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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플랫

“나랑 1박 할래, 아님 같이 죽을래!” 젠더 역전의 효과와 유희

by경향신문

“담에 또 튕기면 그땐 납치할 거야!” “얼른 먹고 떨어져라? 너. 먹고 떨어질게. 문강태, 나 주라.” “나랑 한 번 잘래?”

tvN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문강태(김수현)를 향한 고문영(서예지)의 대사는 남성 성희롱 논란에 휩싸이며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민원이 접수되었다. 네이버 생활 법률 뉴스에서는 “고문영 같은 인물이 실제로 있다는 가정하에” 법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아보는 포스팅을 올렸다.


저런 말을 쏟아내는 남자가 실존하다 못해 넘쳐나는 현실에서, 성폭력과 구애 사이의 ‘각’을 재는 데 실패한 그 어떤 드라마도 이렇게 민첩한 대처를 끌어내지는 않았다. 그 민감한 감수성으로 본인 입단속부터 하면 참 좋을 것이다.


집착하고 들이대는 여자 주인공과, 모두가 벌벌 기는 그이에게 유일하게 흔들리지 않는 캔디형 남자 주인공.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독특한 캐릭터와 성 각본의 역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아니 근데, 고문영이…광공이라고요? ‘광공’은 드라마 시청자들이 붙여준 고문영의 별명이다. tvN 공식 유튜브 채널과 엔터테인먼트 유튜브 채널 Diggle의 <사이코지만 괜찮아> 섬네일에도 ‘집착광공’ ‘리디광공재질’이라는 단어가 버젓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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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 의 한 장면.


개념부터 짚고 넘어가자. ‘리디’는 웹툰, 웹소설, 전자책과 만화를 볼 수 있는 플랫폼인 리디북스를 의미한다. ‘광공’은 남성 간의 사랑을 다루는 BL 장르의 캐릭터 유형으로, 대상에게 그야말로 미친 듯(狂) 집착하는 것이 특징이다. 즉 리디광공은 ‘리디북스’에서 제공되는 BL 장르에서 자주 보이는 ‘집착형’ 남자 주인공이다.


BL이 아니라도, 우리가 지금까지 봐온 로맨스에서 남자 주인공은 대부분 광공의 면모를 띤다. 빼어난 외모와 경제력을 갖추었으나 진정한 사랑에 눈뜨기 전에는 차갑고, 고독하며, 인간미라고는 없다.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강타했던 ‘광공의 조건’을 살펴보면 조선 시대 세자빈 간택만큼이나 까다로운 관문이 기다린다. 광공은 널따란 집에 황량한 인테리어를 해놓고 혼자 살아야 한다. 포도당과 에비앙 생수가 주식이고, 추워도 전기장판이나 패딩을 사용할 수 없고, 두통은 돼도 복통은 안 된다. 인간이 하기 마련인 자연스러운 행동들이 광공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얼어 죽어도 ‘멋’있어야 하니까!


이쯤 하면 눈치챘을 것이다. ‘광공’은 여성의 욕망과 판타지를 극한까지 밀어 올린 일종의 물체이다. 성적 대상화는 주체가 대상을 성적인 목적의 도구로 ‘물화’하는 것으로, 인물의 개별성이나 존엄성, 맥락을 모두 삭제한다. 물화된 대상은 타자화되어 오로지 주체의 욕망에만 부응한다. 여성 독자들의 엄격하고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하여, 그들이 보고 싶은 요소만을 부여하고 모든 인간적인 면을 탈각시키면? 주문하신 광공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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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 의 한 장면.


여성의 욕망과 판타지를 압축한 에센스인 광공 타이틀을, 여주인공인 고문영이 땄다. 소위 ‘주체적이고’ ‘쎈’ 캐릭터는 많았지만 광공의 수준까지 이른 것은 처음이다. 고문영은 말한다.


“내 눈에 예쁘면 탐이 나는 거고. 탐나면 가져야지. 돈 주고 사든, 몰래 쌔비든. 억지로 빼앗든. 가지면 그만 아냐?”


상대를 물건처럼 여기는 고문영의 태도는, 당연히 윤리적 측면에서 옳지 않다. 그런데도 고문영은 매력적이고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인기를 끈다. 여성은 보기 좋은 떡을 만들고자 인간을 늘리고 자르고 조이는 폭력에서 언제나 대상이자 타자였다. 그러니 여성이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누군가를 대상화하는 행위가 젠더 역전의 충격과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 드라마가 로맨스 향유의 즐거움을 확장한다는 해석을 덧붙이고자 한다.


에바 일루즈는 <사랑은 왜 불안한가>에서 사회학자의 관점으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분석한다.


“불평등 또는 보호하는 남자와 이에 의존하는 여자가 맺는 관계는 서로의 역할을 ‘분명히’ 이해하는 편안한 측면을 의심할 바 없이 자랑한다. 반대로 평등은 원래부터 혼란스럽다. 평등을 기본전제로 깔면 역할 분담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갈등이 불거진다”(82쪽).


