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컬처 ]

‘엄격·근엄·진지’ 히어로는 가라
‘지질함’이 DC를 구원할지니

by경향신문

‘아쿠아맨’ 400만 돌파, DC영화 이전과 다른 흥행 비결


초기 DC가 영웅을 다루는 방식은

잘못 내려온 신을 대하는 듯했다

‘맨 오브 스틸’은 웅장한 스케일과

진중한 분위기 영화 전체를 지배

캐릭터의 인간미를 간과했다

아쿠아맨은 동네 형 같은 이미지

노골적인 개그 장면이 포함됐고

주무대였던 가상공간을 벗어나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사하라 등

현실 속 공간으로 옮겨왔다 

 

아쿠아맨이 수장 직전의 워너브러더스를 물 밖으로 건져내고 있다. 2019년 1월3일 기준, 국내 관객 400만명을 돌파한 영화 <아쿠아맨>의 성적은 DC 확장 유니버스(DC Extended Universe, 이하 DCEU) 역대 작품들 평균치의 2배에 달한다. 글로벌 흥행수익 역시 이전 DCEU 작품 중 최고인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의 기록을 무난히 깰 예정이며, 관객은 더 늘어날 것이다.

‘엄격·근엄·진지’ 히어로는 가라 ‘

영화 <아쿠아맨> 의 ‘아쿠아맨’ 아서 커리(제이슨 모모아·오른쪽)와 메라(앰버 허드). 둘은 DC영화에선 보기 힘들었던 유머 감각을 선보이며 험난한 여정을 헤쳐간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쏘우> <컨저링> 등으로 명성을 얻은 제임스 완의 연출에 대한 일말의 기대는 있었다. 하지만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승승장구하며 글로벌 영화 시장을 점령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이하 MCU)와 반대로, 나오는 족족 조롱거리가 될 뿐이었던 DCEU의 영화였기에 큰 반전을 기대한 이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독 <아쿠아맨>이 성공한 이유, <아쿠아맨>이 앞선 DCEU 작품과 다른 점은 도대체 무엇일까?

슈퍼히어로물, DC와 마블이 창조한 현대판 그리스신화

DC 코믹스(이하 DC)와 마블 코믹스(이하 마블)는 슈퍼히어로, 이른바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역사와 전통, 슈퍼맨과 배트맨이라는 최고의 인기 캐릭터를 앞세운 DC가 경쟁 우위에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이들은 북미 만화시장을 양분하는 선의의 경쟁자에 가까웠다. 두 회사가 만들고 보유한 수많은 캐릭터는 저마다 다른 스토리와 배경을 지녔지만, 한편으로 두 세계 간에 각기 비슷한 설정과 디자인을 공유하며 영향을 주고받기도 했다.


DC와 마블의 영웅 이야기는 그것이 공통으로 현대판 신화에 견줄 수 있다는 점에서 힘을 발휘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고대 그리스신화 속 신과 영웅들의 행동과 성격은 평범한 인간과 비슷하다. 그들은 사람처럼 울고 웃으며, 때로는 멍청하고 그릇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오늘날 DC와 마블의 히어로물이 인기를 끄는 것은 수많은 신화 중에서 그리스신화 모델이 유독 문화적으로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었던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히어로물 캐릭터들은 영웅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간이었고 우리 주변의 이웃이었다. 슈퍼맨은 인간의 힘을 초월한 외계인이었지만 동시에 밝고 성실한 성격의 기자 클락 켄트였고, 배트맨은 정의의 수호자 이면에 어두운 내면을 지닌 외톨이 브루스 웨인의 모습이 늘 따라다녔다. 스파이더맨은 그 모토가 대놓고 ‘친절한 이웃’이었으며, 울버린은 알코올 중독에 폭력적 성향까지 갖춘 중년 아저씨였다. 초인적인 능력이나 남다른 출신과 다르게 행동과 성격은 어딘가 부족하고 평범한 인간과 다름없는 영웅들의 스토리는 우리 주변 가족, 친구들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한 캐릭터성과 이야기를 낳으며 공감대를 형성했다.

숭고한 정사(正史) 속 DC 히어로

아이언맨은 사실 영화의 성공 이전까지 마블의 간판 캐릭터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마블은 <아이언맨>(2008)을 MCU 세계관 구축의 1번 타자로 내세웠고 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아이언맨 캐릭터의 성공은 어느 정도 예견이 된 것이기는 했다. 평범한 신체 능력, 첨단의 과학기술이 집약된 슈트, 거대 기업을 소유한 재벌, 용의주도한 지략가, 성격파탄자. 아이언맨 캐릭터의 인간적인 면모를 십분 살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연기와 이를 사실주의적으로 잘 살린 연출이 만나면서 <아이언맨>은 작금의 MCU를 있게 한 일등 공신이 되었다.


DCEU의 방향성은 조금 달랐다. <맨 오브 스틸>(2013)은 DCEU가 MCU와 차별성을 갖기 위한 갖은 노력 끝에 탄생한 작품이었다. 웅장한 스케일과 화려한 액션 연출, <다크 나이트>(2008)와 비교될 만큼 무겁고 진중한 분위기가 영화를 지배했다. 그러나 여기서 DCEU는 캐릭터의 인간미를 간과했다. <맨 오브 스틸>의 슈퍼맨에게는 지구에서 자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과 수준을 달리하는 자기 능력 사용에 대해 고뇌하는 외계인일 따름이다. 주변에는 지구인 부모와 로이스 레인 등 선한 조력자들뿐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슈퍼맨을 보호하려 하며 그에게 뻔하고 선한 의무감을 지운다.


