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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커버스토리

SF가 바꾼 오늘,
더 SF 같은 오늘

by경향신문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을 꿈꾸나


1818년 ‘프랑켄슈타인’부터 202년 동안…사회에서 금기시하는 것들에 대한 끝없는 질문을 던졌다

SF 안에서 소수자는 소수자가 아니다. SF는 언제나 가장 진보적 입장을 반영해왔다

AI와 친구처럼 대화하지만 갓 태어난 바이러스에 잠식당한 일상을 사는 우리

SF를 찾는다. SF시장이 뜨겁다

경향신문

모두 마스크를 쓴다. 건물에 들어가려면 열감지기를 통과해야 한다. 사람들은 집에서 휴대전화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한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24일 1면에 1000명의 이름을 새겼다. 미국 내 코로나19 사망자 약 10만명 중 1%의 이름이다.


<우주의 원더키디>(1989년 KBS에서 방영된 SF 애니메이션·사진) 배경이 된 2020년. 사람들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세계로 들어와 있다. 인류는 달에 갈 수 있고, 어쩌면 곧 화성에도 가겠지만 ‘겨우’ 국경을 넘는 일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문제가 됐다. 장기를 이식해 생명을 살리고 대부분의 암을 정복했으며, 인공지능(AI)과 친구처럼 대화하지만, 갓 태어난 바이러스에 일상을 잠식당했다.


1년 전쯤 누군가 이런 상황을 SF(Science Fiction·과학소설)로 썼다면 어땠을까. 있을 수도 있지만 일어나진 않을 이야기라고 여기지 않았을까.


오늘, 사람들은 SF 속에서 살며 SF를 읽는다. 최근 한국의 SF는 폭발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 2019년 출간된 김초엽 작가의 SF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12만부를 발행했다. 주요 서점의 SF 출간종수와 판매부수도 놀랄 만큼 증가하고 있으며, SF 관련 문학상과 전문출판사도 늘고 있다.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도 만들어졌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 증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 SF작품의 해외 출간도 이어지고 있다.


스마트폰을 쓰고 알파고의 능력을 보았으며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와 함께 살고 있는 우리에게 SF는 어떤 의미일까. 지난해 창간한 SF 무크지 ‘오늘의 SF #1’에 정소연 작가는 이렇게 썼다. “SF는 지금 이곳너머를 말하는 장르이지만, SF라는 장르는 지금 여기에 있다.”


1818년 19세였던 메리 셸리가 최초의 SF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쓴 이래, 202년 동안 SF는 과학기술을 매개로 당대의 금기를 건드리며 다른 삶, 다른 세상을 이야기했다. SF는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까?”

코로나19가 일상을 바꾼 2020년…우리에게 SF는 어떤 의미일까

경향신문

미국의 SF작가 코니 윌리스가 쓴 단편 <여왕마저도>에서 여성들은 생리를 하지 않는다. 암메네롤이라는 생리억제약과 생리회피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생리로부터 해방’ 20년 뒤, 자발적으로 생리를 하려는 딸(손녀)과 이에 경악하는 어머니(할머니)의 모습을 통해 여성에게 생리란 무엇인지를 얘기한다. 1992년 출간된 이 소설은 이듬해 대표적 SF문학상인 휴고상과 네뷸러상 등을 수상했다. 그러나 2020년 이 소설을 처음 읽은 사람이라면, 과학소설보단 유쾌한 사회풍자소설로 느낄지 모른다. 생리를 줄이거나 멈출 수 있는 의학시술이 실재하기 때문이다. 생리를 더럽거나 부끄러운 것으로 보는 시선에 대한 문제제기도 ‘현재적’이다. SF는 이렇게 과학기술을 매개로 ‘지금’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미래’ 혹은 ‘다른 어떤 세상’에선 가능할 삶을 보여주며 끊임없이 ‘오늘’을 바꿔왔다. 오늘의 우리에게 SF는 어떤 의미일까.

SF 속을 산다

2020년은 SF의 고전들이 그린 미래보다 더 나아간 때다. 조지 오웰이 빅브러더(감시자)의 시대로 예견한 1984년을 훌쩍 넘어, 핵전쟁 이후 인간과 복제인간(레플리칸트)의 암울한 모습을 그린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의 배경이었던 2019년도 지났다.


사람들은 휴대전화와 CCTV와 블랙박스 속에 산다. 유전자 복제 연구 성과는 빠른 속도로 업데이트되고 있고, 딥러닝을 거친 알파고가 인간을 능가할 수 있다는 사실도 목격했으며, 인공지능(AI)이 친구처럼 대답해도 놀라지 않는다. 우리는 SF 속에서 산다.


