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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꽃이 진 자리, 황량해도 외로워도 자유롭다

by경향신문

경향신문

양평 세미원은 ‘연꽃’으로 널리 알려졌다. 지금 연꽃은 온데간데없다. 여러 정원이 겨울엔 색다른 빛을 발한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재현한 세한정은 코로나19 시대 고립과 단절, 의리와 우정, 희망과 낙관을 대입해 볼 만한 공간이다.

양평 세미원 연꽃박물관·시흥 갯골생태공원·소래습지생태공원의 겨울

‘사념이 없다’ ‘고요하다’ ‘바르다’. 빅토리아 수련, 홍련, 온대수련의 뜻을 새긴 패널이 계단 벽에 올려졌다. 경기도 양평 세미원 연꽃박물관은 인도가 원산지인 수생 초본식물 하나가 꽃피운 문화를 담았다. 동종, 화로, 풍경, 연적, 필통, 소반, 숟가락, 청자대접, 안경집, 항아리에 연꽃이 들어앉았다. 안내판은 연꽃이 불교에서 ‘번뇌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자’의 모습을 상징하고, ‘더러운 곳에 처해 있어도 항상 본성을 간직하기에 청정하고 지혜로운’ 꽃이라고 적었다.


지난달 27일 박물관을 나와 불이문(不二門) 쪽에 가니 ‘연꽃’ 의미가 뒤틀린다. 연꽃을 새긴 남근 모양의 기자석(祈子石) 앞 표지판엔 ‘자손창성(子孫昌盛)’과 ‘오자등과(五子登科)’를 ‘조선 어머니들의 공통된 꿈’이라고 썼다. 연꽃 씨방에 열매가 많아 득남 기원 문양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옛것이라지만, 명백한 시대착오적 전시물에 비판 맥락도 없이 ‘전승하자’는 듯 붙인 안내판을 볼 때마다 당혹스럽다. 불이문의 ‘불이’는 ‘사람과 자연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인데, 남녀차별은 그 불이에 해당하지 않는 듯했다.


세미원을 검색하면 열에 아홉은 연꽃 사진이 뜬다. ‘세미원=연꽃’이다. 지금 이 계절 연꽃을 볼 순 없다. 연꽃 마디는 속절없이 구부러져 연못에 떠돈다. 시각과 감정을 자극하는 색깔도 온데간데없다. 코로나19 확산 때문에 실내 상춘원이나 연꽃 재배지는 문을 닫았다. 대신, 철새가 코로나19에도 아랑곳없이 곳곳에 터를 잡았다.


추사가 말년 4년을 보낸 경기도 과천에 ‘추사박물관’, 유배지인 제주도 서귀포에 추사관이 있다. 고향인 예산도 추사기념관을 뒀다.


세미원은 ‘세한도’를 본뜬 ‘세한정’이란 데도 만들었다. 널찍한 마당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었다. 각각의 나무 이름을 딴 전시관이 ‘송백헌’이다. 송백헌도 맞배지붕과 동그란 창 하나만 낸 ‘세한도’의 집을 따라 만들었다.


“歲寒然後(세한연후) 知松柏之後彫也(지송백지후조야).” <논어> ‘자한’ 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 측백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겠다’는 뜻이다. 추사 김정희가 ‘세한도’에 이 구절을 쓰며 더 유명해진 말이다. 백(柏)이 측백나무인지, 잣나무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여러 학자는 ‘세한도’가 <논어>를 염두에 두고 그린 상상도라면 측백나무일 것이라고 여긴다.


세한정에서 잣나무인지, 측백나무인지 구별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세한정 정조는 “건조한 먹과 거친 필선”으로 그려낸 ‘세한도’의 그것 같다. 황량한 풍경에서 추사가 감당한 유배지의 고난에 코로나19 고통을 대입해본다.


왜 양평에 ‘세한도’를 본뜬 정원을 지었을까. 김금옥 세미원 사무국장에게 물었다. “세미원 출발점이 정원입니다. 한국의 여러 훌륭한 문화유산을 정원으로 옮겼어요. 연꽃 구경보다 정원 산책이나 명상을 좋아하는 분들도 꽤 있어요.” 세미원은 지난해 경기도 지방정원 제1호로 선정됐다. 정약용이 설계한 배다리(열수주교·洌水舟橋)와 정선이 그린 ‘금강산도’도 석가산(石假山) 기법으로 재현했다. ‘추사, 다산, 겸재’라는 한국 인문학 대가의 세한정 산책과 ‘세한도’ 감상을 겸할 흔치 않은 기회다. ‘세한도’는 국립중앙박물관의 ‘한겨울 지나 봄 오듯-세한歲寒 평안平安’ 특별전(1월31일까지)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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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 갯골생태공원의 흔들전망대

한국관광공사는 지난달 11일 춘천 의암호에서 휠체어 탑승이 가능한 ‘킹카누 선착장’ 준공식을 열었다. 정식 개장은 내년에 한다. 대신 찾은 곳이 세미원이다. 장애인 화장실과 경사로, 휴게시설을 갖췄다. 전날 찾은 ‘열린 관광지’는 경기도 시흥 갯골생태공원이다. 일제강점기 이곳에서 생산한 소금은 부산으로 옮겨진 뒤 일본으로 반출됐다. 옛 소금창고를 남겨뒀다.


‘비대면(언택트)’에 생태공원만 한 곳은 없다. 480만㎡(약 145만평)에 이른다. 생태공원을 중심으로 물왕저수지의 월미다리와 시흥월곶에코피아를 연결하는 길은 17.8㎞다. 시흥시는 늠내길이란 이름을 붙였다. ‘늠내’는 ‘뻗어나가는 땅’이라고 한다.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영토였던 이곳을 차지한 후 부르던 ‘잉벌노’가 당시 표현으로 늠내라고 한다. 사방이 트인 땅이라는 점에서 걸맞은 이름이다. 핑크뮬리 비슷한 색의 염생식물인 칠면초가 곳곳에 퍼져 있다. 괭이갈매기가 갯벌에 터를 잡고 앉았다.


