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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여성, 정치를 하다 (8)

전쟁·불의에 맞서라…팔순 앞두고도 광장 못 떠나는 포크 전사

by경향신문

존 바에즈

경향신문

존 바에즈는 평화와 인권운동에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80세를 앞둔 현재까지도 자신의 정치적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사진은 2011년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에서 노래하는 바에즈의 모습.

아버지 직장 따라 여러 나라 전전

미국 돌아와선 이방인 차별 ‘상처’

자신의 존재 증명 위해 노래 몰입


“나는 노래한다, 나는 싸운다, 나는 운다, 나는 기도한다, 나는 웃는다, 나는 일하고 경탄한다. … 나는 당신들에게 간단하게 말해 주겠다. ‘포크 가수 존 바에즈’ 같은 건 없다고. 내가 있을 뿐이다. 스물여덟이라는 나이에 임신 중이며, 징집을 거부하고 저항 운동을 조직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이제 막 3년의 형기를 시작한 남편을 가진 나. … 베트남, 비아프라, 인도, 페루, 미국에서 죽어 가는 아이들을 생각하는 나. 이 모든 와중에, 내가 어떻게 당신들을 즐겁게 해주는 척만 할 수 있단 말인가?”


1963년 8월28일, 존 바에즈는 35만명이 모인 워싱턴 집회의 역사적인 현장에서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선창(先唱)했다. 마틴 루서 킹이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외쳤던 날, 존 바에즈는 노래를 불렀다. “엄청난 날”이었다. 연설과 노래가 변주곡처럼 이어졌다. 존 바에즈는 스스로를 칭찬했다. “내 마음에 걸린 훈장들 가운데 하나는 내가 그날 그 자리에서 노래했다는 이유로 나 자신에게 수여한 것이었다.” 존 바에즈는 그날의 감동을 “내 머리 위로 자유를 보았다”는 말로 대신했다.


사실 1961년 미국 남부에서 첫 콘서트를 가졌을 때만 해도, 존 바에즈는 “시민권 운동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그저 관객들이 모두 백인들이라는 점이 의아할 따름이었다. 존 바에즈는 공연장에 흑인들이 출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부끄러웠고, 또 화가 났다. “그다음 여름 나는 만약 흑인들이 공연장에 들어오는 게 허락되지 않는다면,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는 내용을 계약서에 명기했다.” 그러나 계약 내용이 달라진 이후에도 남부에서 열린 콘서트에 흑인들은 오지 않았다. “그들은 나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존 바에즈는 1962년 남부 지역 흑인 대학들과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투어 계획을 세웠다. 앨라배마주의 버밍햄에서 마틴 루서 킹 목사를 처음 만났다. 비폭력 시민불복종 운동을 호소하는 그의 연설을 들으며 존 바에즈는 전율을 느꼈다. 마치 새로운 창법의 노래를 듣는 것만 같았다. “북쪽에서 온 백인” 가수 존 바에즈는 흑인 청중 앞에서 고민했다. “나는 내 음반에 실린 깨끗한 백인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시위 현장에서 운동가들과 동고동락했다. 음악을 정치에 예속시키지 말라고 훈수를 두는 사람들에게 존 바에즈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저는 정치적인 활동을 할 때 가장 행복해요. 음악은 두 번째입니다.” 순서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그에게 노래와 정치는 단 한 순간도 분리된 적 없었다.

1941년,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존 바에즈는 어린 시절 2~3년에 한 번꼴로 이사를 다녀야 했다. 핵물리학자였던 존 바에즈의 아버지는 방위산업체가 제안한 높은 연봉을 거절하고 반전운동가로 활동하며 여러 대학의 연구소를 옮겨 다녔다. 존 바에즈는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초등학교 6학년을 보냈다. “바그다드는 사회 정의에 대한 나의 열정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준 곳이다.” 공항에서 거지를 내쫓기 위해 곤봉을 휘두르는 경찰들을 보며 존 바에즈는 “경악”했다.


