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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인터뷰

‘사이코지만 괜찮아’ 잔혹동화 누가 그렸을까?

by경향신문

컨셉 아티스트 잠산 “드라마 곳곳 제 손길 안 닿은 곳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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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토일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 에서 반사회적 인격 성향을 가진 아동문학 작가 고문영(서예지)의 동화책을 실제로 그린 이는 컨셉 아티스트 잠산이다. 그는 ‘컨셉 아티스트’란 명패를 처음 내걸고 활동한 1세대 일러스트 작가다. 잠산 제공

‘…엄마는 결국 배고파 우는 아이에게 자신의 다리 한 쪽을 잘라주고 다음엔 팔 한쪽을 잘라주고 그렇게 다 주고 결국엔 몸통만 남아서는 마지막으로 아이의 품속에 스스로 들어가 자기의 남은 몸을 맡기지. 몸통만 남은 엄마를 아이가 양팔로 꽉 끌어안으며 처음으로 한마디를 해. 엄마는…, 참…, 따뜻하구나.’(<좀비아이>)


tvN 토일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각기 다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정신병동 보호사 문강태(김수현)와 아동문학 작가 고문영(서예지)이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을 열어가는 데는 문영이 쓴 동화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악몽을 먹고 자란 소년>부터 <좀비 아이>까지. 문영의 베스트셀러 동화는 흔한 그림책들과는 차이가 있다. 어둡고 잔인하며 때론 무서운, 어른들을 위한 잔혹동화에 가깝다. 반사회적 인격 성향을 가진 문영의 내면을 투영하는 소재이기도 한 이 책들을 실제로 그린 이는 컨셉 아티스트 잠산(47·본명 강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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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책은 각기 다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문강태(김수현)와 고문영이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을 열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드라마 곳곳엔 잠산이 그린 작품이 등장한다. tv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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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아이> 를 비롯해 드라마에 등장하는 동화책들은 방송 직후 실시간 검색어에도 이름을 올렸다. 드라마를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동화책인 이 책들은 실물 책으로도 발행될 예정이다. tvN 제공

“동화책은 물론 문영이 들고 있던 부채, 하다못해 출판사 회의 장면에도 제가 그린 그림들이 있으니 찾아내는 재미가 있어요.” 지난 30일 전화로 만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이코지만 괜찮아> 연출을 맡은 박신우 PD와는 전작 <남자친구>에서 호흡을 맞췄다. 그림 비중이 훨씬 큰 이번 드라마에선 곳곳에 잠산의 손길이 닿아있다. 1회에 등장한 클레이 애니메이션도 그의 컨셉 아트를 토대로 탄생했다. 잠산은 문강태와 고문영, 두 인물의 캐릭터 연구에만 꼬박 한 달이 걸렸다고 했다. “남녀 캐릭터 모두 어두운 내면과 아픔을 가지고 있지만 드러내는 방식이 달라요. 강태는 ‘남자 캔디’ 같은 느낌이 있죠.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기본적으로 착한 아이예요. 반면 문영은 방어적이고 폐쇄적이죠. 강태가 보듬어주고 싶은 낑낑대는 강아지라면, 문영은 좀 더 못된 고양이 같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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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 애니메이션을 위해 잠산이 그린 고문영 캐릭터 스케치(왼쪽)와 실제 방송 모습. 잠산 페이스북·tv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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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 애니메이션을 위해 잠산이 그린 문강태 캐릭터 스케치(왼쪽)와 실제 방송 모습. 잠산 페이스북·tvN 제공

문강태의 형 상태(오정세)의 그림도 잠산의 ‘작품’이다. 상태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발달 장애인으로,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인물이다. 잠산은 “상태의 그림을 그릴 때가 가장 어렵다”고 했다. “상태는 말이나 행동으로 남을 설득하는 건 어렵지만, 그림으로는 군더더기 없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이에요. 그림이 자기 언어인 사람. 문영의 동화책에 낙서를 덧칠해서 자기 감정을 표현하기도 하죠. 실제론 다 제가 그린 거지만, 동화책이든 상태의 그림이든 각기 다른 인물이 그린 듯한 느낌을 줘야해서 매순간 도전정신을 가지고 표현하고 있어요.”


