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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살림 밑천에서 가부장제 고발자로···‘K-장녀’, 서사를 입다

by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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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딸은 살림 밑천’이란 옛말처럼 부모의 조력자로 희생하는 여성의 상징이던 장녀는, 이제 그 존재만으로 가부장제의 모순을 드러내는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로 각광받고 있다. 넷플릭스·SBS·인디스토리 제공

“크레이지 아시안 걸 중에서 제일 크레이지는 장녀야. 기억해.”(트위터 이용자@fries_vonyeosu)


온라인상에서 흔히 쓰이고 있는 신조어 ‘K-장녀’. 이 유행어는 코리아(Korea)의 앞글자 ‘K’와 맏딸을 뜻하는 ‘장녀’의 합성어다. 주로 ‘지옥의 가부장제’를 견디며 살아온 여성들이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지칭할 때 쓰인다. 쓸데없는 책임감, 심각한 겸손함, 습관화된 양보 등 “나 K-장녀야” 한 마디면 화자의 성격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상징적 수식어이기도 하다.


최근 이 K-장녀를 둘러싼 대중문화 콘텐츠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맏딸은 살림 밑천’이란 옛말처럼 부모의 조력자로 희생하는 여성의 상징이던 장녀는, 이제 그 존재만으로 가부장제의 모순을 드러내는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로 각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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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 의 중전 계비 조씨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평생 차별받다 아버지 조학주의 권력 수단으로 이용되는 인물이다. 넷플릭스 제공

“그 하찮았던 계집아이가 이제 모든 것을 가질 것입니다.” 최근 가장 주목받은 K-장녀 캐릭터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의 중전 계비 조씨(김혜준)다. 중전 조씨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평생 차별받다가 아버지 조학주(류승룡)의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인물이다. 아들을 낳아야 존재 의미를 얻는 캐릭터의 의미를 함축하듯 극 중 이름을 아는 사람도 없다.


수동적 인물로 보이던 조씨는 숨겨둔 야욕을 드러내며 왕실에 파국을 몰고 온다. 미움을 살 수 있는 악역이지만, 시즌2 공개 이후 오히려 큰 공감을 받았다. 특히 여성 시청자들로부터 “‘K-장녀’의 한을 표현했다”는 평이 나왔다. 조씨를 연기한 배우 김혜준은 언론 인터뷰에서 “그동안 이(유교 사상)에 반하는 욕망을 분출하는 캐릭터가 없었던 것 같다”며 “차별받고 억압받으면서도 야망을 가지고 폭발시키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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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금토드라마 <하이에나> 에 등장하는 하혜원은 이슘 그룹 장녀이지만, 능력보다 장자계승을 원하는 아버지로 인해 기업 후계자 자리에서 매번 밀려난다. SBS 제공

<킹덤>의 조씨와 같이 권력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 K-장녀는 TV드라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SBS 금토드라마 <하이에나>에 등장하는 하혜원(김영아)이다. 이슘 그룹 장녀인 그는 워커홀릭으로 불리며 능력을 인정받은 재벌 3세지만, 능력보다 장자계승을 원하는 아버지로 인해 기업 후계자 자리에서 매번 밀려난다. 남자 형제들이 끊임없이 사고를 쳐대도 아버지 하 회장은 “네가 대표 될 일은 없을 것”이라며 선을 긋는다. 그런 아버지에게 하혜원은 “어디 능력도 쥐뿔 없는 걸 남자새끼라고 끼고돌기는”이라고 말하며 분노한다.


지난 1월 유튜브 채널 ‘문명특급’ 진행자 재재가 공개한 곡 ‘유교걸’이 화제가 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가수 이효리의 히트곡 ‘유 고 걸(U-Go-Girl)’을 패러디한 이 곡은 장녀가 가사 속 화자로 등장한다. ‘제가 장녀인데, 재산 상속은 남동생한테 간다고요? 안 돼!’라는 피쳐링이 보여주듯 유교 문화·가부장제 아래 차별받는 딸들의 심정을 잘 담아냈다는 평이다. 조회수 90만회를 기록한 유튜브 영상 댓글창에는 ‘내가 대한장녀인지 대환장녀인지 구분이 안된다’ ‘한 맺힌 장녀중에 장녀는 경상도 장녀’ 등의 댓글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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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채널 ‘문명특급’ 진행자 재재가 공개한 곡 ‘유교걸’에는 “제가 장녀인데, 재산 상속은 남동생한테 간다고요? 안 돼!”라는 피쳐링이 등장한다. 유튜브 캡쳐

K-장녀 서사는 스크린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지난달 25일 개봉한 영화 <이장>(감독 정승오)을 통해서다. 앞선 작품들이 대한민국 장녀의 한풀이·대리만족에 기여하는 ‘판타지물’이라면, 이 영화는 대한민국 딸들의 한이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보여주는 ‘페이크 다큐멘터리(허구의 상황을 실제 현실처럼 촬영한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5남매 장녀 혜영(장리우)은 연락두절 된 막내 남동생 승락(곽민규)을 뺀 채 세 여동생과 아버지 묘 이장을 위해 큰 아버지댁을 찾는다. 하지만 “어디 장남도 없이 무덤을 파냐”는 불호령에 발길을 돌려 남동생을 찾아나선다. 막내이자 장남인 승락에게 평생 양보하는 삶을 살아온 누나들의 “장남 타령 좀 그만해라” “고추가 무슨 벼슬이냐” 등 한마디 한마디가 가부장제 피해자의 산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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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5일 개봉한 영화 <이장> (감독 정승오)은 대한민국 딸들의 한이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보여주는 ‘페이크 다큐멘터리(허구의 상황을 실제 현실처럼 촬영한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인디스토리 제공

정승오 감독은 언론시사회에서 이장이라는 소재에 대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던 장면에서 비롯됐다”며 “집안의 중요한 의식들은 남자들 차지였다. 여자들은 여자란 이유로 배제됐다. 가족 내 차별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가족 내 성 역할을 구분 짓고 차별을 발생시키는 근간은 여전히 뿌리 깊은 가부장제라고 봤다”고 했다.


가부장제의 민낯을 드러냄과 동시에 권력욕을 숨기지 않는 신(新) 장녀 캐릭터의 등장에 시청자들은 열광한다. 시청자 김모씨(29)는 “특히 여성 캐릭터가 자기가 받은 차별을 조목조목 말할 때 속이 시원하다”며 “장녀 캐릭터는 주말 가족 드라마에나 비중있게 나오는 줄 알았는데, 요즘은 여기저기서 눈에 띄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시청자 전모씨(34)는 “3남매 중 장녀로 살면서 ‘니가 좀 참아’란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다”며 “요즘 드라마 속 장녀들은 자신의 욕심이나 야망을 숨기지 않아 더 좋다”고 했다.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