아버지가 캘리포니아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존 바에즈는 1951년 미국으로 돌아왔다. 캘리포니아 남부 지역의 중학교에 진학했다. 여전히 이방인으로 차별을 받았다. 멕시코 출신인 아버지를 닮은 존 바에즈는 여름이면 얼굴색이 더욱 짙어졌다. 백인 친구들은 존 바에즈를 흑인이라고 부르며 따돌렸다.


멕시코계 친구들은 존 바에즈가 “에스파냐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존 바에즈가 맞닥뜨린 문제는 “인종”과 “언어”뿐만이 아니었다.


존 바에즈 가족은 195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시절의 미국에서 … 무기를 두려워하고 그것에 반대했다”. 존 바에즈가 수업 시간에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자, 교사와 학생 모두 일제히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졸지에 위험인물로 낙인찍힌 존 바에즈는 기피 대상이 되었다. 학교에서 친구를 사귈 수 없었고, 공부에도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존 바에즈는 노래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장기자랑대회’에 나가 상을 받고 싶었다. “내가 내 목소리를 개발하게 된 것은 고립의 느낌, ‘다름’의 느낌 때문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노래하는 사람의 심정을 존 바에즈는 누구보다도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상을 받기 위해 시작한 음악 공부에 존 바에즈는 점차 몰입해간다.


존 바에즈는 제대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1956년 처음으로 기타를 구입했다. 195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진로를 결정했다. 그녀는 자신의 노래를 녹음해서 여러 음반회사에 보냈다. 보스턴대학교에 입학했지만, 6주 만에 그만뒀다. 음반회사에서는 답이 없었지만, 존 바에즈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959년 포크 음악 ‘클럽 47’서 데뷔

상업적 성공 속 무언가 ‘결핍’ 느껴

킹 목사 만난 계기 정치활동 첫발


1959년, 보스턴 케임브리지의 포크 음악 클럽인 ‘클럽 47’에서 존 바에즈는 정식으로 데뷔한다. 시카고의 포크 클럽인 ‘게이트 오브 혼(The Gate of Horn)’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더 넓은 무대를 원했다. 적극적으로 기회를 찾아 나섰다. 1959년 7월11일 열린 제1회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존 바에즈는 밥 깁슨의 백업 보컬로 노래를 불렀다. 음반회사 뱅가드는 존 바에즈에게 12년 계약을 제안하며 앨범 제작을 추진했다. 대중은 존 바에즈의 노래를 사랑했다. “나는 음반 <존 바에즈>가 전국 100대 베스트셀러 음반에서 3위로 비상하는 것을 놀라움 속에서 지켜보았다.” 코카콜라 광고도 들어왔다.


그러나 존 바에즈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듭할수록 자신의 음악 생명이 오히려 단축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언론에서는 “반항적이며 비주류파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반(反)문화의 여걸”로 존 바에즈를 호명했지만, 그녀 자신은 하루하루 증폭되는 불안과 싸워야 했다. “정신과 상담 시간을 곱절로 늘렸다. 점점 늘어나는 압박을 해결하기 위해 일주일에 네 번 상담을 받은 적도 있었다.” 다양한 시민운동 단체에 아낌없이 후원금을 보내면서도 결핍감에 시달렸다.


존 바에즈는 자신이 왜 노래를 부르는지 절실한 심정으로 스스로에게 이유를 물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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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바에즈는 가수이자 인권운동가로 평생 광장을 떠나지 않았다. 왼쪽 사진부터 1963년 가수 밥 딜런과 워싱턴에서 열린 인권 행진에 참여해 노래하는 존 바에즈, 1973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공연 모습, 1984년 함부르크에서 밥 딜런(왼쪽)·카를로스 산타나(오른쪽)와 함께 공연하는 바에즈.