최근 몇년간 SF가 더 큰 인기를 얻게 된 것도 과학기술의 빠른 일상화 덕분이라는 분석이 많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SF칼럼니스트)는 “스마트폰처럼 SF에서 보던 것을 일상에서 누리게 되면서, 과학기술과 일상의 변화를 가장 빠르고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장르인 SF에 대한 수요가 더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신종플루나 메르스 때와는 달리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의 일상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SF에서 그리는) ‘소프트한 디스토피아’처럼 인식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환경파괴와 기상이변으로 지구가 더 이상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하는 서사나,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창궐해 일상이 마비되는 이야기는 SF에서 자주 반복돼온 서사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목격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금기에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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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묻고, 미래를 보여주는 SF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왼쪽 사진·1955년)가 경찰에 체포될 정도로 흑인에 대한 차별이 심각했던 20세기에 SF드라마 <스타트렉> (1968년)은 23세기를 배경으로 흑인과 백인의 키스신을 방영해 화제를 모았다.

1968년 11월 방영된 미국 SF드라마 <스타트렉>에서 흑인 여성과 백인 남성이 키스하는 장면이 나왔다. 미국 TV드라마 사상 첫 흑백키스신이었다. 당시 두 배우의 입술이 실제로 닿았는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질 만큼 화제가 됐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흑인과 백인의 결혼을 금지한 법에 위헌 판결을 내린 것이 1967년. 흑인과 백인 간 결혼이 소송 대상이 될 만큼, 당시 사회 분위기는 경직돼 있었다. <스타트렉>은 ‘23세기’라는 배경을 통해 인종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여전한 20세기를 돌아보게 했다.


사회에서 금기시하는 것에 질문을 던지는 것은 SF의 특징이자 매력이다. 특히 소수자를 소수자로 만드는 사회시스템과 편견을 성찰하게 만든다. 퀴어, 장애인, 소위 ‘정상가족’이 아닌 다양한 가족과 연대 구성원들의 삶의 모습은 SF 안에선 소수자가 아니다. 성별을 양성(남성 또는 여성)으로만 구분하지 않고, 등장인물들의 젠더를 중립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SF에선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다.


SF전문 출판사 아작의 김아린 기획이사는 “관습적인 것들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저항,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인정과 포용이 SF의 가치이자 의미가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김 이사는 “SF에서는 관습적으로 사용해온 ‘그’라는 인칭대명사를 버리고 모든 사람을 ‘그녀’라고 부르는 우주를 설계하기도 하고, 외계인 혹은 인간이 아닌 생명체와도 거리낌 없이 우정과 사랑을 나눈다”며 “이 끝없는 사고실험이야말로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팬데믹의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저주토끼>를 쓴 정보라 작가는 지난해 출간된 SF무크지 ‘오늘의 SF #1’에 쓴 ‘SF작가론’에서 “나는 SF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지향해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생각하는 SF의 기본 의무는 무엇이 됐든 지금과는 다른 존재의 방식, 지금보다 더 좋은 삶의 방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썼다.


북튜버(겨울서점) 김겨울씨는 “SF는 상상의 한계를 시험하는 동시에 당장 우리가 딛고 있는 세계를 명확히 보여주는 장르”라며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는 것, 정신을 환기하고 거기서 전혀 다른 종류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SF가 사랑받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상준 대표는 “SF가 (단순히) 미래의 과학기술을 예측하는 장르라는 선입견을 갖는 경우가 많지만, SF는 미래의 과학기술이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정치적·사회적·심리적 영향을 스토리텔링으로 보여주는 장르”라고 했다. 박 대표는 “SF는 언제나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입장을 반영해왔다”며 “근미래 또는 미래에는 사회적 소수나 피해자를 만드는 그런 식의 상황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한국 SF의 빅뱅

경향신문

2019년 출간돼 12만부를 발행한 김초엽 작가의 SF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은 많은 독자들을 SF세계로 끌어들이며, SF가 출판시장에서 가지는 힘을 보여줬다. 허블출판사 제공

한국 SF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 SF를 쓴 듀나 작가, 복거일 작가에 이어 10년 이상 SF를 꾸준히 쓴 작가들이 탄탄한 팬층을 확보하며 저변을 넓히고 있다.


