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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책과 삶

닮고 싶은…천의 얼굴, 철의 배우

by경향신문

경향신문

퀸 메릴

에린 칼슨 지음·홍정아 옮김

현암사 | 416쪽 | 2만원


배우 문소리가 시나리오, 메가폰을 잡고 주연도 맡은 2017년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에서 문소리는 “힘들면 뭐라도 줄여요”라는 남편 말에 이렇게 답한다. “시어머니도 하나고, 애도 하나고, 작품도 일년에 해봐야 한 작품 하는데 뭘 줄여요, 내가?”


“그럼…술이라도 줄여요.” 이어진 남편의 말은 이 영화의 웃음 포인트로 남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유독 여성 배우의 설 자리가 줄어드는 현실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게다가 그는 한국에서 ‘트로피 개수만큼은 메릴 스트리프 부럽지 않은’, 배우 문소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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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릴 스트리프는 평범함을 벗어난 다양한 여성 인물들을 연기했고 그것이 자산이 됐다. 지난 40여년간 뛰어난 배우로 자리매김한 그는 지금도 자신만의 신화를 쓰고 있다. 마거릿 대처로 분한 영화 <철의 여인> 으로 세 번째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메릴 스트리프(아래 왼쪽 사진)와 <철의 여인> 속 한 장면(오른쪽). UPI·로이터 연합뉴스, 필라멘트 픽처스 제공

중년의 이름으로 더 빛나는 천생배우 40여년

전형적 역할 넘어 변화무쌍 여성 캐릭터 연기

나이·외모 편견에 맞서 소신 발언도 마다않고

후배의 길 비추는 별이 되기까지 치열한 생존기


메릴 스트리프도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2010년이 되면 영화 속에서 여자 배우는 아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겠어요.” 1990년, 마흔이 된 메릴 스트리프는 미국배우조합의 여성회의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에서 여성의 비중이 29%까지 떨어졌다는 통계를 들며 한 얘기였다. 메릴 스트리프는 당시에도 이미 최고의 배우 자리에 올라 있었지만, 마흔이 된 그해 마녀 역할만 3개가 들어온다. 모욕감을 느낀 그는 말한다. “여성의 인생에서 가장 활기 있는 시기잖아요. 너무나 오랫동안 영화 산업에서 여성은 매력적이거나 결혼하고 싶거나 성적 충동을 일으키는 존재여야만 했어요.” 그가 연설했을 때 극장가는 줄리아 로버츠가 순진무구한 ‘콜걸’로 등장하는 영화 <귀여운 여인>이 휩쓸다시피 했다. 메릴 스트리프는 “영화만 보면 지구상에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직업이 그저 남자와 같이 자는 것인 줄 알겠다”고 꼬집어 <귀여운 여인> 팬들의 눈 밖에 났다.


<퀸 메릴>은 메릴 스트리프 연기와 삶을 다룬 책이다. AP통신 등에서 엔터테인먼트 담당 기자로 일했던 저자 에린 칼슨은 유명 배우의 화려한 성공담만을 그리지 않는다. 배우이자 여성,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메릴 스트리프가 고민을 거듭하고 결정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 그가 세계적인 배우가 되기까지 견지해온 삶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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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얼굴을 지녔다’는 평을 들었던 메릴 스트리프였지만, 중년에 접어들 무렵 그의 낙담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동료 배우들이 사라졌다. 1980년대 전성기를 함께 누린 제인 폰다는 1990년대 초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같은 배우여도 남성과 여성에게 나이듦의 의미는 달랐다. 영화 <펀치라인>에서 톰 행크스의 연인 역할을 했던 샐리 필드는 6년 뒤 겨우 마흔일곱 나이에 <포레스트 검프>에서 톰 행크스의 엄마 역할을 맡는다. 메릴 스트리프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로부터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출연을 제안받는데, 제작사인 워너 브러더스는 그의 나이가 많다며 캐스팅을 고민했다. 그때 남자 주인공 이스트우드는 예순네살이었고, 메릴 스트리프는 그보다 스무살이 어렸다. 여성 배우에게 유독 할리우드의 시계는 빨리 돌아갔다.


하지만 메릴 스트리프는 자신만의 속도로 연기했고, 70대가 된 지금까지도 관객이 찾는 배우로 활발하게 연기하고 있다. 그가 ‘여자 배우가 사라질지도 모르겠다’고 했던 2010년에 그는 사라지지 않고 마거릿 대처 역에 캐스팅됐고, 이 영화 <철의 여인>으로 예순세살 나이에 세 번째 아카데미 트로피를 거머쥔다. 그리고 많은 여성 후배들에게 다양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책은 1976년 신인 배우였던 메릴 스트리프가 영화 <킹콩> 오디션을 보러 갔다가 “진짜 못생겼네. 뭘 이런 걸 데려왔어?”라며 이탈리아어로 불평한 제작자 말을 받아친 후 자리를 박차고 나간 일화부터, 이후 40여년간 60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겪은 우여곡절과 영광의 순간들을 그린다. 그를 평가절하한 이들 중엔 도널드 트럼프를 포함해 수많은 여성 혐오자들이 있었지만, 메릴 스트리프는 정치적 논란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펼쳤고 저급한 공격에도 우아하고 당당하게 맞섰다. 저자는 “여성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사랑받지 못하는’ 여성 캐릭터가 훨씬 더 좋았던” 메릴 스트리프가 여성 배우에게 요구되는 전형적 역할이 아닌 다양한 도전을 계속했기에 지금의 ‘퀸 메릴’이 있다고 말한다. 한 여성 배우의 치열한 생존기이자,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이야기도 흥미롭게 읽힌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