차별금지법도 없고 ‘포괄적 차별금지법 반대 서명’이 10만명을 넘는 현실은 여전히 남루하다. 그러나 차마 ‘차별에 찬성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차별금지법에 반대’한다는 애매한 이중부정을 쓸 만큼, ‘평등’이 옳다는 데에는 다들 원론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평등은 원래 혼란스럽다는 고찰은 흥미롭다.


에바 일루즈에 따르면 각자의 욕구와 권리의식을 강화하는 평등은, ‘강한 감정적 접착성’을 만들어주는 불평등에 비해 갈등을 빚는다. 또한 전통적으로 규정된 역할과 정체성이 있는 불평등과 달리, 이를 허물어 ‘소통’을 통해 협상해야 하는 평등은 번거롭고 귀찮다. 결국 협상과 선택에 지친 현대인이 로맨스에서 불평등을 갈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광공과 집착이 맛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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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이 친밀한 관계를 맺는 만큼 로맨스에는 당연히 협상과 소통이 필요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관계가 그렇다. 그러나 인간에게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이 주어진 역사는 짧다. 한국 사회는 서로를 존중하며 대화하고, 시간과 비용이 따르더라도 합심하여 갈등을 해소하는 법을 모른다. 어디서도 가르쳐주지 않으며, 참고자료도 부족하다. 물리적으로는 때리고, 위계로는 찍어 누르며, 감정적으로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밀어붙인다. 이 방식은 빠르고 편리하며 ‘늘 그렇게 해온 것’이기까지 하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절대 단순하지 않으며 필연적으로 울퉁불퉁하다. 걸리적거리는 것은 무엇이든 ‘나중에’로 밀어두고 매끈하게 질주해서는 안 된다. 판타지에서는 편리함의 달콤함을 꿈꿀지언정 현실에서는 이러한 수고와 번거로움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익숙해져야 한다.


그러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흥행이 “보호받고 싶다는 희망과 안정적인 감정 결속을 이루고 싶다는 갈망은 오늘날 많은 여성이 페미니즘에 갖는 반감을 고스란히 반영”한다는 에바 일루즈의 진단엔 동의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갈망하는 것은 현실과 분리된 판타지의 영역에서 편안함과 매혹을 즐기고 싶은 ‘유희’의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인간의 욕망은 반드시 정치적으로 올바르거나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않으니까.


평등한 존재로 살아가고자 하는 투쟁하면서도, 압도적인 존재에게 휘둘리거나, 완전히 지배하고 싶다는 상상을 할 수 있다. 반대로, 불평등한 로맨스를 좋아한다고 현실의 차별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폭력이 너무 분명한데도 그 세계관에서 폭력이 아닌 양 다루어질 때, 그리하여 현실의 문제를 은폐할 때가 정말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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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 의 한 장면.


예를 들면, <김비서가 왜 그럴까>에서 비서가 혼자 사는 집에 부사장이 밤늦게 찾아오는 장면을 드라마는 낭만적으로 연출했다. 반면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젠더 역전을 통해 안전한 스노 돔 속에서 판타지의 날개를 펼친다. 드라마에는 폭력적인 구애와 무리수가 난무하지만, 허구임이 명백하기에 마음 편히 즐길 판이 깔린다. 시청자가 이입할 선택지도 넓어진다. 카리스마 넘치는 ‘광공’이 되어 사랑을 밀어붙이는 짜릿함을 맛볼 수 있고, 끌려가는 문강태가 되어 먹고살기 바쁜데 관계까지 머리 굴려야 하는 피로를 잊을 수도 있다. 너무한가 싶을 때쯤 실존하는 권력이 어느 정도 ‘매운맛’을 잡아준다. 고문영이 일방적으로 신체 접촉을 시도해도 문강태가 완력으로 이를 차단하는 식이다.


현실과 단절된 허상의 재미는 9화에서 고문영이 차를 몰며 “나랑 1박 할래, 아님 같이 죽을래!”라고 소리 지를 때 극대화된다. 2004년 방영되었던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장면을 패러디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로맨틱하게 연출되었으나 이제는 누구나 그것을 ‘데이트 폭력’이라고 인식한다. 고문영의 폭주는 캐릭터의 과장된 행동이자 극중 에피소드에 머물고, 원작의 폭력성을 전복한다. 로맨스와 폭력을 뒤섞어 버리는 세상에서는 판타지를 즐기는 데도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이것은 정해진 시간 동안만 펼쳐지는 쇼(Show)고,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이 영화에 나온 동물들은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라는 자막 같은 약속.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그러한 합의를 바탕으로 독특하고 새로운 로맨스의 ‘맛’을 보여준다. 이 유희가 새로운 욕망의 발견과 관계의 확장까지 뻗어 나가기를, 기대한다.


이진송 계간홀로 발행인

플랫팀 기자 twitter.com/flatflat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