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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코로나 시대 여행작가 ‘환타’ 전명윤이 사는 법

by경향신문

뒷산에 오르죠, 숲의 소리를 듣죠...잊고 지냈던 ‘감각의 여행’을 만나죠


7월까지 수입 거의 없어

재정상태 떠올리면 슬프지만

하늘 맑은 봄 누렸으니…


실연 후 떠난 인도가 인연

그 곳서 머문 기간만 5년6개월

첫 가이드북 내고 인기 얻어


가이드 중에 나 하나쯤은

리조트나 연예인 화보 아닌

다른 얘기 해도 되지 않나 싶어

그 나라 역사·시사 빼놓지 않아


경향신문

환타 전명윤씨는 코로나19 이후 일상에서 다시 여행의 가치, 여행자의 감각을 깨달았다고 한다. 동네 주변 뒷산을 자주 찾는다.
눈을 감은 채 거닐며 생명과 사물의 의미를 새삼 느낀다고 말했다. 김종목 기자

전명윤씨(필명 환타)가 옷장에서 인도 전통 의상 쿠르타를 꺼내 입더니 동네 뒷산에 오르자고 했다. 환타라는 여행작가, 여행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게 무엇인지, 코로나19 사태 이후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관한 응답이었다. 전씨가 지난 16일 나를 이끈 곳은 경기 용인시 아파트 주변 뒷산인 ‘샘골근린공원’이다. 코로나19 이후 자주 온다고 했다. 여행하는 삶은 곧 여행이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오는 삶이라 여겼다. 코로나19는 일상의 삶을 더 절실한 것으로 만들었다.


“한번은 바람이 불길래 눈을 감았어요. 눈을 뜨면 새소리는 ‘소음 막’을 형성하죠. 감으면 뻐꾸기 소리, 까마귀 소리가 따로따로 귀에 들어와요. 바람에 나뭇잎이 서걱거리는 소리까지 들리죠.” 코로나19 이후 일상에서 미시적인 것들 덕에 “감각의 세계를 더 알게 됐다”고 말한다.


코로나19 일상의 의미, 여행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해준 건 2016년 홍콩에서 만난 연인에 관한 기억이다.


“인도에서 40일 여행하고 홍콩에 온 분들이었어요. 엘리베이터에서 아는 체하길래, 다음날 딤섬 식당 취재에 함께 갔어요. 여자분이 시각장애인이었는데, 그 시끄러운 식당에서도 웃으며 여행을 즐기더라고요. 남자분한테 물어봤죠. 그랬더니 ‘눈 한번 감아보실래요’ 하더라고요. 이들은 ‘소리로, 냄새로 하는 여행’을 하고 있었던 거죠. 잊고 지내다 요즘 다시 두 분이 떠올랐어요.” 해외여행을 다시 갈 날이 오면, 시각장애인과 함께 가는 여행을 준비하려 한다.


코로나19 이후 글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힘들어졌다. 해외여행 작가들도 직격탄을 맞았다. 전씨도 올해 1~7월 수입이 거의 없다. 지난해 7월 출간한 에세이집 <환타지 없는 여행>(사계절)이 최근까지 매달 300부가량 나가지만, 생계에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좋아진 게 있다고 한다.


“봄이오. 봄은 여느 해보다 길었고, 하늘은 너무 맑았고요. 20~30년 전에도 이랬나? 이렇게 맑은 봄날을 다시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코로나19로 인간의 움직임이 멈추면서 환경이 좋아진 게 사실이니까요. 몰론 재정 상태를 떠올리면 슬프지만….”


전씨는 낙관적이었다. “긴축재정하면 내년 봄까지 벌이가 없어도 살 수 있다”며 웃었다. ‘환타 전명윤’ 하면 인도를 빼놓을 수 없다. 아내 김영남씨와 함께 2003년 낸 첫 가이드북 <인도 100배 즐기기>와 후속작 <프렌즈 인도 네팔>이 최근까지 총 10만부 이상 나갔다. 1999년 만나 2001년 결혼했다. 그는 “결혼 축의금 들고 튀어서 여행하고, 가이드북을 냈다”고 말한다. 결혼 축의금 말고는 가족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살아왔다고 한다. ‘가이드 업계’에서 나름 성공했다. “그게 낙관의 힘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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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윤씨는 당카르 곰파가 있는 스삐띠 계곡이 진짜 오지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기억에 더 남는다. 음성통화도 안 되는 땅에서 여행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대화한다. 전씨 제공

인도로 여행온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유명인이다. 인도 여행자들의 필독서였기 때문이다. 수염 때문에 알아보는 사람도 많았다. “전유성씨와 바라나시의 어떤 식당에 함께 있었는데, 저한테 사인을 받더라고요.”


