 시달림과 짓밟힘을 당하고도 살아가는 민초의 어원이 질경이 같은 풀에서 나온 거죠.”


그는 질경이가 ‘차전초(車前草)’로 불린 것이 수레바퀴나 말발굽, 신발 바닥에 묻혀 씨앗을 퍼뜨리려는 노력이라고 했다.


이 신성구역은 세속의 관광 이벤트와 결합했다. 토요일만 방문객(20명 이상, 문의는 033-763-7657)을 받는다. 참가자들이 마을에서 떡메로 취인절미를 만드는 체험도 진행한다. 성황제 때는 모두에게 개방한다. 올해 음력 9월9일은 10월25일이다.

경향신문

남한강변 법천·거돈·흥법사지 3대 폐사지 순례도 원주 여행의 백미다. 빈터의 보존은 무작정 허물고, 짓고, 올리는 세태를 돌이켜보게 한다. 사진은 거돈사지터다. 2단의 기단 위 삼층석탑(보물 제750호)을 세웠다. 기단 오른쪽 건너편 느티나무는 석축을 뚫고 자라났다.

천년 세월 품은 ‘폐사지’

남한강 따라 남은 절의 흔적

불교의 권세 품은 기억의 장

간현관광지 연계 순례 코스

앞으로는 또 어떤 모습 될까


“‘반야용선(般若龍船)’ 모양입니다.” 문화해설사 목익상씨가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지(사적 제466호) 지광국사현묘탑비(국보 제59호)의 몸돌(비신·碑身)의 이수(머릿돌)를 가리키며 말했다. 중생이 사바세계에서 피안인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간다는 상상의 배다.


성황림이 생전 현세의 길흉화복에 관한 기도라면, 반야용선은 사후 안락과 평온에 관한 기원과 축원이다. 목씨는 “불교 상징인 연꽃과 상여 형상도 들어 있다”고 말했다.


현묘탑비는 고려의 왕사인 지광국사 해린(984~1067)의 행적을 기린다. 이곳엔 원래 승탑인 현묘탑이 함께 놓였다. 고승의 사리를 둔 승탑은 행적을 기리는 탑비와 함께 선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반출된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전쟁 때 폭파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가 오염물 제거와 보전 처리 등 복원 작업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법천사지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문화재 당국은 현묘탑비 옆에 세울지, 절터 전시관에 둘지는 결정하지 않았다. 원주시는 현묘탑비 곁에 설치하길 바란다. 현장을 찾았을 땐 이미 터도 닦아뒀다.


법천사엔 고려 초 역학관계가 흐른다. 이 절은 당시 핵심 종파인 법상종 사찰이다. 해린은 원주 지역 호족 출신이었다. 문종의 외척인 이자연이 아들 소현을 해린에게 출가시켰다. 여러 학자는 해린이 중앙정부와 지방호족 세력 사이 중계자 역할을 했다고 분석한다. 왕족, 호족, 외척의 결합으로 본다. 해린은 왕사이자 국사였다. 이 현실 권력과 지위가 현묘탑과 현묘탑비를 고려 불교 미술의 정수로 만들었다. 직선거리로 5㎞가량 떨어진 폐사지인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의 귀부(龜趺·받침돌)에 새겨진 만(卍)자가 법천사지 현묘탑비의 귀부로 와선 ‘왕(王)’자로 바뀌었다. 이들 사찰은 왕권을 강화하고 조력하는 상징 기구였다.


원주시는 테마 여행 8선 중 하나로 거돈사지, 법천사지, 흥법사지 코스를 도는 ‘남한강 물줄기 따라 폐사지 순례’를 든다. 이 ‘강가의 절(江寺)’들이 조창인 흥원창과 연계돼 왕권과 결합된 불교의 권세를 드러냈다.


이 세 사찰은 신라 시대 지어져 양란(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불탔다. 홍금수 고려대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교수는 지난해 발표한 논문에서 조창인 흥원창과의 관계를 지정학으로 분석했다. 그는 “중원지역의 곳간으로서 고려 왕조를 지탱한 흥원창과 왕사 및 국사가 하산·입적하였던 남한강변 법천, 거돈, 흥법 3대 사찰은 수로교통에 근거한 실물경제 및 불교문화의 변천에서 원주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기억의 장’으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동전의 양면일까. 홍 교수는 흥원창을 기점으로 원주를 번성하게 만든 남한강 수로는 전쟁 때 약탈 경로로도 용이하게 쓰였다고 본다.


폐사지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목씨는 “폐사지의 매력은 원래의 공간을 상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건 역사나 불교 지식이다.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 사찰 양식까지 올라가야 한다. 불교와 사찰 건축을 제대로 이해하는 이라면 3D 이미지로 당시 사찰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그려낼지 모르겠다.


폐사지에서 이 또한 채우려는 욕망 같았다. 폐사지 하면 수식하는 ‘폐허의 미학’이나 ‘공(空)의 극치’ 같은 걸 굳이 느끼려 하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0여년 세월의 풍화가 녹아든 석축의 더께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 석축의 모서리를 따라 거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거돈사지 모서리 한쪽 은행나무는 그 강고한 축대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1000년의 세월이 거기서도 묻어난다. 이곳은 다시 1000년을 버틸 수 있을까.

경향신문

지금 원주시는 오래 번성하길 바란다. 간현관광지를 동력으로 삼는다. 2018년 설치한 높이 100m, 길이 200m 출렁다리(사진)가 속된 말로 ‘히트’를 쳤다.


퇴락하는 유원지로 취급받던 이곳이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원주시는 소금산과 간현봉 산자락을 끼고 흐르는 삼산천의 좌우를 잇는 이 출렁다리가 한국 산줄기의 기본원리인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뜻을 새겨볼 수 있는 곳이라고 선전한다.


간현관광지는 저 강가의 3대 폐사지 주변으로 흘렀던 남한강 지류인 섬강과 삼산천이 합쳐지는 지점에 들어섰다. 섬강과 삼산천, 소금산과 간현봉, 일대 마을을 제대로 보려면 레일바이크가 제격이다. 출렁다리의 부감 못지않다. 풍경열차를 타고 옛 간현역에서 판대역으로 간 뒤 레일바이크로 되돌아오는 일정이다. 7.8㎞ 산천과 논밭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


간현관광지 일대는 10월 현재 공사 중이다. 원주시는 출렁다리에 이어 소금산과 간현산을 잇는 보행현수교를 설치하려 한다. 산벼랑을 끼고 도는 잔도(棧道)도 건설 중이다. 기존 출렁다리와 지상을 오르내리는 케이블카 건설도 추진한다. 출렁다리 밑 절벽을 캔버스로 한 미디어 파사드도 시범 운영을 거쳐 내년 정식 개장한다. 원주시는 대략 200억~300억원 예산이 드는 이 ‘간현관광지 탐방로(숲길) 조성사업’을 두고 매해 200억원 이상 수익을 낼 것이라고 기대한다. “관광객이 제주보다 2배 많은 관광지로 만들겠다”고도 한다.


원주는 “볼 게 없다”는 오명을 쓴 곳이다. 지난 15~16일 시 초청으로 둘러본 이곳은 여러 경관과 이야기를 두루 갖췄다. 과거와 현재, 옛것과 새것, 원도심과 신도심이 어우러져 들어갔다. 이곳을 떠날 때 묘한 대비가 일어났다. 지자체의 관광지 개발 욕망이 성황림의 기원, 폐사지의 공허와 겹쳐졌다. 잔디가 드넓게 펼쳐진 폐사지 위로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신도심 유흥지가 떠올랐다.


원주 | 글·사진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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