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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극작가 천세은씨

“딸에게 누구의 부인 아닌, 인간 ‘마리 퀴리’ 알려주고 싶어 무대 올렸죠”

by경향신문

미화된 자료로 그려진 위인 벗어나

여성 과학자로서 삶 살펴볼 작품

라듐은 힘·위험성 지닌 양날의 검

관객에 선·악 적정선 묻고 싶었죠

경향신문

창작 뮤지컬 <마리 퀴리>는 단순히 여성 주인공을 내세우는 데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여성중심 서사를 펼친다. 지난달 26일 서울 충무아트센터에서 만난 천세은 작가는 “미화된 자료로 그려진 위인이 아닌 한 인간의 삶을 들여다봤다”고 말했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딸에게 읽어주려던 위인전의 ‘퀴리 부인’이라는 제목에 눈이 머물더라고요. 하나뿐인 딸인데 누군가의 부인으로 키우는 건가? 딸에게 ‘마리 퀴리’를 소개해주고 싶어 작품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의 삶에 초점을 맞춘 창작 뮤지컬 <마리 퀴리>가 2년 만에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마리 퀴리>는 방사성 물질 라듐의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지만 그 유해성을 알고난 뒤 고뇌하는 마리, 동료이자 남편인 피에르, 은폐된 산업재해를 파헤치는 라듐공장 여성 노동자 안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단순히 여성 주인공을 내세우는 데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여성중심 서사를 펼쳐 입소문을 타고 있다. 지난달 26일 서울 충무아트센터에서 만난 <마리 퀴리> 극작가 천세은씨(40)는 “처음부터 여성 서사를 의도하진 않았지만 쓰다보니 자연스럽게 여성들의 이야기가 됐다”며 “미화된 자료로 그려진 위인이 아닌 한 인간의 삶을 들여다봤다”고 말했다.


실화에 상상력을 더한 <마리 퀴리>는 여러모로 이색적이다. 여성 과학자이자 폴란드 출신 이민자라는 ‘마이너리티’ 마리가 남성 엘리트집단에서 주체적 여성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아냈다. 초연에서 100분이었던 공연 시간을 재연에선 150분(인터미션 15분)으로 늘리면서 이야기 축도 바뀌었다. 남편 피에르 대신 안느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초연 때와 달리 극 초반부 마리와 안느가 프랑스행 기차 안에서 처음 만나면서 두 사람 이야기로 전개된다.


“마리 퀴리 자료를 찾아보니 라듐의 위해성에 대해 고민하거나 발언한 내용은 없었어요. 이야기를 통해 피해를 입은 사람과 만나게 하면 어떨까 생각했죠. 실제 1920년대 미국에서 ‘라듐 걸스’(라듐 제품 공장에서 피폭당한 여성 노동자들)가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어요. 김태형 연출이 여성 연대로 이야기를 이끌어내자고 제안하면서 두 여성이 중심에 서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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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마리 퀴리>의 한 장면. 라이브(주) 제공

극에서 마리는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저버리고 남성 과학자그룹에 끼어들려 한다고 공격당한다. 노벨상을 남편과 공동 수상하면서도 들러리가 될 뿐이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연구에 매진해 불치병 환자를 살리고, 안느 역시 직공들의 알 수 없는 죽음을 치열하게 파헤친다. 때로는 마리가 안느와 얘기를 나누려는데 눈치없이 서 있는 피에르에게 빵을 썰어 오라며 내보내거나, 여자 직공이 까부는 남자 동료에게 ‘나대지 말라’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자신의 이야기로 공감하는 관객들을 웃기고 울린다.


“아이를 보면서 글쓰기가 어렵잖아요. 유치원 친구 엄마들이 데려가서 재워주기도 하고,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도움도 많이 받았죠. 밤을 새거나 새벽기도 다녀와서 남편이랑 아이가 깰 때까지 작업하고, 정말 되는 대로 썼어요. 그러다 한 공모전에서 떨어졌을 때는 장염까지 겹쳐 포기하려고 했죠. 대사 중 ‘다음 기회에 다시 해라’는 실제 들었던 말이에요. 근데 딸이 ‘왜 요즘은 글 안 써?’ 묻더라고요. ‘글을 안 쓰면 엄마 같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용기를 얻었죠.” 공연에는 숨은 조력자였던 이웃 엄마들도 초청했다. “‘그때 나가서 쓴 게 이거야’ ‘유빈 엄마 애썼어’ 막 끌어안고 울고, 단체로 훌쩍거렸죠.”


<마리 퀴리>는 독특한 소재답게 주기율표와 라듐·폴로늄의 원소기호를 무대 배경에 조명으로 띄우고, 실험 도구를 비롯해 당대 인기를 구가했던 라듐 제품들이 등장한다. 실험실 칠판의 맥스웰 방정식은 카이스트를 졸업한 김태형 연출이 찾아왔다고 한다. 중독적인 ‘라듐 찬가’도 귀를 사로잡는다. “기적 같은 그 은혜 라듐/ 약한 건 강하게 하시고 죽은 건 벌떡 일으켜/ 빛나는 이름 그건 너 라듐~.” 어쩌다 라듐이 가사가 됐을까. “사이비 종교처럼 신이 주신 선물을 찬양하는 느낌을 만들고 싶었어요. 라듐이라는 게 힘과 위험성을 동시에 지닌 ‘양날의 검’이잖아요. 선과 악의 적정선을 나눌 수 있을지, 판단이 모호한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마리 퀴리를 통해 묻고 싶었죠.”


천씨는 MBC <뽀뽀뽀> 등의 방송작가로 일을 시작해 어린이극을 써왔다. 2017년 <마리 퀴리>의 창작 뮤지컬 공모 선정까지 10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현재도 동물병원에서 일하며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아직도 무대 위 대사와 가사들이 제가 쓴 거 같지 않아요. ‘나는 열심히 사는데 왜 나아지지 않지’ ‘언제까지 힘을 내야 하지’ 그런 생각이 드시는 분들이 보고 위로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서울 충무아트센터. 3월29일까지.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마스크 착용 필수.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