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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임금을 '너'라 한 정인지, 임금의 '팔'을 꺾은 신숙주…취중 실수의 끝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by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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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풍류남아들이 즐겨 읊었다는 ‘장진주’ 시를 새긴 ‘청자상감 장진주시명 매죽양류문 매병(보물 제 1389호)’. 매병에 새겨진 시는 당나라 시대 시인인 이하(791~817)의 장진주다. ‘그대에게 권하노니 종일토록 마시고 양껏 취하자꾸나, 이 술이 유령(죽림7현의 한사람. 술을 즐겼다고 함)의 무덤에까지 가지는 않을테니…’로 끝난다. 그러나 군주와 신하의 술자리는 때때로 ‘무덤’까지 가는 불상사로 번졌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지난날의 성현들은 모두 사라지고 술 잘 하던 사람만이 이름을 남겼네…그대와 함께 마시면서 만고의 시름을 녹여 버리리라.”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의 ‘장진주(將進酒)’ 중 한 대목이다. ‘인생이란 뜻을 얻었을 때 즐겨야 하므로…마셨다 하면 300잔은 마셔야 한다’면서 풍류남아의 호방한 기백을 토해냈다. 그러나 한자 ‘술잔 치(巵)’는 ‘위태로울 위(危)’와 비슷하고, ‘취할 취(醉)’에는 ‘술 유(酉)’ 변에 ‘죽을 졸(卒)’자가 붙어있다. 술잔에 위태로움이 있고, 술에 죽음이 따른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임금과 신하들의 술자리라면 어떨까. 심심찮게 죽음의 향연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술자리에서 ‘역린’을 건드려 군주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분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변해서 평소에도 파악하기 어려운 ‘군주의 역린’을 어떻게 취중에 구별할 수 있단 말인가.

■“신정승! 구정승!” 아재개그로 재상들을 골탕먹인 세조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아 술자리를 싫어한다”면서 소주 한 잔 정도만 겨우 마셨던(<세종실록> 1422년 5월26일) 세종 같은 군주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대부분의 군신간 술자리는 화기애애하게 끝났다.


예컨대 세조는 계유정난(1453년)의 공신들을 비롯한 대소신료들을 불러 수시로 주연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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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1420~1488)의 <필원잡기>에 등장하는 세조와 신숙주·구치관의 술자리 일화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1463년(세조 9년) 세조는 영의정이던 신숙주(1417~1475)와 새롭게 우의정이 된 구치관(1406~1470), 두 사람을 내전에 마련된 술자리에 불렀다. 슬슬 장난기가 발동한 세조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벌주를 내리겠다”면서 운을 떼면서 “신정승!”하고 불렀다. 이에 신숙주가 “네”하고 대답하자 세조는 “틀렸다. 나는 새로 임명된 신정승(新政丞·구치관)을 부른 것”이라며 커다란 잔으로 벌주를 내렸다. 세조가 이번에는 ‘구정승!’이라 했다. 이에 구치관이 “예”라고 답하자 세조는 이번에도 고개를 내저으면서 “틀렸다. 나는 옛 구(舊)자 구정승(신숙주)을 불렀다”면서 역시 구치관에게도 벌주를 내렸다. 세조가 다시 ‘구정승’을 부르자 이번에는 신숙주가 “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세조는 “틀렸다, 이번에는 내가 구정승(구치관)을 불렀다”면서 다시 신숙주에게 벌주를 하사했다. 이어 세조가 ‘신정승’ ‘구정승’을 교대로 불렀지만 이번에는 신숙주와 구치관이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세조는 “임금이 불러도 신하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짐짓 꾸짖으면서 두 사람 모두에게 벌주를 내렸다. 이렇게 종일토록 벌주를 마셔 두 정승이 만취하자 세조는 크게 웃었다. 세조가 싱겁기 이를데없는 ‘아재개그’로 정승들을 곯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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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의 ‘너’ 사건


세조의 술자리 일화 중 백미는 역시 정인지(1396~1478)의 ‘너’ 사건일 것이다. 정인지가 누구인가.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세종~문종 대에는 문화 발전에, 단종~성종 대에는 정치 안정에 기여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인지의 한가지 단점이 있었으니 술만 마시면 하늘같은 임금에게 막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임금(세조·1417년생) 보다 21살 연상이었다고 해도 용납될 수 없는 하극상이었다.