20대 초반 거식증에 걸릴 정도로 아팠던 실연의 고통이 없었다면, 지금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실연이라는 상처와 불교라는 가르침이 인도로 이끌었다. 인도 첫 여행 이후부터 제 삶을 살고, 제 갈 길을 간다.


“여자친구 집에서 저희 집안을 뒷조사하더라고요. (결손가정이라고) 못 사귀게 하고, 3년 버티다 나가떨어졌어요.” 인도철학을 전공하던 후배가 “인도나 가보라”며 던져준 책이 법정의 <무소유>였다. “‘그 사람을 미워해봐야 미워지는 건 네 마음’이라는 메시지를 읽었어요. 너무 참신했죠.”


방위 소집이 해제되고 여권을 발급받자마자 인도로 떠났다. 1996년 12월16일이다. 인도에 머문 기간만 5년6개월가량 된다. 인도가 주 취재지가 된 건 별 계기가 아니었다. 1999년 인도에서 터키까지 육로로 넘어간 뒤 국제버스를 타고 오스트리아 빈으로 갔다. 인도에서 한 달간 살 돈이 빈에서는 하루치 생활비였다.


물론 물가 때문만은 아니다. “편치 않더군요. 인도에서는 어떤 몰골을 하고 다녀도 제 자리가 있었지만, 유럽은 웬걸요. 차림새가 나의 계급이 되더라고요. 외려 카스트의 나라 인도에서는 자유로웠는데….” 눈이 마주치면 웃어주는 인도 사람들도 좋았다. 인도 사람이 다 된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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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투르툭은 중국과 국경분쟁이 벌어지는 곳이다. 전명윤씨는 살구 따는 여성들 모습을 보면서, 분쟁에도 이어지는 삶의 강건함과 존엄을 느꼈다고 한다. 전씨 제공

“2015년 뉴델리 지하철에서 양복 입은 인도인과 눈이 마주쳐 씨익 웃었더니, 그 사람이 ‘날 보고 웃나’ 하고 두리번거리더군요. ‘아 내가 인도 사람이고, 저 사람이 한국 사람이구나’ 같은 생각을 하며 잠시 멍했어요.” 전씨는 인터뷰 때 무엇인가를, 누구인가를 비판한 뒤엔 반성적, 성찰적으로 자신을 되돌아보려 했다. “다들 좋은 전통이든, 나쁜 전통이든 추억들을 갖고 살고, 그 추억 때문에 망하는 사람들 많은데, 저도 그런 사람인 거죠.”


전씨의 가이드북, 여행기는 독특하다. 그 나라 시사나 역사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그는 여행과 관광을 구분한다.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는데, 이성의 외모에 한눈에 반하는 게 관광이라면, 속내도 보는 게 여행인 거죠. 그 나라 역사가 무엇인지, 그 나라 사람들 현실 고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죠. 제 기준으로 온전하게 그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인도네시아 발리를 예로 들었다. 발리를 검색하면 리조트와 여성들이 주로 뜬다. 뉴스 사이트엔 유명인들의 비키니 화보 같은 게 이어진다. “1960년대 인도네시아 대학살 때 공산주의자, 화교로 간주된 발리 사람 8만명이 군부 손에 죽었어요. 420만명이 사는 곳에서요. 가장 많은 비율로 죽었죠.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진 뒤에 나온 사람들은 ‘배경’이 아니라 그런 역사와 아픔을 지닌 ‘사람’이죠.” 리조트행을 두고 전씨는 “여행은 기쁨만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여행작가 중) 저 하나는 다른 이야기 해도 되지 않나요”라고 되물었다.


‘환타(幻打)’는 ‘환상 타파’의 약자다. 여행관을 반영한 필명이다. 행복지수 1위라는 부탄의 자살률이 세계 20위이고, 자살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가정폭력이며, 남녀평등지수가 세계 117위라는 점도 아울러 살핀다. “코로나19가 끝나 여행자들이 돌아오면 반딧불이도, 히말라야 풍경도 곧 사라지지 않을까. 우리가 회복하려는 자연환경은 여행자들이 없어야 가능한 세상이잖아.” 이런 고민도 하고 산다.


