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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병풍 같은 병산, 불길 막아 서원을 지켰구나…불사의 역사를 더했네

by경향신문

병산서원~하회마을 천천히 걷기, 삶을 다시 들여다보는 시간

유교문화길 4㎞ 가보니

경향신문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로 출발한 건 지난달 29일 오후 7시30분이다. 노을이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고 서원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일정이 늦어졌다. ‘유교문화길’로도, ‘선비순례길’로도 불리는 4㎞ 길(풍경소리이야기길 2.5㎞, 선비이야기길 1.5㎞)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길이 낙동강변으로 이어지고, 중간중간 가로등도 비추리라 생각했다. 풍경소리이야기길을 절반쯤 지나자 산길이 나왔다. 다시 강길로 연결되지 않았다. 길은 산허리를 S자로 휘둘러 갔다.


곧 사방이 껌껌해졌다. 풀섶에선 작은 동물들이 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내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내 생각도 흐르기 시작한다”(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말을 떠올리며 느긋하게 걸을 여유가 없었다. 풍경소리도, 선비도, 유교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 길이 끝나긴 하는 건가.” 잰걸음으로 야간 산행을 이어갔다. 어두운 산속을, 두 시간가량으로 느낀 30여분을 걸어가자 전망대 하나가 나왔다. 그제야 하회마을 불빛이 들어왔다.


밤길을 빨리 걷느라 목이 탔다. 출발 때 청량리역에서 ‘아점’을 먹곤, 아무것도 못 먹었다. 하회마을엔 식당도, 편의점도 없었다. 민박집 2곳은 예약이 꽉 찼다고 했다. 세 번째 전화한 민박집에 들어갔다. ‘주변에 저녁 먹을 데가 있냐’고 주인 할머니에게 물었다. ‘뜨신 밥이면 주겠는데…’. ‘찬밥이라도 좋다’고 했더니 데운 밥에 큼직한 갈치조림까지 한상을 차려줬다. 밥값은 달라는 소리도 하지 않았지만, 고마운 마음에 만원 한 장을 주곤 밥과 반찬을 남김 없이 먹었다. 야간 산행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그 길과 마을, 사람을 더 알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종합안내소에서 안동 문화해설과 일본어 통역을 겸하는 김영순씨에게 물었다. 매일 출근하는 이 장소에서 어느 곳을 가장 좋아하는지 궁금했다. 그는 “서애 유성룡이 낙향한 뒤 공부방으로 만든 원지정사 연자루에서 바라본 부용대”라고 했다. 연자루와 부용대는 병산서원과 병산의 관계 같았다. 연자루에서 부용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원지정사 대문도 부용대를 담는다. 김씨는 “자연을, 경치를 건축물 안으로 끌어들이는 차경(借景) 문화를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병산서원과 하회마을을 찾은 건 화재 때문이다. 대형 화재는 수백년 지속된 삶터와 문화재의 가치를 다시 들여다보게 했다. 코로나19 시기 생활방역체계에서 거리 두기를 유지하며 진행하는 ‘안전한 여행’이란 게 있을까도 고민했다. 굳이 찾는다면, ‘안전한 여행’ 중 하나는 야외에서 걷기다. 하회마을의 중심보다는 강길로, 산길로 돌아가는 게 낫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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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만송정 숲에서 바라본 부용대와 낙동강. 부용대 아래 굽이가 하회구곡 중 육곡인 옥연이다. 이 강길은 병산서원으로 이어진다. 김종목 기자

