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왜 "조선을 담배의 나라로!"를 외쳤을까 [이기환의 Hi-story]

[이슈]by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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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이야기로 만나보는 이기환의 ‘Hi-story’입니다. 지난주 1618년(광해군 10년) 무렵 조선에 들어온 담배가 요원의 불길처럼 퍼졌다고 했는데요.


최초의 흡연가인 계곡 장유(1587~1636)라는 분을 소개해드렸지만 이 분은 새발의 피라고 했죠. 누구냐. 다름아닌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정조(재위 1776~1800)를 꼽을 수 있습니다.


담배가 얼마나 중독성이 강했냐 하면 담배 전래 후 50년 정도가 지난 1668년(현종 9년)의 기록인 헨드릭 하멜(1630~1692)의 <표류기> ‘부록·조선국기’는 “조선의 아이들은 4, 5세만 되면 담배를 피운다. 남녀노소 가운데 담배를 피우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했어요. 네덜란드까지 소식이 퍼진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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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신윤복의 ‘연못가의 여인’. 기녀가 한 손엔 장죽을 다른 한 손엔 생황을 들고 연꽃을 감상하고 있다. 담배는 시름을 달래주는 묘약으로도 알려졌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렇게 담배가 폭발적으로 유행했으니 너도나도 담배농사에 나섰고, 그러다보니 농사지을 땅이 모자랄 정도가 되었답니다. 아주 사태가 심각했던 모양입니다.


급기야 1798년(정조 22년), 무려 27명의 대소신료가 나서서 “담배의 경작을 법으로 제한해달라”는 상소문을 올립니다.(<정조실록>) 그런데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정조의 반응이 어째 신통치 않습니다. 정조는 “담배농사를 짓는 여부는 전적으로 각 지방의 감사에게 달려있는 일”이라고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단 한가지, 정조가 역사에 길이 남을 골초였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골초가 아니라 정조는 아예 “조선을 흡연의 나라를 만들겠다”고 선포할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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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양반가 자제들과 기녀들의 봄나들이 모습을 그린 혜원 신윤복의 ‘연소답청’. 기녀들을 말에 태우고는 “난 당신의 마부가 되겠다”면서 말을 몰고, 담뱃불을 붙여주고 있다.|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거짓이 아닙니다. 정조의 시문집인 <홍재전서> 등에 다 나오는 이야기니까요. 1796년(정조 20년) 11월 정조가 이런 말을 합니다.


“담배처럼 유익한 것이 없다. 담배가 아니면 답답한 속을 풀지 못하고 꽉 막힌 심정을 뚫어주지 못한다. 담배를 백성에게 베풀어줌으로써 그 혜택을 함께 하고자 한다.”


이 무슨 망발인가요. 담배예찬론을 설파하는 것도 모자라 온 백성을 흡연가로 만들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믿어지지 않는다구요? 아닙니다. 정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책문의 시험문제로 ‘남령초(담배)’를 내걸었습니다. 책문이 뭔가요. 책문은 정치의 대책을 물어 답하게 하는 과거시험의 일종입니다. 세상에나! 과거시험의 주제가 ‘담배의 유용성을 논하라’는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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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 시험문제의 지문을 뜯어보면 깜짝 깜짝 놀랍니다. ‘실사구시’의 예로 담배를 꼽고 있으니 말입니다.


“담배를 이롭게 사용하고 생활에 윤택하기만 하면 된다. 유독 담배만 천하게 여길 까닭이 무엇인가.”


정조 임금은 한술 더 뜨는데요.


“담배 만한 약이 없다. 담배를 피우니 내 답답하게 꽉 막힌 가슴이 절로 사라졌다. 담배가 이 시대에 출현한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천지의 마음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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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의 ‘담배썰기’. 넓은 담배의 잎을 추려낸 다음 작두판에 눌러서 썰어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러면서 “온 백성이 담배를 피우도록 해서 그 효과를 확산시켜 담배를 베풀어 준 천지의 마음에 보답하자”고 역설합니다.


임금이 이럴진대 무슨 담배예절이 있었겠습니까. 1790년(정조 14년) 좌의정 채제공(1720~1799)이 정조 임금에게 “(더러워서) 정승 짓 못해먹겠다”면서 돌연 사의를 표명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정조가 화들짝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묻자 채제공은 기가 막힌 일화를 들려줍니다.