1458년(세조 4년) 9월 15일 취중 막말 사건이 터진다. 정인지가 왕세자와 종친, 의정부, 육조 판서 이상이 참여한 양로연에서 세조 임금에게 ‘너’라고 지칭한 것이다. 17일자 <세조실록>은 정인지의 막말을 직접 들은 세조의 증언을 생생하게 전한다.


“아 글쎄, 정인지가 ‘나(予)’를 ‘너(汝)’라고 칭하고는(麟趾與予稱爾汝曰) ‘(네가) 그같이 하는 것을 나는 모두 취하지 않겠다(若之所爲 皆吾不取)고 했네”.


‘나(정인지)는 네(세조)가 한 말을 모두 듣지 않겠다’는 것이니 임금을 능멸한 죄, 즉 불경죄에 해당됐다. 세조는 “술에 취하면 본성이 드러난다는 옛말이 있지 않느냐”면서 “정인지의 말이 너무 방자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발맞춰 종친과 의정부, 육조는 물론 대간들이 벌떼처럼 나서 “정인지의 불경스러운 언사는 (단종 복위 사건 때 세조를 ‘나으리’라 지칭한) 성삼문과 다를 바 없는 역신(逆臣)의 막말”이라고 탄핵했다. 하지만 세조는 “정인지가 취중(醉中)에 한 말은 모두 고구(故舊·옛 친구)의 정을 잊지 못하고 한 말이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라면서 “정인지는 지금 나라 일을 맡아 보는 대신도 아니고 노쇠하고 쓸모없는 일개 유생일 뿐”이라고 두둔해주었다.


그러나 정인지의 취중 막말은 한번이 아니었다. 1458년(세조 4년) 2월12일 열린 공신연에서도 세조를 향한 불경한 취중발언으로 물의를 빚었고, ‘너’ 사건이 일어난 4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1459년(세조 5년) 1월19일의 연회와, 다시 7개월 뒤인 8월 1일의 내전 술자리에서도 ‘임금에게 불경한 언사’를 일삼았다는 이유로 탄핵됐다. 세조는 그때마다 “그게 정인지의 술버릇인데 어찌 문책하겠느냐”고 역성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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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팔 비튼 신숙주


비교적 이렇게 술자리 실수에 너그러웠던 세조에게도 ‘역린’은 있었다. 세조 역시 때때로 마음을 풀어놓는 술자리를 신료들의 충성을 시험하는 자리로 여겼다. 그러니 임금과의 술자리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살얼음판 같은 자리였다. 예컨대 세조는 틈만 나면 신숙주를 역대 이상적인 군신의 상징인 ‘제 환공의 관중, 한 고조의 장량, 촉 선주(유비)의 제갈공명, 당태종의 위징’이라 칭했다. 군신관계를 떠나서도 두 사람은 ‘1417년 닭띠’ 동갑내기였다.


어느날 연회에서 술에 취한 세조가 신숙주의 팔을 잡고 술을 마시면서 “경(신숙주)도 내 팔을 잡으라”는 명을 내렸다. 역시 인사불성이 된 신숙주는 소매 속으로 손을 넣어 세조의 팔을 힘껏 잡았다. 너무 세게 잡아당겨 비튼 셈이 됐다. 세조가 “아파! 아파!”하고 비명을 지르자 곁에 있던 세자(예종)의 안색이 변했다. 세조가 예종에게 “괜찮다”면서 흥을 깨지 않았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명회(1415~1487)는 술자리가 파한 뒤 신숙주의 집에 청지기를 보내 신신당부했다.


“범옹(신숙주의 자)! 자네는 평소 만취해도 집에 돌아가면 반드시 등불을 켜고 책을 본 뒤 잠자리에 드는 습성이 있지. 그러나 오늘은 절대 그래서는 안되네. 곧바로 불끄고 잠자리에 들게.”


과연 집에 돌아가 평소처럼 책을 들춰보던 신숙주는 한명회의 전언을 듣고는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과연 세조가 한밤중에 넌지시 내시를 불러 “신숙주의 집에 가보라”고 지시했다. 세조는 “신숙주가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침수에 들었다.(<소문쇄록>) 세조는 신숙주가 술에 취한 척하며 일부러 임금의 팔을 비튼게 아니냐고 의심한 것이다.


