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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위근우의 리플레이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 비극적 아이러니를 담아낸 위대한 속편

by경향신문

이 세계가 말하는 건 인과응보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경향신문

인간을 좀비처럼 만드는 곰팡이에 잠식당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투를 담아 ‘2013년 최고의 게임’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의 2편이 지난 6월19일 출시 이후 뜨거운 논쟁을 불러오고 있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 홍보 영상 캡처

※ 게임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에 대한 거의 모든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내 너희를 지옥 끝까지 따라가서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 게임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이하 <라오어 2>) 플레이 초반, 전작의 주인공이었던 조엘이 그에게 복수하러 온 애비 일행에게 잔혹하게 맞아 죽을 때, 그 모습을 지켜보며 울부짖던 역시 전작의 주인공 엘리에 빙의해 다짐했다. 당연하지 않나. 인간을 좀비처럼 만드는 곰팡이에 잠식당한 시대를 그린 전작에서 플레이어는 조엘이 되어 곰팡이에 면역이 있는 엘리를 갖은 고생 끝에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고, 그곳에서 엘리의 뇌를 해체해 백신을 만들려던 걸 알고 연구진과 무리를 모두 죽이면서까지 엘리를 구출했다. 그 고난을 함께한 이들에게 조엘을 위한 복수는 너무나 정당하게 느껴진다.


이후의 양상은 예상한 대로 진행됐다. 플레이어는 엘리가 되어 조엘을 죽인 이들에 대한 단서를 찾아 복수를 하기 위해 애인인 디나와 함께 시애틀로 떠난다. 엘리는 워싱턴 해방전선(이하 WLF)이라는 자경단에 속한 애비 일행을 추격하고 복수하며 애비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수집한다. 그 과정에서 조엘의 살해에 관여한 무리 중 애비를 제외한 거의 모두를 죽이고 복수를 거의 마무리하지만, 역으로 엘리의 거점에 잠입한 애비에게 불의의 기습을 당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라오어 2>는 예상했던 방향, 기대했던 방향의 정반대 방향에서 이야기를 새롭게 시작한다. 이와 함께 게임에 대한 소비자들의 분노, 더 정확히는 전작 팬덤의 분노가 시작됐다.


현재 <라오어 2>에 대한 비판의 여러 맥락들은 기본적으로 엘리와 애비가 다시 조우한 순간부터 다시 애비의 시점에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으로 소급한다. 조엘을, 우리가 이입했고 사랑했던 주인공을 잔혹하게 죽인 원흉의 시점에서 다시 해당 사건을 재구성한다는 것은 직관적으로도 불쾌하며, 아버지(엘리를 죽여 항체를 얻으려 한 의사)의 원수인 조엘을 죽인 애비의 입장도 이해하길 바라는 제작사의 의도는 너무 뚜렷해 유저로선 강요받는 기분이 든다. 문화평론가 허지웅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제작진만이 특별한 심미안과 도덕적 판단 능력으로 세상을 정화할 수 있다는 듯 행동한다. 그런 태도로 전편의 주인공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이들을 모욕하고 깔보고 조종하며 설교한다. 요컨대 교조적”이라 비판하고, 연합뉴스 ‘이효석의 게임인’도 “<라오어 2>는 플레이어에게 다시 애비의 입장이 되어볼 것을 강요”한다고 대동소이하게 설명한다. 이는 현재 유저들의 불만을 압축한다. 이것은 애비를 위한 면죄부가 아닌가? 조엘의 죽음에 대한 정당화가 아닌가? 결국 이것은 조엘과 전작을 사랑한 이들에 대한 모욕이자 배신 아닌가? 미리 말하자면, 아니다. 오히려 <라오어 2>는 위대한 전작의 엔딩에 내포된 문제의식을 외면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천착하는, 가장 어렵고 고통스럽지만 그래서 더 유의미한 길을 택한 속편이다.


전작이 훌륭했던 건, 무엇도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과연 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실존적 문제를 다뤘기 때문이다. 전작의 조엘과 엘리는 살기 위해 수많은 좀비와 또 수많은 인간을 죽인다. 이것은 처절한 생존기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모두들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누군가를 죽일 이유는 모두가 동등하게 지니고 있다. 남을 죽이고 죽이며 생존할수록, 내가 그럼에도 살아야 할 또 다른 이유를 찾는 건 더더욱 절실해진다. 여기서 생존의 문제는 실존의 문제로 전환된다. <라오어 2>에서 조엘이 실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 병원 사람들을 몰살했다는 것을 알게 된 엘리는 그냥 자신을 죽여 백신이 만들어졌다면 자기 삶의 의미는 찾았을 거라 말한다. 죽음으로 얻는 삶의 의미는 모순이 아니다. 목숨을 포기하고서라도 증명하고자 했던 어떤 가치를 나의 선택을 통해 실천하는 것, 그게 실존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조엘도 만약 그 시기로 되돌아가면 똑같은 선택을 할 거라 말한다. 이 역시 그가 선택한 실존의 무게다. 조엘의 행위가 영웅적이었다면 엄청난 윤리적 딜레마를, 고통 속에서 그럼에도 짊어지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로부터 파생될 파국적 결과까지도 감내하는 것을 뜻한다. 전작의 엔딩은 이미 불안한 미래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라오어 2>는 정확히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라오어 2>는 비판자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조엘의 선택이 또 다른 누구에겐 가해이며, 피해자의 입장에서 재구성해야만 도덕적으로 공정해진다고 말하는 게임이 아니다. 당장 게임 초반 애비와 조엘이 서로의 정체를 모르고 조우할 때, 조엘은 애비를 좀비들로부터 구해준다. 조엘이 해친 목숨에 대해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는 심플한 논리는 여기서 이미 좌초한다. 이 게임에서 심플한 건 단 하나도 없다. 비극적인 아이러니만이 있을 뿐이다. 조엘의 도움을 받아 거처까지 무사히 돌아오지만 정작 그가 자기 아버지의 원수라는 것을 알게 되는 짓궂은 운명의 아이러니. 전작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를 구하기 위해 엘리를 지켰지만, 바로 그 엘리를 구하기 위해 나머지를 죽여야 하는 그런 아이러니. 사회계약론 같은 것이 통하지 않는 야만의 시대에 개인의 의도는 항상 결과적으로 배신당한다. 엘리는 세상을 구할 수 없었고, 조엘은 엘리와 화해하지 못했으며, 애비는 소중한 이들을 지키지 못한다. 그것이 비극적 세계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운명의 우연성과 불가항력 앞에서 한 인간은 다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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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좀비처럼 만드는 곰팡이에 잠식당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투를 담아 ‘2013년 최고의 게임’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의 2편이 지난 6월19일 출시 이후 뜨거운 논쟁을 불러오고 있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 홍보 영상 캡처

