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알파고 패배 정말 아팠다…은퇴 결심 이유”

[트렌드]by 경향신문

은퇴 선언 후 첫 언론 인터뷰

경향신문

‘쎈돌’ 이세돌 9단이 25일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의 한 음식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선명 기자 57km@kyunghyang.com

한국 바둑의 전설 이세돌 9단(사진)이 반상을 떠났다. 열두 살에 프로기사가 된 ‘비금도 소년’. 지난 24년간 14차례 국제대회에서 우승하며 세계 바둑계를 호령한 그다. 초대 응씨배 우승으로 한국 바둑을 중국·일본과 대등한 위치로 끌어올린 조훈현 기사나 그의 뒤를 이어 한국을 세계 바둑 최강국의 반열에 올린 이창호 기사도 이세돌만큼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그는 중국 구리 9단과의 10번기, 바둑 인공지능(AI) 알파고와의 세기의 대결 등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서른여섯. 10대가 판치는 바둑계에서는 적지 않은 나이다. 하지만 아직은 수읽기나 전투감각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여전히 그를 찾는 무대도 많다. 그러나 지난 19일 이세돌 9단은 한국기원에 프로기사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미 서너 해 전부터 심심찮게 은퇴설이 흘러나왔던 터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이 워낙 큰 까닭에 바둑계와 바둑팬들은 아쉬움에 지금도 술렁거리고 있다. 내년 총선 비례대표 출마설 등 온갖 억측도 난무한다.


지난 25일 이세돌 9단을 만나 은퇴 발표 후 심경과 앞으로의 계획을 직접 들었다. 그는 “AI가 인간을 추월할 수는 없을 것”이라면서도 “어마어마하게 실력이 늘어난 AI를 사람이 넘어서지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알파고에게 패배한 것이 정말 아팠고 은퇴를 결심하게 된 이유”라며 “바둑은 나의 전부였고 앞으로도 전부일 것”이라고 털어놨다. ‘이창호가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나’라는 물음에는 “절대 아니다. 좋은 선배이셨다”고 웃으며 답했다. 예전보다 야윈 듯 보였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또랑또랑하고 거침이 없었다. 이세돌 9단은 오는 12월 국내 AI ‘한돌’과 은퇴 고별 대국을 치른다.

“총선? 해외 진출? 말도 안돼…이젠 가족과 함께하겠다”

은퇴 선언 후 심경·계획


-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축하한다고 해야 하나, 그동안 수고했다고 해야 하나.


“축하받을 일은 아닌 것 같고, 그냥 오래전부터 생각해 오던 일을 행동에 옮긴 것뿐이다.”


-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프로무대를 떠나는 것인가.


“아니다. 지금은 구체적인 게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당분간은 아무 생각 없이 보낼 것이다. 그러다 보면 뭔 일이 생기지 않겠나. 원래 가만히 있는 체질은 아니다.”


- 아무 계획이 없다고 하지만 세상이 이세돌 국수를 그냥 내버려 둘 것 같지 않다. 바둑계에서는 벌써 ‘내년 총선에 비례대표로 출마할 것’이라는 설이 떠돈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 사람들이 왜 나를 부르겠나.”


- 지난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대권후보 경선 때 안희정 전 충남지사를 지지한다고 선언한 때문인 듯싶다.


“그것은 당시 안 후보의 정책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서 그런 것이지, 정치를 할 생각은 없다.”

경향신문

‘쎈돌’ 이세돌 9단이 25일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의 한 음식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선명 기자 57km@kyunghyang.com

- 이 국수의 은퇴를 보도한 일본 언론의 댓글에서 ‘이세돌 9단이 일본에서 활약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많다. 그럴 생각은 없나.


“하고 싶어도 못한다. 국적부터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2009년에 한국기원과 갈등을 겪으면서 휴직계를 냈을 때는 그런 생각도 해 봤다. 일본에서 1인자라면 1년에 10억원은 거뜬히 번다. 그래서 건너가 볼까도 생각해 봤는데, 이제는 아니다. 승부도 승부지만, 국적을 포기해 가면서 바둑을 두고 돈을 벌고 싶지는 않다.”