30일 하회마을 안내판 부근 낙동강변 오솔길에서 다시 병산서원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하회구곡(河回九曲) 중 제9곡 병암에서 제1곡인 병산으로 거슬러올라갔다. 물길로 따지면 하회구곡은 6.5㎞다. 하회마을에서 병산서원으로 가는, 선비이야기길 1㎞ 지점쯤 자리한 전망대에선 하회마을 전경이 들어왔다. 밤길에서 볼 수 없었던 풍광이다. 부용대에서 내려다본 마을 전경 못지않았다. 또 다른 전망대에선 ‘물이 빙 돌아나간다’는 물돌이동(하회·河回)의 물줄기가 더 뚜렷이 드러났다. 산길 좌우로 들어선 나무가 소나무, 졸참나무, 청단풍이란 것도 확인했다. 오후 3시쯤 풍경소리이야기길 막바지에서 눈에 들어온 병산과 백사장, 서원의 풍경은 시간과 위치 차이 때문인지 저녁 어스름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20여년 전 여러 사람들이 ‘아름다운 진입로’로 꼽았던 병산서원 초입엔 주차장이 들어섰다. 구멍가게 하나와 민박집 2곳 말고는 상업 시설은 없다. 이곳에서 하회마을로 내려가는 도로는 여전히 비포장이다. 이른바 전문가들이 포장을 할지를 두고 갑론을박 중이라고 한다.

화마 비켜간 병산서원

서원과 1㎞ 지점 산불 발화

축구장 1100개 면적 잿더미

바람 방향 바뀌어 위기 넘겨

서원철폐령 견딘 세계유산

올해 ‘화재 모면’ 기록 남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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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은 화마를 아슬하게 비켜났다. 4월 24일 안동 산불 발화 지점은 서원과 1㎞ 떨어진 곳이다. 안동·예천 소방서 소방관들과 문화재 관리인들이 서원에서 비상대기했다. 서원 맞은편 하아리 야산에서 잔불이 이어진 29일 오후에도 소방관들이 서원 앞을 지켰다.

지난달 29일 오후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서원(屛山書院) 주변엔 안동소방서와 예천소방서 소방차들이 대기했다. 소방관들은 서원 동편의 남후면 하아리 능선을 지켜봤다. “저기 연기 보이죠. 잔불이 남았어요.” 예천소방서 소속 한 소방관이 말했다. 그는 화재가 발생한 지난달 24일 진화 작업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안동소방서 풍산 119센터장인 배선길 소방장은 “이렇게 큰 산불은 처음 겪었다. 잔불은 둥그렇게 웅크리고 있다가 살아나 슬슬 태운다. 큰 산불은 잔불이 한 달가량 지속된다고 하더라”라고 했다. 배 소방장과 대화를 나눌 때 헬기 2대가 굉음을 내며 하아리 능선과 풍천면 인금리 능선을 오갔다. 소방관들은 오후 5시15분 철수했다.


4월24일 오후 3시39분쯤 인금리 산 109번지에서 발생한 산불이 다음날 병산서원 맞은편 병산의 등성으로 번지며 타오를 때였다. 인금리 발화 지점은 병산서원과 1㎞ 떨어졌다. 병산서원 안전관리인 남하진씨는 옥외 소화전 호스를 붙들고 서원 곳곳에 물을 뿌렸다. ‘비화(飛火·튀어 박히는 불똥)’가 낙동강 너머 서원으로 건너와 번질지 몰랐다. 병산이 이름 그대로 병풍 역할을 한 덕분일까. 30일 병산서원에서 만난 그는 “다행히 바람이 비켜갔다. 바람이 서원 쪽으로 불었다면, 하회마을까지 작살이 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순간최대풍속 10m/sec의 강풍은 서원 반대편인 남서쪽으로 향했다. 남씨는 불길이 잡힐 때까지 24시간 뜬눈으로 비상 근무했다.


불은 발생 40여시간 만에 진화됐다. 인명 피해는 없었다. 경북도는 산림 800㏊가 불탔다고 했다. 잿더미가 된 면적은 축구장(0.714㏊) 넓이의 1100배가 넘는다. 주택(3채)과 축사, 비닐하우스가 탔다.