“문제 외면하면, 음악은 소용없다”

반전·정치적 양심수 등에 목소리

한평생 ‘진심 담아’ 평화·인권 노래


“나는 음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존 바에즈는 “이 시대가 던지는 가장 중요하고도 현실적인 물음, 즉 어떻게 하면 인류가 서로 죽이는 일을 그만두게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살육을 막기 위해 내가 평생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외면한다면, 아름다운 음악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했다. “나는 내가 영원히 무식한 사람으로 남기를 원치 않았다.” 1965년, 존 바에즈는 켈리포니아 카멜밸리에 ‘비폭력연구소’라는 학교를 세웠다. 지역에서 서점을 운영하며 반전운동가로 활동 중이던 친구 로이 케플러에게 운영 전반에 걸쳐 도움을 받았다. 비폭력 저항 운동에 관심 있는 시민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수강료를 ‘최소화’했다. 국제정치를 공부할수록 존 바에즈는 평화에 대한 원칙이 더욱 확고해졌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는 모순적인 사고가 미국 사회에 팽배해 있었다. 그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존 바에즈는 1967년 베트남전쟁 징집 반대 운동을 주도하다가 10일 동안 투옥되었고, 이듬해인 1968년에는 징집 반대 운동의 주역인 데이비드 해리스와 결혼을 발표한다. 1971년 데이비드 해리스가 석방될 때까지, 존 바에즈는 징집 반대 운동 단체 운영은 물론이고 육아와 가수 활동을 병행했다.


1972년 존 바에즈는 어려운 결정을 내린다. 직접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했다. 크리스마스에도 폭격이 벌어지는 베트남전의 참상을 목격하며 열흘 넘게 방공호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존 바에즈가 베트남에서 좌절만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내 노래가 군대를 떠날 수 있게 용기를 주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군 복무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위안이 되어 주었다고 하더군요.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내가 그분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낍니다.” 화려한 무대 위에서 박수를 받을 때도, 엄청난 액수의 돈을 벌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보람과 용기를 얻자, 존 바에즈는 인권 문제에 더욱 깊이 개입한다.


같은 해 존 바에즈는 전 세계의 정치적 양심수들의 석방을 추진하는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의 미국 서부 해안 지부를 조직하는 데 “인생에서 1년을 떼어” 헌신했다. 칠레의 민주화가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큰 시련을 겪던 1974년에는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한 ‘반발’과 ‘저항’의 의미로 ‘에스파냐어’로 노래를 녹음했다. 존 바에즈의 앨범은 칠레에서 “<인생이여, 고마워요!>”로 발매되었다.


한편, 소비에트 시절 지하출판물을 제작하며 반정부 지식인으로 활동하다 정신병원에 강제 수감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인권 운동을 선도한 나탈리아 고르바네프스카야를 위해 존 바에즈는 1976년 ‘나탈리아(Natalia)’를 발표했다.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테러 협박에 시달리는 나탈리아를 존 바에즈는 자신의 노래로 지켜주고 싶었던 것이다. 1979년, 베트남 난민 지원을 위해 지미 카터 정부를 끈질기게 설득한 존 바에즈는 결국 미국 정부의 협조를 얻어냈다.


존 바에즈는 평화와 인권 운동에 아직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1993년, 그녀는 사라예보 내전 현장에서 방탄조끼를 입고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다. 2011년에 월가 점령 시위대 앞에서도 70세의 존 바에즈는 기타를 메고 노래를 불렀다. 자신에게 가장 큰 재능은 “목소리 덕분에 얻은 수확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욕망”이며, 그 재능 덕분에 “다양한 모험, 수많은 친구들 그리고 순수한 기쁨”으로 자신의 인생이 충만했다고 존 바에즈는 회고한다. 그녀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음악의 정치적 파급력을 확인한다.


존 바에즈는 10대 후반부터 80세를 앞둔 현재까지 자신의 정치적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진심을 담아” 노래를 부른 것 이외에 특별한 이유도 비결도 없었다고 한다. “당신은 언제 어떻게 죽을지 선택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금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뿐이다.” 광장을 떠나지 않은 가수이자 인권운동가 존 바에즈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장영은


성균관대학교에서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썼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