2005년부터 작품활동을 해온 배명훈 작가는 지난 2월 발간한 에세이 <SF작가입니다>에서 SF작가들에게 상투적으로 ‘통통 튀는 상상력’ ‘재기 발랄한 상상력’ ‘발칙한 상상력’ 등의 수식어를 붙이는 것을 꼬집었다. “실제로 써낸 글은 어둡기 그지없는데도 내용과 관계없이 일단은 통통 튀는 작가로 포장되던 시절이었다.


그게 어찌나 싫었던지 SF작가들끼리 만나는 자리에 가면 실제로 통통 튀는 시늉을 하며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배 작가는 “다행히 요즘 데뷔한 SF작가에게는 그런 말이 붙지 않는다고 한다. 근거 없고 일방적인 선입견에서 벗어나 작품 자체를 들여다보게 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라고 썼다.


김초엽 작가의 글은 SF가 출판시장에서 가진 폭발력을 보여줬다. 김 작가의 SF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18쇄, 12만부가 발행(5월29일 기준)됐다. 표제작은 지난해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며 장르문학에 인색했던 기존 문단의 좁은 문도 열었다는 평을 받았다. 허블 출판사의 조유나 편집자는 “독자 분석을 해보면 20~30대 여성들이 많고, ‘나의 첫 SF’라는 반응들도 많다”고 말했다. 김 작가의 글을 통해 SF에 입문한 독자들이 많다는 뜻이다. 조 편집자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여성, 장애인, 비혼모, 이주민 등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을 통해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가’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던진 것이 많은 독자들을 새롭게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생화학 석사이기도 한 김 작가는 “SF는 과학의 관점에 기반해 현실과 약간은 맞닿아 있으면서도 저를 꿈꾸게 하는 장르”라며 “모든 소설이 어느 정도는 그렇겠지만, SF를 쓰는 것은 정말 물리적으로 저의 세계를 밀어넓히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장애와 기술에 관한 논픽션을 집필하고 있다.


한국 SF작품들은 외국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2019년 초 미국에서 <Readymade Bodhisattva(레디메이드 보살)>이라는 이름의 한국 SF선집이 출간됐다. 박성환 작가의 표제작을 포함해 김보영, 김창규, 듀나, 윤이형 등 작가 16명의 작품이 실렸다. 미국 SF전문잡지 ‘클락스 월드’에도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소개됐다. 정소연 작가의 <옆집의 영희씨> 일본어판은 일본에서 독자들이 뽑은 ‘2019년 올해의 책’에 선정됐다.


번역출간도 줄지어 예정돼 있다.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일본 최대 SF출판사인 하야카와와 출판계약을 맺었다. 일본에서 판권계약을 두고 경쟁이 치열했고 상당히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과 대만, 영미권 국가들에서도 출간 제안을 받은 상황이다.


김보영 작가의 중·단편들은 미국 최대 출판그룹인 하퍼콜린스와 출판계약을 맺어 화제를 모았다. 배명훈 작가의 <타워>와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도 영국 출간을 앞두고 있다.


SF의 인기는 수치로도 나타난다. 출간종수와 판매량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 YES24가 집계한 자료를 보면 SF 출간종수는 2018년 64종에서 2019년 103종으로 늘었다. 2020년에도 상반기에만 49종이 출간됐고, 지난해보다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SF 판매율은 상반기(1월1일~5월24일)를 기준으로 2019년엔 전년 동기 대비 30.5%, 2020년엔 70.1%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보문고는 SF 구매 독자층을 분석한 결과 “여성이 64%로 가장 많고, 그중에서도 20대 여성이 23%로 전체 연령 중 가장 높은 비중을 보인다”고 밝혔다.


SF작가들이 콘텐츠를 발표할 수 있는 통로도 많아지고 있다. 2014년 제정된 한낙원과학소설상은 올해 7회 공모를 앞두고 있고, 2016년 시작된 한국과학문학상은 올해 4회까지 진행됐다. 판타지, 미스터리, 스릴러 등 SF와 함께 장르문학에 대한 수요가 많아지면서 관련 공모전도 늘어나고 있다. 지난 3월 진행된 ‘2020년 창비X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장르문학상’에선 박소영 작가의 SF장편 <21도씨>가 대상을 수상했다.


장르문학 전문출판사 겸 스토리프로덕션 안전가옥은 31일까지 ‘2020 메가박스플러스엠X안전가옥 스토리 공모 : 슈퍼 마이너리티 히어로’를 진행했다. 순수문학상 공모전에 냈던 응모작들에 SF적 상황을 조금 넣어 SF 공모전에 도전하는 경우도 많아졌다는 후문이다. 그만큼, SF의 인기는 뜨겁다.


장은교 기자 indi@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