병산서원에 대한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헐리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은 47개 서원과 서당 중 하나’라는 설명엔 ‘2020년 안동 산불도 피했다’는 사건·사고의 육하원칙을 부연해야 할 듯하다. 전혀 피해가 없다고 할 순 없다. 남씨는 “병산도 병산서원에 속한 문화재”라고 했다. 이 병산은 거북을 닮았는데, 등줄기가 시커멓게 타들었다. 그는 산등성이 불을 바라보며 여러 번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절벽이 불타면 조림을 어떻게 합니까. 저 바위산(병산)은 천년이 가야 나온다고 해요.” 2019년 병산서원을 포함한 한국 9개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될 때 주변 경관도 유산 구역이나 완충 구역에 포함됐다.


남씨는 안동시 문화재 10곳을 3개월씩 순환근무한다고 했다. 그는 병산서원과 도산서원을 최고로 뽑았는데, 그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병산서원이라고 했다. 야간근무 때 여행객들이 놓치는 광경을 종종 보곤 한다. “해 질녘에 서원 너머 병산 절벽을 배경으로 낙동강물 위로 새들이 떼지어 날아가곤 하는데, 그냥 그림 좋은 게 나옵니다.” 노을이 내려앉을 무렵 서원 주변엔 새소리, 바람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문화재청·경상북도·안동시가 제작한 소책자 제목은 ‘자연과 사람이 한 폭의 그림이 되는 서원 건축의 백미’다. 백미이자 최고봉으로 평한 이는 여럿인데, 그중 하나가 유홍준 명지대 명예교수다. 그는 1997년 출간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건축으로 한국건축사의 백미이다. 그것은 건축 그 자체로도 최고이고, 자연환경과 어울림에서도 최고이며, 생생하게 보존되고 있는 유물의 건강상태에서도 최고이고, 거기에 다다르는 진입로의 아름다움에서도 최고”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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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은 서원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병산서원 건축 중 백미는 만대루다. 기둥 사이로 안동 산수가 그림처럼 들어온다. 김종목 기자

여러 미술사학가, 문화재 전문가, 건축가 등이 극찬했다. 현장에선 그 찬사를 부정·부인하기란 쉽지 않다. 자연과 건축물이 혼연하는 듯해 서원의 안과 밖을 구별하기 힘들었다. 외삼문인 복례문에서 시선은 서원 중심 강당인 입교당 현판까지 이어진다. 입교당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누각 만대루(晩對樓) 너머 병산 등성이로 시선이 확장된다. 전방 8개와 측면 3개 기둥 사이 드러난 각각 7칸, 3칸의 공간이 화면처럼 병산의 절벽, 낙동강, 소나무를 담아낸다. 여러 전문가들이 이 ‘서원 건축의 백미’ 중 백미로 꼽는 곳이 만대루다. ‘자연과 인간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는 성리학의 천인합일론이 가장 잘 반영된 공간이다.

서원의 배롱나무꽃, 이제 병산을 덮겠구나…세상의 시름을 덜겠네

만대루 기둥 사이 병산·낙동강

자연과 사람이 한 폭의 그림 돼

가장 아름다운 서원 건축물로

봄꽃 축제는 쉼표, 거리는 한산

서원 꽃나무 배롱나무 곧 개화


이 건축물은 후대에도 철학과 사유를 계속 이끌어낸다. “건축적 질서는 하늘처럼 항상 고요하며 시공으로 지속되는 중용과 같이 위압하지 않는 순서와 친화의 체계를 가지며 그 생명적 체계는 ‘만대루’로 인해 완성”(김개천 건국대 건축전문대학원 교수) 같은 평가가 이어진다. 후설의 현상학을 끌어와 병산서원의 공간 특성을 연구한 박사 논문도 있다.


늘 철학과 사유의 공간으로 여겨진 건 아니다. 누군가는 병산서원을 보며 술과 기생을 떠올렸다. MBC 드라마 <국희> 제작진은 1999년 병산서원 곳곳을 드라마 속 기생집 ‘해주옥’으로 그렸다. 만대루에선 질펀한 술판 장면을 촬영했다. 사람과 자연, 건축의 일체를 표방한 심신수양 공간의 흑역사다.