채제공이 권두(수행비서격)와 함께 서대문을 지나가는데 웃옷도 걸치지 않은 새파란 청년 두 명이 담배를 꼬나물고 팔짱을 끼고 있었답니다. 그 모습을 보다못한 채제공의 수행비서가 “어이! 담뱃대 좀 빼지!”하고 소리쳤답니다. 그러자 두 청년이 고희를 넘긴 채제공의 이름을 부르더니 고함쳤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저 자를 보고 담뱃대를 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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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 김준근의 ‘풍속도’. 정조의 바람대로 담배는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퍼졌다. 어떤 남성이 담뱃대를 꼬나문 어린 여인을 등에 업고 가고 있다. 담배예절이 있을 수 없었다. |숭실대박물관 소장

안하무인 그 자체였죠. 체재공은 두 청년을 잡아다 옥에 가뒀다. 그런데 한밤중이 되자 두 청년이 속한 학당의 학생들이 몰려와 옥문을 부술 기세로 철야농성을 벌였답니다.


“채제공이 유생들을 욕보였다. 유생들을 차라리 죽일 지언정 욕을 보일 수는 없다. 석방하지 않으면 옥문을 부숴버리겠다.”


채제공을 욕하는 상소문이 빗발쳤고, 그러자 채제공이 장탄식하며 사직상소를 올린 겁니다.


“이제 대낮 큰 길가에서 홀옷 차림에다 담뱃대를 피워물고 대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어찌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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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상 채제공 초상화. 젊은이들에게 봉변을 당한 이후인 73살 때의 모습이다.|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정조는 채제공의 사직상소를 물리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당대의 인물인 윤기(1741~1826)라는 분은 ‘흡연=조선 사회를 병들게 하는 범죄’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아들과 아우가 아버지와 형 앞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세상이 됐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세상의 도리가 망가지게 된 것이 이 보잘 것 없는 풀 하나 때문이다.”(<무명자집> ‘담배의 폐해를 논한다’)


그러나 임금이라는 정조가 담배예찬론을 그렇게 펼쳤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겠죠. 하기야 이옥(1760~1815)이라는 애연가는 심지어 담배의 경전인 <연경>까지 지었으니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담배예절은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는지, 이옥은 담배 예절의 가이드라인을 정했습니다. 담배를 피워서는 절대 안되는 ‘몇가지 경우’를 나열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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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드릭 하멜의 <표류기> ‘부록·조선국기’는 “조선의 아이들은 4, 5세만 되면 담배를 피운다. 남녀노소 가운데 담배를 피우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했다.


어른 앞에서, 제자가 스승 앞에서, 천한 자가 귀한 자 앞에서, 제사를 지낼 때, 대중이 모일 때는 절대 피워서는 안된다고 했구요, 또 큰 바람이 불 거나 이불 위거나 화약 근처이거나, 기침병을 앓는 병자 앞에서는 절대 피워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예절 뿐 아니라 화재, 그리고 간접흡연을 경고한 거죠.


물론 정조 임금이 조선을 ‘담배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힐 때도 금연 운동가는 있었습니다. 이덕리(1728~?)라는 실학자인데요. 이 분은 이렇게 경고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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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가 1885년 그린 불붙은 담배를 문 해골. 담배의 해악을 소름끼치도록 표현했다.

“엄청난 돈이 담배연기로 다 허공으로 날라간다. 무엇보다 담배를 피우면 진기가 모두 소모되고 눈이 침침해진다. 옷가지와 서책이 더러워지고 불씨 때문에 불이 난다. 치아가 더러워지고 예법이 없어진다.”(이덕리의 ‘기연다·記烟多’)


이젠 담배예절이고 뭐고 담배를 피운다는 자체가 ‘범죄’로 인식되는 세상이 되었죠. 지금 예절을 지키려고 빌딩 뒤에서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피우는 애연가들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저도 30년 가까이 담배를 피우다가 10여 년 전에 끊었는데요. 절대 끊지 못할 것 같았는데, 막상 끊어보니 견딜만 하더라구요. 이 참에 끊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경향신문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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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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