■‘오래 해먹었느니 그만 물러나라’는 공신


이런 판국인데 술자리에서 “임금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직격탄을 날렸다면 무사했겠는가. 1466년(세조 12년) 6월8일 세조는 평안도절제사로 근무하다가 돌아온 양정(?~1466년)을 위한 위로연을 베풀었다. 양정은 계유정난(1453년)의 공신이었지만 주로 북방의 변경지대에서 근무했던터라 인사불만이 컸다. 연회에서 술에 취한 양정은 “전하는 이제 편히 쉬셔야 할 때”라고 폭탄선언했다. 세조가 재차삼차 “나보고 물러나라는 거냐”고 물었지만 양정은 “신의 마음도, 민심도 그렇다”고 했다. 세조가 다시 “내가 죽고, 신숙주와 한명회는 물론이고, 경(卿·양정)도 죽는다면 나랏일은 누가 다스리겠느냐”고 묻자 양정은 “차차(次次·차례차례)로 있게 될 것입니다”라 꼬박꼬박 말대답했다. 세조가 “어서 상서원(어보 담당관청)에서 옥새를 가져와 세자에게 전하라”고 양위소동을 벌이자 대소 신료가 벌벌 떨며 어명을 받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양정은 어탑(御榻·임금이 앉는 상탑) 아래 꼿꼿이 앉아 “왜 어명을 받들지 않느냐. 승지들은 빨리 옥새를 가져오라”고 재촉했다. 이쯤되면 취중진담이었다. 결국 양정은 임금에게 “물러나라”고 강요했다는 죄로 참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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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해 소매 속 귤을 떨어뜨린 신하


성종은 증조할아버지(세종)를 빼닮아 학문을 워낙 좋아했다. <용재총화>는 “성종은 홍문관에서 숙직하던 선비들을 불러 학문을 토론하고 편복(평상복)으로 마주 앉아 촛불 하나만을 켠채 술잔을 나누며 세상사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다”고 전했다. 성종과 성희안(1461~1513)의 일화가 유명하다.


성종과 술을 마시던 홍문관 정자(정9품) 성희안은 술상에 올려져있던 감자(柑子·밀감) 10여개를 소매 속에 넣고는 술에 취해 정신을 잃었다. 내시가 성희안을 업고 나가다가 소매 속의 과일이 떨어졌다. 어전에서 과일이 이리저리 흩어지져 터지고…. 시쳇말로 ‘갑분싸’였다. 그러나 성종은 이튿날 밀감 한 쟁반을 홍문관에 내리면서 “어제 성희안이 어버이에게 드리려 한 과일이 쏟아졌으니 지금 다시 내려준다”고 했다. 죽을 죄를 졌다고 여긴 성희안은 “이 은혜를 죽음으로 갚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성종은 큰 술잔으로 술 마시기를 좋아했다. 차천로(1556~1615)의 <오산설림>은 “종실 중 한 사람이 술을 마신 뒤에 큰 술잔을 소매 속에 넣고 일어나 춤추다가 거짓으로 땅바닥에 넘어져 산산조각 냈다”고 전한다. <오산설림>은 “이런 종실의 행동은 성종이 지나치게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을 은연 중 간하는 뜻이었고, 임금 또한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다”고 했다.


허엽(1517~1580)의 <전언왕행록>은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이 기생과 음악이 따르는 연회를 즐겨 베풀었다”고 기록하면서 일침을 놓았다.


“혹자는 ‘태평성대라면 모르되 연산군이 향락에 빠진 것은 아버지 성종 때부터 보고 자랐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연산군이 아버지를 닮아 술자리를 즐겼고, 그 때문에 정사를 그르쳤다는 논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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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 발령을 그대로 실행한 연산군


물론 연산군도 나름 화기애애한 술자리를 즐긴 적이 있다. 1503년(연산군 9년) 11월 21일 창경궁 내전에서 연산군과 대신들이 군신의 예를 잊고 광란의 술자리를 벌였다. 연산군은 이날 스스로 북을 쳐 노래하고, 더러는 손으로 대신들의 사모를 벗겨 머리털을 움켜쥐고 희롱하며 욕보이기도 했다. 영의정 성준(1436~1504)과 좌의정 이극균(1437~1504)에게 어의(御衣)까지 하사하여 직접 입혔고, 참의 한형윤(1470~1532)에게는 신발까지 벗어주면서 “너를 이조참판으로 삼는다”고 약속했다. 또 김감(1466~1509)에게도 “너에게 지성균관사(성균관의 정2품)를 시켜준다”고 했다. 이때 좌의정 이극균은 연산군에 하사한 어의에 ‘오바이트’까지 하는 불상사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어제 과음해서 취한 뒤의 일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면서 오히려 자신의 취중실수를 탓했다. “임금의 패덕이 이보다 더할 수 없고 역사를 더럽힌 것이 이보다 더할 것이 없다”면서 “대신들 보기 부끄럽다”고 자책했다. 연산군은 그러면서 “내가 어제 한형윤, 김감에게 낸 취중발령을 그대로 시행한다”고 약속까지 했다. <연산군일기>는 “(어젯밤 광란의 파티에서 일어난 불상사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대죄를 청하던) 영의정 성준과 좌의정 이극균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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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잔을 떨어뜨린 예조판서