건축물과 병산만 바라보다가는 서원 둘레를 놓치기 쉽다. 흙돌담 밑엔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올랐다. 관리인 남씨는 제초기를 잘 쓰지 않는다고 했다. 손으로 일일이 잡초만 뜯어낸다고 했다.


병산서원 뒤편, 하회마을 주산인 화산(花山, 321m) 정상으로 오르는 초입 오솔길 작은 솔밭 소나무들은 서원 쪽으로 가지를 드리웠다. 솥밭에선 배산임수의 풍수지리가 드러난다. 주사(廚舍) 왼편 숲 벤치도 나무 그늘과 풀밭에 있는 듯 없는 듯 놓였다. 이곳에선 서원의 진입공간과 강학공간, 제향공간이 화산 정상으로 완만하게 오르며 각각 들어선 배치 형태도 볼 수 있다.


주사에서 멀지 않은 곳엔 ‘달팽이 뒷간’이 놓였다. 진흙 돌담은 둥글게 안으로 감겨 들어간다. 시작 부분이 끝 부분을 가린다. 출입문이 없어도 안의 사람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유생들 뒷바라지를 하던 일꾼들이 쓰던 화장실이다.


주사엔 묘지기와 노비들이 거주했다. 주사와 달팽이 뒷간은 자연합일을 추구한 이 성리학의 공간이 사람 간을 구분·구별한 계급의 공간이었다는 점도 새삼 깨닫게 한다.


29일 낮 기차를 타고 내린 안동역 주변은 한산했다. 역전 흡연공간에서 흡연자들이 하나둘씩 담배를 피웠다. 관광안내센터 직원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하루 10명 남짓 센터를 찾는다고 했다. 안동에서 하회마을을 거쳐 병산서원으로 가는, 하루 3번 운행하는 246번 버스를 타고 내다본 거리도 썰렁했다. 월·수·금요일에 한우를 특가에 파는 가게 앞에만 사람들이 보였다. 안동에서 만난 시민들은 코로나19 사태에다 대형 산불까지 나며 삶에 대한 걱정이 커졌다고 말했다.


관광안내센터 직원에게 건네받은 관광지도엔 “안동역은 오가는 사람들로 매일 활력이 넘친다”는 문구가 인쇄돼 있다. 관광지도와 팸플릿 문구와 행사 안내 정보는 모두 과거형이 돼 버렸다.


안동축제관광재단이 펴내는 ‘안동문화 FEEL’ 봄호엔 곤혹스러움이 녹아 있다. 이 잡지는 코로나19 사태로 취소된 안동벚꽃축제를 아쉬워하며 안동의 봄꽃을 특집으로 다뤘다. 병산서원의 꽃나무는 배롱나무다. 병산서원을 지은 서애 유성룡이 ‘껍질이 없어 그 겉과 속이 다르지 않다 하여’ 아꼈다는 나무라고 한다. 병산서원 배롱나무꽃은 5월 말부터 핀다.

휴식·강학 공간 만대루, 서원건축의 백미

유성룡이 후학 키운 병산서원


서애 유성룡(1542~1607)이 1572년 풍산 상리에 있던 풍악서당을 옮기며 지은 곳이다. 서애는 이곳에서 제자도 가르쳤다. 철종 14년(1863년) 병산서원으로 사액 받았다. 조선시대 5대 서원으로 꼽힌다. 전학후묘(前學後廟) 구성 원리에 따라 앞쪽은 강항 공간, 뒤쪽은 배향 공간인 사당을 배치했다. 진입 공간인 복례문(復禮門), 휴식과 강학의 복합 공간인 누각 만대루(晩對樓), 서원 중앙 강당인 입교당(立敎堂), 유생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던 장판각(藏板閣), 서애 위패를 둔 존덕사(尊德祠) 등이 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