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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나주서 학교 세운 독일인 ‘아동 성폭행’…박정희 정부는 알면서도 덮었다”

by경향신문

독일 외무부 보고서 입수

학생 등 피해자 24명 달해

호만, 처벌 피하려 귀화 신청

정부, 독일 통보받고도 허용

경향신문

성폭행 피해 남학생 24명의 이름을 적은독일 외무부 자료 문서. 성상환 교수 제공

박정희 정부가 1960년대 국내에서 교육사업을 하던 독일 출신 프리츠 호만(1982년 작고)의 아동 성폭행 의혹을 알고도 묵인한 정황이 서독(독일)·한국 공식문서로 밝혀졌다. 호만은 독일과 한국 정부 원조를 받아 전남 나주에서 기술학교를 운영했으나 아동 24명을 성폭행한 사실이 밝혀져 독일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한국 정부는 이 같은 사실을 알고도 독일 원조를 받기 위해 그를 첫 독일 귀화인으로 인정했다. 지금도 해당 지역에서는 호만을 지역교육을 이끈 인물로 추모하고 있다.


경향신문은 14일 독일 외무부가 1967년 한국에서 벌어진 호만의 성폭행 사건에 대해 작성한 14쪽 분량의 보고서를 입수했다. 보고서에는 호만이 당시 기숙학교에 있던 최소 9세부터 10대 중반의 소년들을 사택으로 불러 성폭행했다는 조사 결과가 담겼다. 서울주재 독일대사관이 작성한 보고서에서 한 학생은 자신과 함께 피해를 당한 24명의 이름을 자필로 적고 “아래 사항은 진실이며, 언제든지 내가 증명할 수 있다”는 내용의 서명을 했다.


1959년 기술 지원 등의 목적으로 한국을 찾은 호만은 1964년 나주 지역에 기숙학교인 ‘호만기술학교’를 설립했다. 호만의 성폭행 사실은 1967년 6월 기숙학교 직원에 의해 독일대사관에 알려졌다.


이는 당시 청와대에도 보고됐지만, 한국 측은 호만에 대한 법적 조치를 하지 않았다. 보고서에는 ‘청와대가 이 같은 사건에도 불구하고 호만에게 기숙학교의 운영을 지속해서 맡아달라고 부탁할 것이라는 애기를 주한 독일대사에게 전했다’는 대목이 담겼다.


한국 정부는 호만이 독일 당국의 형사처벌을 피하고자 신청한 한국 귀화도 받아들였다. 그해 8월 호만이 신청한 귀화 신청에 대해 한국 법무부와 내무부는 신원조회서에 “학생들과의 계간(鷄姦) 사건이 독일 정부에 알려지자 귀국 시 엄벌을 두려워한 나머지, 또한 한국에 8년간 거주하면서 교육사업을 통하여 한국에 정을 붙여 귀화하려는 것으로 판단됨”이라는 참고사항을 달고 귀화를 허용했다. 당시 “독일인 첫 귀화”라며 호만이 “호만애암이라는 청소년 직업학교를 설립하는 등 사회활동에 많은 공로를 쌓았다”고 소개하는 기사도 나왔다.


수년에 걸쳐 국내에서 아동을 성폭행한 호만의 귀화가 받아들여진 것은 한국 정부가 개발원조 공여국이었던 독일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취한 조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정부가 청와대의 지원을 받는 교육사업이 중단될 경우 대통령의 위신이 추락할 위험 역시 고려했을 수 있다. 호만은 나주에서 벌인 교육사업으로 1964년 대통령문화훈장을 받는 등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호만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주고받은 친서를 귀화신청서에 첨부하기도 했다.


독일 외무부 자료 등을 발굴한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제한국학센터 소장 성상환 교수(독어교육과)는 “한국과 독일 양쪽의 공식문건을 검토해 보면 당시 한국 정부는 호만의 성범죄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호만에게 한국 국적을 허가했다”며 “같은 시기 일어난 ‘동백림 사건’으로 한국과 독일의 관계가 악화하는 상황에서 호만 사건이 다른 악재로 작용하지 않도록 덮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추정된다”고 말했다. 성 교수는 “이 과정에서 어린 학생들의 인권이 유린된 것이 문제였다. 당시 피해를 입은 기숙학교의 학생들에 대해 한국 정부가 어떠한 절차를 밟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고 밝혔다.


호만은 귀화 이후 국내에서 교육 활동을 하다 1982년 사망했다. 나주 지역에서는 최근까지 호만을 기리는 추모사업이 열렸다. 추모사업 관계자는 경향신문에 “성폭행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누구에게나 공과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 프리츠 호만에게 성폭행 피해를 당했거나, 이를 묵인하도록 요구받으신 분들은 경향신문 사회부(02-3701-1144)로 제보 부탁드립니다.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