전씨에게 가이드북은 “여행기 탈을 쓰고, 그 지역의 시대와 현실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그는 또 공부하는 여행자다. 첫 책 <인도 100배 즐기기>는 취재에 14개월, 집필에 12개월 걸렸다. 인도 여행 때 한국어로 된 인도 관련 책은 두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어 히스토리 오브 인디아>를 읽으며 정리했다. 한때 그는 시사나 미식을 다룬 매체 구독료로 한 달에 600~700달러를 썼다고 한다. 비싼 잡지들이 애플 뉴스 플러스로 들어온 덕에 비용을 줄였다.


고교 시절부터 시사 문제에 눈을 떴다. 순복음교회를 다녔고, 순복음신학교를 가려 했다. 고등학생 때 향린교회 청년부 교재인 ‘해방공동체’라는 책을 보고 ‘해방신학’을 접했다. ‘혁명적 예수’에 감명받았다. 고2 때 서울민통련에서 주최하는 ‘민주통일시민학교’에도 참여했다. 당시 수서비리 규탄 집회에 나가곤 했다. 종씨인 전두환이 집권하자마자 족보를 양장본으로 만든 집안에선 큰 일탈이었다.


여행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 “한국 식민지 경험을 이야기하면 치를 떨던 사람들도 인도 철도를 보며 ‘영국놈들이 이 정도로 해놨으니, 인도가 이만큼이라도 살지’ 그래요. 태국 콰이강의 다리를 보고도 ‘전쟁과 평화’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비슷한 소리들을 하고요. 다들 식민지의 고통을 안고 사는 곳인데도요. 우리만 탄압받았다는 관점으로 저렇게 이야기해요.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하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에 가선 그 식민지 근대화론의 틀로 그 나라를 바라봅니다.”


전씨 집에선 인도의 신 비슈누가 그려진 걸개 그림 아래 테이블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맞닿은 부엌 찬장에는 정향이나 카르다몬, 가람마살라 같은 인도 향신료가 가득했다. 여행지에서 사온 것들이다. 현지에서 ‘먹고 또 먹고’ 한다. 홍콩에서 하루 여덟 끼씩 먹다가 당뇨가 온 적도 있다. 위를 주체 못하는 대식가가 아니다. 취재 때문이다. “한국인의 입맛 기준으로 맛없다, 짜다, 구리다 하면 ‘프로 반찬 투정러’밖에 안 되죠.” 그는 취재 때 요리를 배우려 한다고 했다.


그 나라 역사를 배우는 일이다. “인도 서부 고아에 가면 빈달루라는 카레가 있어요. 식초를 넣은 카레죠. 고아 지방은 15세기부터 포르투갈의 오랜 지배를 받았어요. 포르투갈인들이 와인을 갖고 희망봉을 돌아 왔는데, 그 와인이 시어버리자 버렸고, 그걸 인도인들이 카레에 넣은 거죠. 그 나라 음식만 갖고도, 그 나라 시사나 역사를 커버할 수 있죠.”


“여행은 우연”이라고 했다. 홍콩에서 유명 맛집에 들러 나온 뒤 사진 촬영을 하다 골목 시장에서 한 포장마차에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걸 봤다. ‘갈비덮밥’집이었다. “좋은 데는 일정에서 벗어났을 때 나오는 경우가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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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튜브 채널을 개설한 전명윤씨가 방송에 내보낼 자료를 검토하고 있다. 김종목 기자

전씨는 최근 유튜브 채널 ‘여행의 교양’을 개설했다. 인도와 중국 국경분쟁, 홍콩 시위 같은 국제 뉴스를 주로 다룬다. 시위가 한창이던 2019년 취재 목적으로만 2번을 다녀왔다. “떠드는 걸 좋아해서요. 창구가 필요했죠.” 이게 다는 아니다. “국경분쟁 같은 사안을 길게 풀어내는 매체가 없어요.” 전씨 작업실 컴퓨터 모니터엔 홍콩 송환법 사태를 촉발시킨 살인범 찬퉁카이의 영문 판결문이 떠 있었다.


전씨는 늘 여행작가, 여행자이려고 한다. 가이드북이 성공하면 여행사를 차리는 이들도 꽤 있다. 돈이나 사업에 관심을 둔 적은 없다. 집과 차가 없는 대신 선택한 자유로운 삶을 포기할 생각도 없다. “이상한 허세나 ‘가오’가 있어요. 책으로 먹고사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현재까지는 빚 안 지고 사니까….”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