- 그러면 중국에서 하고 있는 바둑사업에 전념하게 되나.


“중국에서의 사업은 내가 일정 지분을 갖고 있을 뿐 직접 무슨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은퇴를 해서 찾는 사람도 없을 테니, 중국에 갈 일도 없을 듯하다.”


- 미국에서 이 국수와 알파고 간의 대국을 배경으로 드라마를 만든다는 얘기도 들리는데.


“얼마 전에 그런 얘기가 왔는데, 참여할 생각이 없다고 전했다.”


- 이제 은퇴를 했으니, 이 국수 이야기가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것도 괜찮지 않나.


“글쎄…. 지금으로서는 생각이 없다.”


- 많은 얘기들이 그저 떠도는 소문 같은데, 그럼 AI와의 ‘치수 고치기’ 대국은 진짜 이뤄지나.


“그것은 맞는 얘기다. 다음달 18·19일, 21일에 국내 AI ‘한돌’과 3번기를 치른다. 그냥 맞두면 질 것이 뻔하고, 두 점 접바둑으로 시작해 질 때마다 먼저 놓는 돌이 하나씩 늘어나는 방식이다. 그래서 마지막 판에는 내가 넉 점을 깔고 둘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이기면 ‘한돌’이 깔아야 한다.”


- 넉 점 접바둑은 바둑신과 목숨을 걸고 둔다는 치수 아닌가.


“그렇다. 하지만 지금 AI 수준이 그런 정도까지 왔다. 두 점으로는 내가 이기기 힘들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AI에게 덤 6집반(기존에는 7집반으로 보도됐지만, 이세돌 9단은 6집반이라고 했다)을 내주기 때문에 이기기가 더욱 힘들다. 그러나 넉 점까지는 아니라고 본다. 그냥 덤 없이 두 점 접바둑이라면 버틸 만하다고 생각한다.”


- 이 국수가 알파고와 대국을 하던 때와 비교해 지금의 AI는 어느 정도 실력이 늘었나.


“어마어마하게 늘었다. 프로들이 두세 점 까는 것이 당연히 여겨질 정도다. 이 때문에 프로들 대부분이 AI로 바둑공부를 한다.”


- 나중에 어느 수준까지 발전할 것 같은가.


“AI가 한없이 인간을 추월할 수는 없다고 본다. 프로기사들도 AI를 공부하면서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집중력이나 체력 등을 감안할 때 사람이 AI를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다.”


알파고 이긴 백78은 ‘꼼수’

지금 AI는 실력 더 크게 늘어

절대 넘을 수 없는 장벽 같아


- 이 국수가 공식대국에서 AI한테 1승을 거둔 유일한 기사로 남을 텐데,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화제를 모은 ‘백78수’는 어떤 수인가.


“한마디로 꼼수다. 원래는 안되는 수다. 하지만 꼼수에 대한 학습이 덜 된 알파고에 버그가 생겨 행운의 1승을 거둘 수 있었다. AI의 버그는 언제나 일어난다. 요즘 중국의 AI ‘절예’가 진 바둑을 봐도 버그로 의심되는 착점들이 더러 있다.”


내달 국내 AI ‘한돌’과 3번기

넉 점 접바둑까지 둘지 몰라


-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3연패로 패배가 확정될 때 기분은 어땠나.


“사실 5번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패배를 직감했다. 대국 전 구글 관계자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는데, 나는 이미 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결국 패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마음의 상처가 컸겠다.


“진짜 아팠다. 특히 딸 앞에서 당한 패배라서 더욱 아팠다. 당시 아내와 딸이 함께 지내며 대결을 했는데, 그래서 패배의 아픔이 더 컸다. 그 아픔이 은퇴를 결심하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경향신문

‘쎈돌’ 이세돌 9단이 25일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의 한 음식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선명 기자 57km@kyunghyang.com

- 한국기원과의 갈등이 은퇴의 원인 아닌가.