초기 DCEU가 영웅을 바라보고 다루는 방식은 이처럼 인간 세계에 잘못 내려온 신을 대하는 듯하다. 그러다 보니 DCEU의 히어로들은 하나같이 역사책 속 한두 줄로 언급될 법한 평면적인 인물이 되었다. 거대한 사건이나 구구절절한 사연은 있지만, 그 속에서 히어로들은 현실적이고 인간적이기보다 뻔하고 교과서적인 행동을 취했다. 각 히어로들의 솔로 무비 이전에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와 같은 올스타 무비가 먼저 제작된 점이나, 단 한 편의 영화 속에 너무 많은 내러티브와 감정선이 포함된 점도 원인이다. 바꿔 말하면 충분히 고려하고 표현할 수 있었던 캐릭터들의 인간적인 매력이, 과도한 내러티브를 소화하기 위한 욕심이나 의도적인 차별화 전략 탓에 마치 정사처럼 굵은 뼈대만 남기고 모조리 생략된 것이다.

유쾌한 야사(野史) 속 마블 히어로, 그리고 아쿠아맨

반면에 마블 히어로는 <어벤져스> 시리즈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 같은 거대하고 복잡한 서사 이전에 차근차근 히어로 개인의 이야기들을 먼저 쌓아갔다. 히어로들의 인간적인 면모나 매력도 강조했다. 아이언맨은 허세와 상처에 찌든 기업가다. 토르는 북유럽신화의 신임에도 불구하고 과도하게 유쾌하고 다혈질적인 인물로 그려지며, 그 때문에 지능이 모자란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탄생한 전통적인 영웅으로서 미국의 이상주의적인 가치를 상징하는 캡틴 아메리카조차 지나치게 선한 성격, 과거의 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개그 캐릭터로 활용될 정도다. 자연스레 영웅과 평범한 인간 사이의 거리감이 줄어든다.


마블의 성공으로부터 얻은 교훈 덕분일까. 2017년 <원더우먼>과 <저스티스 리그>를 거치며 DCEU는 변화 조짐을 보였다. 새로 등장한 히어로인 원더우먼, 아쿠아맨, 플래시 등이 모두 이전의 슈퍼맨이나 배트맨과 달리 좀 더 입체적인 매력과 인간적인 개성을 갖추게 된 것. 인류 문명으로부터 격리된 데미스카라에서 태어나고 자라 인간사회에 순수한 호기심을 보이면서도 숭고한 가치와 목적에 아낌없이 몸을 내던지는 원더우먼은 마블의 캡틴 아메리카를, 전략적인 분석이나 판단보다는 몸이 앞서는 아쿠아맨은 토르를 연상시켰다.


이번 <아쿠아맨> 솔로 무비를 통해 ‘저스티스 리그’에서의 아쿠아맨에 대한 인상은 확신이 되었다. 장발과 수염에 거구 이미지, 현생 인류와 다른 종족으로서 신과 다름없는 능력, 왕위를 계승해야 할 왕자로서의 사명. 이와 같은 기본적인 설정의 공통점은 다 제외하더라도 결정적으로 동네 푸근한 형 같은 친숙한 이미지가 진했다. DCEU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노골적인 개그 장면도 다수 포함됐다.

 

‘엄격·근엄·진지’ 히어로는 가라 ‘

정병욱

<아쿠아맨>의 거리 좁히기는 다른 측면에서도 관찰됐다. 그동안 마블과 달리 DC는 주로 현실과 상관없는 가상의 공간을 스토리 주무대로 삼았다. 슈퍼맨이 사는 메트로시티, 배트맨이 지키는 고담 시티가 바로 그것이다. 원작의 설정은 당연히 DCEU 영화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하지만 <아쿠아맨>에는, 마블의 스파이더맨이 마천루를 넘어 다니는 뉴욕이나 블랙팬서가 도로 위를 질주한 부산처럼 이탈리아 시칠리아섬과 서사하라 등 현실 속 구체적인 지명과 공간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DCEU의 영웅담은 그저 멀리 전설로만 전해지는 신화가 아닌 일상 근저에 존재하는 민담으로써 우리 틈 사이로 침투한다.


DCEU가 완전히 마블 따라잡기에 나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거대한 스케일의 전투 장면들과 슬로모션을 자주 활용하는 특유의 액션 연출, 현실적인 멋을 가미하기보다 코믹스 고증에 더 초점을 맞춘 화려하고 복고적인 코스튬 등 세계관 고유의 특징들이 여전하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다소 전형적인 스토리 라인과 유치한 대사, 주인공 아쿠아맨이나 메라에 비해 지나치게 평면적인 조연 캐릭터들 등 단점 역시 그대로다.


<아쿠아맨>이 죽어가는 DCEU에 호흡기를 달아주었음은 분명하지만 DCEU가 MCU의 성공 모델마저 모사할 수 있을지는 아직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정병욱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