이 대목에 이르러 필자는 군주, 아니 연산군의 죽 끓는듯한 변덕에 염증을 느끼게 된다.


연산군은 분명 1503년 11월 군신간 벌인 질탕한 광란의 파티를 두고 ‘임금인 나의 패덕’이라 했다. 그런데 그보다 두 달 전인 9월 창덕궁 인정전에서 베푼 양로연에서 일어난 사건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무슨 사건인가. 9월11일의 양로연에서 연산군과 신료들이 잔을 돌리며 술을 마실 때 예조판서 이세좌(1445~1504)가 그만 술잔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양로연이 끝난 뒤 연산군은 “오늘 이세좌가 과인에게 올리던 술잔을 떨어뜨려 내 옷까지 적셨다”면서 “이세좌를 국문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연산군은 “내 옷은 물론이고 어좌 위에도 흘러 오래도록 마르지 않았다”느니, “예를 관장하는 예조판서가 그럴 수 있냐”느니 하며 트집을 잡았다. 술자리 실수 치고는 도가 지나친 처사였다. 이세좌는 곧 파직됐다.(15일) 이때만 해도 이세좌와 그의 동료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세좌는 의금부에서 “몸이 뚱뚱하고 행동이 느려서 너무 조심하다가 술잔을 엎지르는 것도 몰랐다”고 진술했다. 원로 재상들도 이세좌를 적극 변호했다.


“이세좌는 술을 마시지 못합니다. 성상의 위엄이 황공스러워 자기 딴에는 빨리 마시려다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이세좌가 연회가 끝난 뒤 “내가 평상시 술을 못마시는데 오늘은 성상께서 돌리는 술잔을 다 받아 마셨다”고 자랑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동료들이 “다 웃었다”는 것이었다. 원로 재상들은 “이세좌가 일부러 엎질렀다면 어찌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했겠냐”고 해명해주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의정부와 육조, 한성부 당상들이 불러 “(59살인 이세좌가) 나이 늙은 대신이 어린 임금(28살 연산군)이라고 우습게 여긴 것”이라면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꺼낸다.


“대간이나 조정대신들이 이세좌의 위세가 두려워 아무도 탄핵하지 않는다. 이는 이세좌의 아들 이수의가 한림이고, 이수정이 홍문관원이기 때문에 무서워 말하지 않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연산군의 명분은 군색하기 이를데 없었다. 아무렴 대간이나 조정대신들이 한림(예문관 검열 정9품)과 홍문관 수찬(정6품) 따위가 무서워 그 아비(이세좌)의 죄를 거론하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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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어필. 계유정난 등으로 정권을 잡은 세조는 공신들과 유난히 술자리를 즐겼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술자리 실수가 멸문의 지경까지


연산군은 왜 ‘이세좌 가문의 세력’ 운운했을까. 이유가 있다. 당대의 인물인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는 “문벌이 번성하기로는 광주 이씨(廣州 李氏)가 으뜸”이라고 했다. 이세좌의 ‘광주 이씨’ 가문은 세조~성종까지 ‘팔극조정(八克朝廷)’이라고 할만큼 번성했다. 8명의 광주 이씨 ‘극’자 돌림이 영의정에서 장차관 벼슬에 올라 조정회의를 쥐락펴락했다는 것이다. 이극배(영의정·1422~1495)·극감(형조판서·1423~1465)·극증(영의정·1431~1494)·극돈(이조판서·1435~1503)·극균(좌의정·1437~1504), 극규(대사간·?~?), 극기(예공조참판·대사헌·?~1489)·극견(좌통례공) 등이다. 당시 의정부 사인(정4품) 이수형(?~1504)과 홍문관 수찬(정6품) 이수정(1477~1504), 예문관 검열(정 9품) 이수의(?~1504) 등은 이극감의 아들인 이세좌의 자녀들이었다. 연산군은 이세좌의 술자리 실수를 빌미삼아 광주 이씨 가문을 손볼 생각을 했다.