드라마 속 동화책들은 방송이 끝날 때마다 실시간 검색순위에 이름을 올리는 등 화제가 됐다. 상업 그림을 그린 지 20년이 넘은 잠산에게도 “대중의 피드백이 이렇게 빠른 적은 처음”이라고 했다. “한 번은 클레이 애니메이션 스케치를 제 SNS에 올렸어요. 문영은 눈이 크고, 강태는 눈이 콩알만하죠. 김수현씨 팬인 것 같은데 ‘우리 오빠도 눈 좀 키워주면 안될까요?’란 댓글을 남기셨더라고요. 1회가 방송되고 몇 가지 스케치만 올렸는데 바로 반응이 오길래 놀랐어요. 아, 내가 무서운 작업을 하고 있는 거구나. 잘못하면 큰일나겠다 이런 생각을 했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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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강태와 형 상태(오정세)가 사는 집에는 상태가 그린 그림이 여기저기 붙어있다. 이 역시 잠산의 ‘작품’이다. tv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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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가 문영의 동화책에 낙서를 하는 장면. 실제로는 모두 잠산이 그린 것으로 잠산은 “ 동화책이든 상태의 그림이든 각기 다른 인물이 그린 듯한 느낌을 줘야해서 매순간 도전정신을 가지고 표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tvN 제공

잠산은 ‘컨셉 아티스트’란 명패를 처음 내걸고 활동한 1세대 일러스트 작가다. 일러스트와 컨셉 아트의 차이점을 묻자 “일러스트가 상업적 그림을 총괄하는 개념이라면 컨셉 아트는 컨셉을 따라 움직이는, 장르로 규정받지 않는 일러스트의 한 분야”라고 설명했다. “일러스터라고 하니 다들 동화책 작가로 생각하더라고요. 지금이야 컨셉 아트하면 게임 업계에서는 익숙한 용어가 됐지만, 17년 전엔 컨셉 아트를 한다고 하는 사람은 드물었어요. 장르가 아니라 컨셉을 따라 움직이고, 더 많은 걸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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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남자친구> 컨셉 아트. 잠산의 그림들은 드라마 매회 시작과 끝을 장식했다. 첫 드라마 협업이었다. tv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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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잠산이 맡았던 화장품 브랜드 홀리카홀리카 컨셉 디자인(왼쪽)과 가수 서태지 <소격동> 앨범 재킷. 잠산 페이스북

잠산의 이름은 낯설어도 그의 작품은 대중의 기억 어딘가에 남아있다. 삼성, 나이키 등 대기업 광고 일러스트를 비롯해 가수 서태지 <소격동> 앨범 재킷, 화장품 브랜드 홀리카홀리카 인테리어 컨셉 디자인 등을 맡았다. 주로 따뜻하고 화려한 색채의 그림이었다. 그렇기에 어둡고 간결한 그림이 많은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20년 작업의 ‘새로운 이정표’라고 했다. “20년을 그렇게 그리다보니 답답함도 있고 매너리즘에 빠졌던 것 같아요. 이제는 좀 명쾌하게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잔혹동화를 그려달라는 의뢰가 오니 너무 반가웠어요.”


잠산은 자신의 일에 대해 “썩은 사과를 그리더라도 먹음직스럽게 그려야 하는 직업”이라고 표현한다. “개성이 있되 공감능력도 있어야 해요. 개성은 명함과 같아요. 먹고 살기 위해선 필수인 거죠. 한편으론 프로젝트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의뢰인의 요구에 맞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예요.”


잠산의 그림이 담긴 동화책들은 7월 중순부터 실물 책으로도 발행된다. 잠산은 “개인적으로도 하고 있는 작업들을 모아 연말엔 책을 내보면 어떨까 계획 중에 있다”며 “그땐 이야기도 직접 써보려 한다”고 했다.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