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었던 꿈 나이 일흔에 펼치는 황혼의 발레리노 연기, 설레요”

창작가무극 ‘나빌레라’ 진선규

“우연히 동명의 웹툰 봤는데, 감동…대본 읽기도 전 무조건 출연 결심

두 달 배운 발레, 멋진 솜씨보다 할아버지 마음 녹여낸 몸짓 고민”

“접었던 꿈 나이 일흔에 펼치는 황혼

배우 진선규는 창작가무극 <나빌레라> 에서 오랫동안 간직해 온 꿈인 발레에 도전하는 노인 ‘덕출’역을 맡아 무대에 오른다. 서울예술단 제공

배우 진선규(42)를 만나러 가는 길, 2017년 겨울 대학로 한 공연장의 기억이 떠올랐다. 막이 오르기 전 안내방송에서 뜻밖에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영화 <범죄도시>로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영화계의 스타로 떠오른 뒤다. “지금 무대 뒤 배우들이 많이 떨릴 겁니다. 저 역시 바로 이 무대에 섰을 때 그랬으니까요. 박수 많이 부탁드립니다.” 선함이 묻어나는 조곤조곤한 말투, 무대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가 ‘가슴 떨리는 무대’에 다시 선다.


지난 1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진선규를 만났다. 그는 내달 1일 개막하는 서울예술단의 신작 창작가무극 <나빌레라>에서 ‘덕출’ 역을 맡아 연습 중이다. ‘무대로 돌아왔다’는 말은 맞지 않다. “저는 무대에 계속 서 왔어요. <범죄도시> 이후에도 그랬고요. 극단(‘공연배달서비스 간다’)에 소속돼 있기 때문에 지방 공연에도 간간이 다녀왔어요. 그래도 새로운 창작작품으로 무대에 서는 것은 2년 만이네요.”


작품은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지난해 초 우연히 웹툰을 보고, 마음에 그려왔던 작품이라고 했다. “누가 웹툰 단행본을 빌려줘서 봤는데, 감동받았어요. 이게 만약 공연화된다면, 오디션이 필요하면 오디션을 보고, 뭐든 다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들어온 대본 제목이 <나빌레라>인 거예요. 대본을 읽기도 전에 제목만 듣고 무조건 하겠다고 했어요.”


그가 맡은 ‘덕출’은 일흔을 코앞에 두고 친구를 떠나보낸 뒤 마음속에 품어왔던 꿈을 꺼내놓는 인물이다. 발레리노의 꿈. 장성한 자녀들은 ‘망측하다’ ‘몸 상한다’며 만류하지만 그는 작은 발레단을 찾아 처음으로 ‘쫄쫄이’ 발레복을 입고, 처음으로 발레 바(bar)를 잡는다. 그곳에서 중국집 아르바이트와 발레를 병행하는 뾰족한 성격의 유망주 ‘채록’을 만난다. 몸은 안 따라주고, 주변 시선이 따가워도 진심으로 팔을 뻗는 그의 몸짓은 채록과 주변을 변화시킨다.


진선규가 지나온 삶은 언뜻 덕출보다 채록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고향인 경남 진해에서 고3 때 우연히 작은 극단에 들렀다가 연극에 빠졌다. “저는 가난했고 행복하지 않았는데, 거기서 따듯함을 느꼈다”고 했다. 방학 때 서울 고깃집에서 일하며 연기학원에 다니고, 결국 한국예술종합학교에 합격하며 연극의 길로 본격 접어들었다. 자신이 더 행복한 길을 찾아 친구인 민준호 연출과 공연배달서비스 간다를 꾸렸다. 꿈을 위해 고군분투한 삶이 채록과 닮지 않았느냐 물으니 “겉으로는 채록과 비슷해 보이지만 덕출의 마음으로 살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저는 되레 덕출과 같은 마음으로 해 왔어요. ‘내가 좋은 걸 하고 있는데 뭘 더 바라’ 이런 마음이오. 내가 하고 있는 것에 즐거우면 그 행복이 사실 전부일 수 있는데, 비교하면 한도 끝도 없이 아프니까요.”


그는 인터뷰 내내 덕출이 자신과 닮았다고 했다. <범죄도시> 속 악랄한 ‘위성락’이나 <극한직업>의 마형사가 자신의 새로운 면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역할인 듯했다. 연기를 할 때 배역의 사고를 깊숙이 따라 들어가는 그의 태도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람을 달라 보이게 하는 건 뭘까요. 결국 그가 생각하는 게 달라서 다르게 행동하는 거죠. 저는 그래서 배역이 가지고 있는 사고를 좇아가려고 노력해요. 그걸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배역의 좋고 싫음이 보이고, 그러면 그 ‘좋고 싫음’을 적극적으로 말할 거냐, 뒤에서 말할 거냐, 이것만 가지고도 사람이 엄청 달라 보이게 돼요.”


덕출 역을 위해 지난 3월부터 발레 수업을 받는 중이다. 데뷔 15년간 뮤지컬과 연극 무대에서 수준급의 춤과 노래를 선보였지만, 발레를 제대로 배우긴 처음이다. 어렵지 않을까. 그는 “지금 제 모습 그대로 하면 된다”고 말했다. 70대 덕출의 발레를 표현하자면, 발레리노에 가까운 모습보다 ‘가까워지려 하는 마음’이 보이는 몸짓이 필요하다. “제가 두 달 배운다고 어떻게 발레리노처럼 하겠어요. 배운 대로 동작을 하되, 그걸 아주 열심히, 행복하게 즐기는 것이 마음으로 느껴지면 성공이에요. 발레를 ‘멋지게 잘해보겠어’ 하는 게 아니라 잘해내려고 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녹여내면 웹툰을 봤을 때의 감동이 있지 않을까요.”


극은 결국 ‘접었던 꿈을 편 자’와 ‘꿈을 어떻게 펼쳐나가야 할지 헤매는 자’의 이야기로 읽힌다. 진선규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 역시 ‘꿈’에 대한 이야기다. 인터뷰를 마치며 바로 이 순간, 꿈을 놓을까 고민하는 어딘가의 누군가가 있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지 물었다. “만약 제 아이가 너무 아파서 다른 일을 해야 한다면, 내 꿈을 위해서만 일한다는 건 말이 안되겠죠. 꿈을 잠시 접는 것과 포기하는 것은 다른 것 같아요. 접어둬야 할 상황이라면 고이, 잘 접어뒀다가 언젠가 펼칠 수 있게만 해두라고 할 거 예요. 무조건 ‘힘만 내라’라고 하는 것은 가진 사람이나 ‘너니까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거야’라고 비칠 수 있을 것 같아요.” 덕출만큼 사려 깊은 대답이 돌아왔다.


공연은 5월1~12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열린다.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2019.04.24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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