논란의 핵심인 애비에 대한 플레이는 결코 그가 조엘을 죽이고 엘리와 싸우는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 그럴 이유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과, 그러니까 그래도 된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게임이 보여주는 것은 전자까지다.


엘리가 시애틀에서 애비의 행방을 쫓는 사흘 동안, 애비는 WLF와 적대관계인 근본주의 종교집단 세라파이트 소속이자 이젠 배교자로 몰려 쫓기는 야라와 레브 남매와 인연을 맺고 그들을 지킨다. 이것은 많은 유저들이 불만을 느끼듯 애비를 이해하고 그에게 공감하기 위한 장치가 맞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유저만 애비의 입장을 추체험하는 건 아니다. 애비 역시 자신이 복수한 조엘에 대한 추체험을 한다. 애비와 레브의 관계는 어느 순간부턴 대놓고 전작의 조엘과 엘리의 관계와 유사해진다. WLF는 정의며, 세라파이트는 적이라는 애비의 단순명료한 기준은 흔들리며, 어느 순간부턴 레브를 지키기 위해 WLF와 반목한다. 이것은 전작에서 조엘이 동일하게 겪었던 딜레마다. 이 딜레마를 끌어안는 순간, 어떤 과거도 자신의 현재에 대한 알리바이가 되어주지 않는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조엘을 죽이는 걸 정당화할 수 있던 애비는, 이제부턴 WLF를 배신하는 것부터 엘리를 상대하는 것까지 자신의 선택에 대한 모든 실존적 무게를 감수해야 한다. 과거에 휘둘리지 않고 지금 이곳을 산다는 건 그런 거다.


그래서 이 게임이 말하는 것은 인과응보가 아니다. 그 반대다. 어느 순간부터 애비는, 그리고 엘리는 인과의 연쇄 고리를 벗어난다. 애비는 레브를 지키는 과정에서 조엘과 엘리의 관계를 추체험하며, 다시 한 번 복수를 시도하는 엘리는 탈진 상태가 된 상태에서도 레브의 안위부터 챙기는 애비에게서 조엘과 자신을 본다. 지랄 맞은 아이러니로부터 명쾌한 도덕적 인과를 찾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물론 애비가 엘리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도 그와 디나를 살려주는 것, 게임의 마지막 혈전에서 엘리가 결국 애비를 놓아주는 엔딩에는 자신들의 복수가 더 안 좋은 결과로 이어졌던 경험이 작용한다. 하지만 이것은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으며 마음의 안식은 결국 용서가 가져다준다는 교훈”(연합뉴스)이나, “‘증오의 사슬이 끊어지는 것이 진정한 복수’와 같은 고리타분한 도덕적 메시지”(쿠키뉴스), “복수란 순환된다는 사실”(허지웅) 따위의 진부한 가르침이 아니다. 이 잔혹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에서 용서를 통한 화해나 갈등의 해소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전작의 조엘이 경험한 세계가 그러했듯, 이 비극적 세계는 오직 안 좋은 것과 더 안 좋은 것을 제시할 뿐이다. 그리고 이번 <라오어 2>는 안 좋은 것과 더 안 좋은 것 사이에서 더 안 좋은 것을 선택할 백 가지 정당한 이유 앞에서 그럼에도 그 길을 걷지 않을 단 한 가지 이유를 인물들이 어떻게 선택하는지 보여준다. 좀 더 정확히는 경험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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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니스트 위근우

피범벅이 되도록 싸운 엘리가 마지막 순간 애비를 죽이지 않은 건, 인과응보의 악연을 끊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지금 이 순간 악마가 되지 않는 길을 택한 것이다.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지만 가장 영웅적인 반항이다. <라오어 2>는 게임 초반 엘리와 우리가 느꼈던 극렬한 분노가 사실 애비 입장에선 부당한 것이니 참아야 한다고 한 수 가르치는 오만한 작품이 아니다. 그 분노가 정말 상당히 정당한 것인데, 그럼에도 그 분노에 잠식되지 않고 한 줌의 존엄을 지키는 길이 무엇일지, 혹은 있긴 한지 함께 탐구해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물론 해소되지 않은 분노를 게임과 제작진에게 기어코 쏟아내겠다면 그것을 말릴 수는 없다. 단지 나의 견고한 세계를 한 번 무너뜨리고 다시 새롭게 세우는 놀라운 경험을 놓치는 게 조금 안타까울 뿐이다.


위근우 컬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