“아니다. 그런 점이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보다는 AI라는 절대 넘을 수 없는 장벽 앞에서 느끼는 허무와 좌절 같은 것이 보다 직접적인 이유다.”


위축되어 있는 ‘한국 바둑’

프로기사들도 목소리 내야


- ‘승부사’인 이 국수로서는 요즘 바둑과 관련해 별로 낙이 없겠다.


“맞다. 바둑 전체적으로도 출전 기회가 줄어들고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승부에서 밀리는 탓에 지난해부터 은퇴 결심을 굳혔는데, 그래도 뭔지 모를 미련이 있었다. 그래서 올해까지 버텨 보려 했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 이 국수는 그동안 홀로 한국기원과 싸우는 것처럼 비쳤는데, 동료들에게 서운한 점은 없나.


“왜 없겠나. 하지만 지금 얘기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현재 한국 바둑이 많이 위축돼 있는데, 그런 데에는 프로기사들의 잘못도 적지 않다고 본다.”


- 어떤 부분이 그러한가.


“한국기원의 업무는 한마디로 프로기사를 관리하는 일이다. 프로기사 때문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국내대회가 줄고 세계대회에서는 중국에 밀리고, 결국 한국기원 전체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셈인데, 그렇다면 프로기사들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경향신문

‘쎈돌’ 이세돌 9단이 25일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의 한 음식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선명 기자 57km@kyunghyang.com

이창호 국수는 ‘좋은 선배’

구리 9단엔 약간 미안해

커제는 말과 달리 귀여워


- 프로기사 생활을 돌이켜보면 가장 강력한 라이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나. 혹시 이창호….


“절대 아니다. 좋은 선배이셨지, 라이벌은 아니다. 그런데 요즘 이창호 국수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요즘 바둑계 돌아가는 사정을 전혀 듣지 못해 그런다. 이창호 국수보다 오히려 형수님 소식을 더 듣는다(웃음).”


- 세기적 대결인 10번기로 자웅을 겨룬 구리 9단은 어떤가.


“좋은 상대였지만, 라이벌은 아니다. 그보다 구리 9단에게는 좀 특별한 마음이 있다.”


- 어떤 마음인가.


“미안함 같은 것이다. 10번기에서 구리 9단이 지면서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대국은 구리 9단에게 매우 불리한 대국이었다.”


- 이상하다. 대국 대부분이 중국에서 치러졌는데, 왜 불리한가.


“바로 중국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구리 9단에게 불리했다. 그래서 나는 10번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내가 이기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바둑은 홈어드밴티지 같은 게 별로 없다. 오히려 홈에서는 더 불편하다. 특히 중국은 격식을 많이 차리는데, 당시에도 구리 9단은 이리저리 불려다니느라 피곤해했다. 게다가 구리 9단은 성격이 좋아서 모든 부름에 응대하느라 바둑에 집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반면 나는 손님으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바둑에 몰입할 수 있었다.”


- 10번기 이후 둘 사이가 불편하지는 않았나.


“그런 일은 없었다. 이후로도 잘 지냈고,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


- 그 때문인지 구리 9단이 이 국수의 은퇴를 많이 서운해한다. 반면 커제 9단은 좀 다르다. 커제 9단은 이 국수에 대한 도발적인 발언을 많이 하는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 만나면 조금 다른 면이 있다. 뭐랄까. 약간 귀여운 구석이 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나면 예의도 깍듯이 지킨다. 젊으니까 좀 튀려는 면이 있을 뿐이다.”


- 끝으로 한마디 한다면.


“바둑은 그동안 나의 전부였고, 앞으로도 전부일 것이다. 다만 이제는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일에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가족이니까.”


엄민용 기자 margeul@kyunghyang.com

2019.11.27원문링크 바로가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다, 말하다
채널명
경향신문
소개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다, 말하다
    이런 분야는 어때요?
    ESTaid footer image

    © ESTaid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