결국 이세좌와 그 자녀들은 물론 유일하게 남아있던 ‘극’ 자 돌림의 좌의정 이극균도 “조카(이세좌)의 죄는 ‘큰 불경(大不敬)’은 아닌 ‘불경’이라고 변호했다”는 이유로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연산군일기> 1504년 5월6일자는 “연산군은 (이씨) 종친이 강성한 것을 근심하여 모두 없애 종자도 남기지 않으려 했다”고 기록했다. 이세좌와 그의 자식은 물론 가문까지 씨를 말리려 했던 의도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물론 이세좌가 연산군에게 찍혀 죽임을 당한 다른 이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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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글씨. 안평대군의 글씨와 쉬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했다고 한다. 성종은 기생과 음악이 따르는 술자리를 즐겼는데, 혹자는 “아들인 연산군이 향락에 빠진 것은 아버지 성종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라고 꼬집기도 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갑자사화>(1504년)에 연루된 것이다. 이세좌는 1482년(성종 13년) 연산군의 생모 윤비(?~1482)를 폐위할 때 극간하지 않았고, 이어 형방승지로서 윤비에게 사약을 전했다는 이유로 자결의 명을 받았다. 술자리 실수에서 비롯된 이세좌와 가문의 수난은 극에 달한다. 갑자사화가 마무리된 뒤 1년 6개월이 지난 뒤인 1505년(연산군 11년) 10월7일 연산군은 이세좌에게는 ‘간흉의 괴수로서 임금을 능멸했고(魁兇陵君)’, 이극균에게는 ‘포악하고 간사하여 임금을 능멸했다(桀힐陵君)’는 죄목을 달았다.


연산군은 이세좌의 시신을 파내어 토막내어 사방에 돌리고 그 머리에 ‘찌’(요즘의 포스트잇)를 써붙였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연산군은 이세좌는 물론 삼촌인 이극균의 시신을 다시 파내어 해골을 분쇄한 뒤 그 형적을 없애게 하는 이른바 쇄골표풍(碎骨飄風)의 형벌까지 내렸다.


■술에 취하면 황제도 없다지만…


어떤가. 불과 두 달 사이에 벌어진 같은 임금의 술자리가 아닌가. 그런데 어떤 술자리(1503년 9월 11일)에서는 실수로 술잔을 엎은 신료는 물론 그 일족까지 임금을 능멸한 역적으로 몰아붙여 급기야 그 해골까지 가루내어 바람에 날리고, 또 어떤 술자리(11월21일)에서는 취중실수는 모두 임금이 패덕한 탓이라고 자책하고 참석자들에게 선물까지 내리고…. 극과 극을 오가는 군주의 변덕을 어쩌란 말인가.


새삼 1791년(정조 15년) 7월 취중 살인사건을 판결하던 정조 임금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대체로 술 취한 사람에게는 비록 천자(天子·황제)라도 안중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취중에도 역시 진실은 드러나는 법이다.”


군주가 생각하기에 따라 신하들의 취중언행은 얼마든지 대역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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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런저런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는 필자는 술맛도 모르면서 부어라 마셔라 했던 예전의 술자리를 돌이켜본다. 생각해보니 스트레스를 푼다는 이유로 벌였던 술판이었는데, 다음날 일어나보면 거의 대부분 ‘후회막급’이었다. 술김에 하는 얘기라며 남에게 상처주는 이야기를 했거나, 혹은 거꾸로 술김에 나에게 상처가 되는 이야기를 들었거나….


공자의 그 유명한 ‘고불고 고재고재(觚不觚 觚哉觚哉)’(<논어> ‘옹야’). ‘모난 술잔이 모가 없으면 모난 술잔이겠는가. 모난 술잔이겠는가’라고 해석된다. 청나라 고전학자인 모기령(1623~1716)도 ‘고불고는 술주정을 경계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술그릇의 이름인 ‘고(고)’는 원래 두 되 정도 담을 적은 양의 술잔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술 마시는 양을 3되를 적당하다고 하고, 5되를 과하다고 했으며, 2되를 적다고 했다는 것. 그런데 공자의 시대에 과음의 풍조가 퍼지자, 공자가 ‘어찌 고를 고라고 하겠는가’라고 한탄했다는 것이다.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금과옥조인 것 같다.


경향신문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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