하이라이트는 22m, 6층 높이의 흔들전망대다. “바람이 휘돌아 오르는 느낌으로 갯골의 변화무쌍한 역동성을 표현했다”고 한다. 시흥의 호조벌, 포동, 갯골, 올곶동, 장곡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팡이를 든 노인이 부축을 받고 다리 경사로를 올랐다. 미끄럼 방지 턱이 놓였다. ‘열린’은 ‘무장애’를 뜻한다. 휠체어나 유모차는 쉽게 오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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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습지생태공원의 일몰

5㎞ 떨어진 소래습지생태공원도 찾았다. 시흥 갯골생태공원과 비슷했다. 스러져가는 염전창고가 놓였다. 칠면초, 괭이갈매기도 흔했다. 갯골생태공원과 비슷하면서 다른 게 도시 가까이 있다는 점이다. 남서와 북쪽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갈대밭 너머 아파트 단지 뒤로 지는 해가 스산하고 황량한 갈색의 갯벌을 붉게 물들였다.


철새 전망대 덱에 경사로가 없다. ‘열린 관광지’로 선정된 곳만 경사로를 설치하란 법은 없다. 인권위원회가 소규모 공중시설과 편의점, 약국도 경사로를 설치하라고 권고한 게 2018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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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선 대표와 문화진씨

“섬처럼 외떨어진 열린 관광지…연결·연계 부족 해결을”

한국접근가능한관광네트워크 전윤선 대표와 ‘무장애 지도’ 만드는 문화진씨


한국접근가능한관광네트워크 대표 전윤선씨와 ‘무장애 지도’를 만드는 문화진씨에게 ‘열린 관광지’에 관해 물었다. 두 사람은 ‘열린 관광지’ 자체를 두곤 좋은 평가를 했다.


“열린 관광지에선 다니기가 불편하지 않아요”(문씨), “(관광지 안에서) 물리적 접근성이 좋죠. 정보·서비스 접근성도요”(전씨). 경사로나 화장실 등 기본을 충족했다는 말이다. 이들은 열린 관광지를 늘려야 한다고 말한다.


둘 다 유지·보수 문제를 지적한다. 전씨는 “막상 가서 보면, 지속 가능하지 않은 곳도 있다. 무장애 시설이 파손된 채 방치되곤 한다. 몇몇 지자체들은 유지·보수를 잘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흥 갯골생태공원을 찾았을 때 촉지형 안내판 음성 설명 기기는 작동하지 않았다.


‘무장애 시설’이 무장애가 아닐 때도 있다. 문씨는 “시흥 갯골생태공원 흔들전망대에 올라가려다 포기했다”고 말했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혼자 오르기엔 경사가 급했기 때문이다. 경사로 바닥에 부착된 미끄럼 방지 턱에 바퀴가 걸릴까봐 걱정했다고도 한다.


이들은 열린 관광지를 ‘육지와 동떨어지고 배편도 없는 섬’처럼 여긴다. 문씨가 말했다. “(관광지라면) 뭘 먹기도 하고, 사기도 해야 하는데 ‘생태공원’ 같은 데는 한계가 있죠. 허허벌판이니까요.”


전씨는 열린 관광지 선정 때 참여하곤 했다. 그는 휠체어나 유아차 사용자 등 열린 관광지의 1차 소비자들의 욕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시흥 갯골생태공원도 좋죠. 하지만 시흥 관광지 하면 오이도를 먼저 떠올리죠. 맛집도 많고요. 장애인들도 ‘핫플레이스’나 ‘인생사진 촬영하는 곳’, TV에 나온 곳에 가고 싶어 해요. 이런 곳은 잘 선정되지 않죠.” 문씨는 “열린 관광지 주변 식당에 가더라도 경사로가 없는 데가 많다”고 말했다.


연결과 연계 부족이 문제다. 전씨는 “역이나 터미널에 내리면 대중교통으로 열린 관광지에 갈 수 있어야 한다. 장애인 콜택시도 즉시 콜에 응할 수 있도록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휠체어 탑승이 가능한 저상버스도 늘려야 한다”며 “여러 지자체가 시티투어버스를 운영하는데, 휠체어 탑승 저상버스가 없는 곳도 있다”고 말했다.


문씨는 “열린 관광지로 가는 기차 등 차량의 배차 시간이 길다. 역에서 장애인 콜택시가 연결되지 않는 곳도 있다. 고속버스 노선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서울~부산’ ‘서울~강릉’ ‘서울~전주’ ‘서울~당진’ 노선에 버스가 다닌다. 당진 빼고는 KTX와 중복 노선인 셈인데, 장애인들은 기차를 선호한다. 당진은 주변 관광지와 쉽게 연계되지 않는다. 문씨의 말이다. “고속버스 수요가 없다고 하는데, 터미널 주변에 관광지나 쇼핑센터 같은 데가 있고, 점자블록을 두거나 휠체어로 이동 가능한 도로를 갖췄다면 버스를 타고 가죠.” 무장애 공간을 모든 생활공간에 두는 걸 궁극의 목표로 삼아야 하는 셈이다.


전씨는 코로나19 종료 이후를 내다보며 ‘열린 관광지 시즌2’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간은 열린 관광지 하드웨어를 채우는 데 바빴다면, 앞으로는 인식 개선이나 서비스 향상 같은 소프트웨어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인 고령자·장애인·어린이들도 편히 찾는 한국을 목표로 삼고 열린 관광지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글·사진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