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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평범이 무기”라는 장도연…아니다, 그는 ‘뉴타입 코미디언’이다

by경향신문

“누구도 상처 주지 않는 개그”

못생긴 여자와 예쁜 여자만 존재하는 코미디판

그의 무기는 ‘슈퍼 노멀’이다

편견·혐오가 세팅된 무대서도 일상적 연기로 빛났다

코미디 문법 밖에서 빚은 ‘통쾌’와 ‘공감’

“평범한 내 모습 그대로 방송하는 것이 행복해요”

경향신문

스스로를 “색깔 없는” “슈퍼 노멀” 코미디언이라 부르는 장도연은 ‘평범’을 무기로 전쟁터 같은 예능계를 헤치고 나아간다. 올리브 <밥블레스유2> 제공

“이런 고용불안에도 다시 한 번 이 프로그램에 합류하게 돼 제작진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4일 온라인으로 생중계된 올리브 <밥블레스유2> 제작발표회에서 코미디언 장도연(35)이 말했다. “요즘 시즌제가 많은데 늘 다음 시즌을 예고하고 영원히 이별하는 경우가 있다”며 덧붙인 말이었다. KBS <거리의 만찬>이 갑작스러운 시즌1 종료와 함께 여성 진행자들을 하차시킨 것이 한 달 전이었다. ‘고용불안’이란 단어를 두고 “요즘 있어 보이는 단어 위주로 ‘초이스’하고 있다”고 너스레를 떨던 장도연의 웃음 뒤에는, 그가 발 디딘 전쟁 같은 현실이 있다.


박미선의 말처럼 예능계가 전쟁터라면, 장도연이 든 무기는 ‘평범’이었다. 장도연은 스스로를 ‘천생 연예인’과는 거리가 먼 “색깔 없는” “슈퍼 노멀” 코미디언이라 소개한다. 그런 그가 마침내 예능계 ‘대세’가 됐다. 최근 한 온라인 사이트에서 ‘숨만 쉬어도 웃긴 개그맨’ 1위로 꼽혔던 그는, 기업평판연구소가 집계한 3월 예능인 브랜드 평판에서 유재석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나래바’의 박나래, ‘가모장숙’의 김숙처럼 특출난 캐릭터도 이렇다 할 유행어도 없이, 그는 ‘고용불안’ 같은 현실의 문제를 껴안고 사는 평범한 여자의 정체성으로 여기까지 왔다.


장도연의 목표는 “누구도 상처 주지 않는 개그”를 하는 것이다. 누구나 멸시하는 ‘못생긴 여자’와 모두가 숭배하는 ‘예쁜 여자’만 존재하던 코미디 판에서, 평범한 여자도 숨만 쉬어도 웃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그의 저력은 이 참신한 목표의식에 기반한 것이 아닐까. 전에 없이 평범한, 그래서 ‘뉴타입 코미디언’인 장도연의 13년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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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연은 여자를 ‘못생긴’과 ‘예쁜’으로 구분하는 코미디 문법 밖에서, 평범한 여자들이 일상적으로 겪거나 생각했던 경험과 말을 코미디 무대 위로 올린다. 올리브 <밥블레스유2> 제공.

난 KBS가 인정한 개그우먼이다!

“개그우먼은 어떻게 생겨야 되죠? 눈이 여기(턱에) 붙어야 되나요?”


2015년 JTBC <비정상회담>에 출연한 장도연은 “개그우먼같이 안 생겼다”는 한 패널의 말에 이렇게 되물었다. 편견에 기대 장도연의 외모를 칭찬하려던 패널의 시도를 순식간에 ‘구시대적’으로 만드는 재치가 빛난 발언이었다. 동시에 여성을 끊임없이 외모로 평가하고 분류하는 예능계에서, 장도연이 ‘평범한 여자’로 거듭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을지 가늠케 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데뷔 전 그는 “남의 눈치도 되게 많이 보고 성격도 맹숭맹숭한” “항상 주눅 들어 있는” 사람이었지만, 남을 웃기는 재능이 있었다. “고수익 알바나 해보자”란 생각으로 비연예인 대상 토크 경연 프로그램에 참가했다가, 진행자 신동엽의 권유로 2007년 KBS 공채 개그맨 시험에 응시해 단번에 합격했다. KBS <개그콘서트>로 데뷔했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코너 ‘키컸으면’에선 키 작은 남성 개그맨들과 대비되는 장신을 내세워 눈길을 끌었다. 농구선수 야오밍이나 우지원처럼 키 큰 남자 흉내도 냈다. 다만 장도연이란 이름 석 자 대신 ‘키 큰 여자’ 혹은 ‘미녀 개그우먼’ 딱지가 앞섰다. 무명의 시간이 이어졌다.


기류가 바뀐 것은 2011년 박나래, 허안나와 함께한 ‘패션 No.5’부터였다. 당시 <개그콘서트>에서 유일하게 여성 코미디언들만 출연한 코너였다. 괴이한 복장으로 모델처럼 워킹하며 도도하게 “스타일~”을 외치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는 이들이 늘어갔다. 이듬해 온스타일은 패션 경연 프로그램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4> 번외편에 이들을 섭외해 ‘패션 No.5’의 콘셉트를 그대로 활용했다. ‘진짜’ 패션계 인사들 앞에서 예의 기괴한 패션으로 런웨이를 걷던 장도연은 마침내 이렇게 외쳤다. “온스타일 것들아, 난 KBS가 인정한 개그우먼이다!”


패션계의 허세를 꼬집기 위해 꾸며낸 자신감이었지만, 그의 외침은 어쩐지 울림을 줬다. 별다른 히트작 없는, ‘인기 연예인’이라기엔 아직 모자란 4년차 코미디언 장도연이 큰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말할 때 웃음과 짜릿함이 함께 왔다. 비하나 숭배 대상이 아니라, 웃음을 주는 어엿한 주체로서 세상에 서고 싶다는 목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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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연은 2016년 한 강연에서 “남 신경쓰지 말고 자신만의 보폭으로 걷는” 삶의 태도를 강조하며 “평범한 내 모습 그대로 오롯이 방송하고 있어서 굉장히 행복하다”고 말해 화제를 모았다. 올리브 <밥블레스유2> 제공

장도팔, 철벽녀, 그리고 장도연

장도연은 ‘예능인’ 이전에 ‘코미디언’이었다. 관객과 호흡하며 웃음을 이끌어내는 ‘공개 코미디’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 장도연의 이력은 tvN <코미디빅리그>로 무대를 옮긴 이후 상승세를 탔다. 2014년 ‘썸&쌈’을 시작으로 2015년 ‘여자사람친구’, 2016년 ‘Love is 뭔들’ ‘그린나이트’ 등 연달아 히트작을 냈다.


짧은 시간 내에 관객을 웃겨야 하는 공개 코미디는 그 특성 때문인지 오래된 통념에 쉽게 기대곤 한다. 외모 비하, 여성·성소수자 혐오, 폭력 등 ‘옛날에 다들 웃기다고 했던’ 요소들이 반성없이 재현되기 일쑤다. 장도연 역시 편견과 혐오가 이미 ‘세팅’된 무대에 올라야 했다. ‘키컸으면’에서 ‘키 큰 여자’였던 것처럼, ‘썸&쌈’에선 ‘미녀 개그우먼’을 연기했다. 그런데 ‘장도팔’은 달랐다.


양세찬과 함께 호흡을 맞춘 코너 ‘여자사람친구’에서 장도연은 장도팔이라 불리는 트랜스젠더 여성을 연기했다. 장도팔은 군대 동기였던 양세찬을 짝사랑한다는 이유로 온갖 멸시와 혐오를 당한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전형적인 ‘세팅’ 위에서 펼친 장도연의 일상적인 연기다. 그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목소리와 얼굴로 ‘평범한 트랜스젠더’를 구현했다. 태연한 얼굴로 “여자가 남자 좋아하는 게 그렇게 잘못된 거냐”고 물었다. 앞서 수많은 코미디 프로그램들이 ‘옛날부터 그랬다’는 이유로 반복한, ‘과장된 여성성’으로 왜곡된 트랜스젠더는 없었다.


2016년 ‘그린나이트’는 “장도연 ‘철벽’ 보려고 보는 코너”로 회자됐다. 어떻게든 여자를 ‘낚으려는’ 남자들로 가득 찬 가상의 공간 ‘그린나이트’에서 장도연은 시덥잖은, 때로는 불쾌한 추근거림에 칼같이 거절하는 ‘홍대 철벽녀’를 연기했다. 초면에 “사랑해도 될까요”라고 묻는 남자에게 “사양할게요” 답하고, “고백해도 될까요”란 물음에 “고소할게요”라 답하는 여자. 이 철벽녀에 쏟아진 반응은 ‘통쾌’와 ‘공감’이 섞인 웃음이었다. 여자를 ‘못생긴’과 ‘예쁜’으로 구분하는 코미디 문법 밖에서, 평범한 여자들이 일상적으로 겪거나 생각했던 경험과 말들이 TV 코미디로 재현된 데 대한 반가움이 가세했다. 장신과 미녀의 굴레를 벗고, ‘평범한 장도연’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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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연은 지난해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베스트 엔터테이너상을 받으며 “(연단까지) 다섯 계단인데, 여기 올라오는 데 13년이 걸렸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MBC 화면 캡처

슈퍼 노멀이 시대를 읽는 법

“늘 반성이 많아요. 이 얘기를 해서 몇명은 웃었을지 모르지만 누구 한 명은 좀 기분 나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해서. 그래서 요즘 책도 많이 읽으려고 해요. 제가 모르지만 알아야 될 게 너무 많더라고요”(SBS <이동욱은 토크가 하고 싶어서>). 장도연은 시대를 읽으며 성찰을 이어간다. 자신을 ‘슈퍼 노멀’이라 칭하며 “평범한 내 모습 그대로 방송하는 것이 행복”하다 말했던 그의 진짜 강점은, 지금까지 대표되지 못했던 평범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끊임없이 귀 기울인다는 점이다.


눈 밝은 누리꾼들은 최근 방송한 MBC <나 혼자 산다>에서 장도연의 노력을 발견했다. 그의 거실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과 함께 여러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그중 일하는 여성들을 위한 책 <출근길의 주문>(저자 이다혜)과 레즈비언의 사랑에 관한 영화 <윤희에게>(감독 임대형) 시나리오가 눈에 띄었다. “말의 영향력에 대해 고민한다”는 그는 억압을 뚫고 막 솟구치기 시작한 말들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방송 3사 연예대상에서 상 받는 게 지금이 처음이에요. (연단까지) 다섯 계단인데, 여기 올라오는 데 13년이 걸린 거예요.” 지난해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베스트 엔터테이너상을 수상한 장도연은 울먹이며 말했다. 수상의 공을 “본받을 점 많은 동료들과 멋진 선배님들”에게 돌리면서도, “장도연 너 멋있다”는 자기 긍정을 잊지 않았다.


평범해서 멋있는 장도연이 무대의 주인공이 되기까지 13년. 더 이상 “네가 방송 잘해서 같이하고 싶어”란 말을 듣고 눈물을 쏟는 일(올리브 <밥블레스유>)은 없길 바란다. 장도연이 ‘잘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니까.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