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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순간, 다시 할 수 있다는 힘을 얻었다

by경향신문

뛰는 것이 좋아 사람들과 함께 뛰는 일을 구상하는 ‘러닝전도사’ 안정은씨의 전공은 달리기와 전혀 관련이 없는 컴퓨터공학이다. 부모님과 선생님의 기대에 맞춰 선택한 학문이었지만 그래도 전공을 살려 개발자로 취업을 했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평생 개발자를 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직종에 취업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20대 초반, 우울증과 대인기피증까지 생길 정도로 힘들었다. 가족들에게 눈물을 보이기는 싫었다. 잠옷 차림으로 나가 동네를 뛰기 시작했다.


“답답한 마음에 무작정 뛰었는데 달리고 나니 가슴 한편이 후련해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다시 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느낌도 들더라고요. 그날 이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달렸어요.”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 정동에서 만난 정은씨는 자신이 경험한 달리기의 긍정적인 영향을 알리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직업이 ‘러닝전도사’라고 했다.


“저는 굉장히 평범한 사람이고 꿈도 없었어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랐고 건강도 좋지 않았는데 뛰면서 인생이 180도 바뀌었어요. 저처럼 달리기로 사람들의 인생이 조금이라도 변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달리기를 알려보자고 마음먹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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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은씨는 자신이 경험한 달리기의 긍정적인 영향을 알리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직업이 ‘러닝전도사’라고 설명했다. 유명종 PD

정은씨는 달리기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풀코스 마라톤에 도전했다. “당시에 마라톤을 뛰고 나면 뭔가 길이 보이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에 신청했어요. 시각장애인 한 분이 참가하셨는데 앞이 보이지 않아도 자신이 달리고 싶은 길을 가는 모습을 보며 그동안 핑계만 댔던 제 자신이 떠오르더라고요. 가고 싶은 길과 목표가 있다면 주변 환경은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잠옷 차림으로 뛰었던 정은씨는 풀코스 마라톤을 9번, 몽골 고비사막에서 250㎞ 마라톤도 완주했다. 철인 3종 경기도 두 차례 완주했다. 달리기 경험을 담은 책도 출간해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달리기

30분 이상 뛰면 어느 순간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면서 경쾌한 행복감이 들 때가 있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다. 오래 달려도 전혀 지치지 않을 것 같고 계속 달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저는 사실 달리면서 매 순간 러너스 하이를 느껴요. 달리면서 정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순간이 매일매일 있는데 신기하게도 그 순간만 넘기면 정말 자유롭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이 들기도 해요. 만약 달리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힘든 순간이 왔을 때 거기서 포기했겠지만 힘든 순간 다음에 항상 러너스 하이가 온다는 걸 알게 되니까 일상에서도 힘든 순간에 ‘이것만 넘기면 괜찮아질 거야’라는 생각으로 더 달리게 되는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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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전도사’ 안정은씨가 지난 11월 서울 중구 정동길을 달리고 있다. “힘든 순간 다음에 항상 러너스 하이가 온다는 걸 알게 되니까 일상에서도 힘든 순간에 ‘이것만 넘기면 괜찮아질 거야’라는 생각으로 더 달리게 되는 거 같아요.” 유명종 PD

정은씨는 여행과 달리기를 결합한 ‘런트립’과 스포츠 브라탑을 입고 달리는 ‘탑걸즈크루’와 같은 달리기 콘텐츠를 기획하고 운영한다.


탑걸즈크루에는 20대부터 40대 후반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이 함께한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부터 달리기에 지루함을 느껴 새로운 달리기에 도전하려는 사람 등 이유도 제각각이지만 ‘달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하나가 된다.


“한 기수에 33명의 참가자를 모집해요. 33인의 독립운동가가 대한민국을 대표해 독립선언을 했던 것처럼 ‘우리는 여성들을 대표한다’는 의미로 33명을 모집하게 됐어요. 여성들이 자신감을 갖고 서로를 응원하고 격려해 주면 의미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탑걸즈크루’는 마지막 수업에 전원이 스포츠 브라탑을 입고 달린다. 왜 스포츠 브라탑일까. 지금은 그나마 인식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정은씨가 달리기를 시작한 3~4년 전만 해도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면 옷차림으로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레깅스를 입고 달리기를 하면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쳐다보는 시선도 있었다. 그래서 운동하는 여성의 옷차림에 대한 인식 변화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해외에서는 스포츠 브라탑만 입고 운동을 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속옷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운동할 때도 입지 않거나, 위에 티셔츠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들이 운동하면서 가슴 건강을 지키기 위해 브라탑을 입어야 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여성들이 스포츠 브라탑을 입고 단체로 달리니 처음에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관종인가.” “왜 저렇게 입고 뛰지.” 이런 말을 듣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자신감을 키우는 게 중요해요. 노력의 결과인지 지금은 멋있다고 손뼉 쳐 주시고 같이 사진 찍자는 분들도 계세요. 크루에 가입하는 방법을 묻는 분들도 늘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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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은씨에게 달리기는 여행과 같다. 같은 길도 달리다 보면 새로운 시선으로 보인다. 세상을 좀 더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명종 PD

달리다보면 행복은 멀리있지 않아

달리면서 긍정을 찾게 된 정은씨도 올해는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달리기 프로그램과 예정되어 있던 강연·행사 등이 대부분 취소됐기 때문이다. 꿈꾸던 세계 6대 마라톤 도전도 무산됐다. 올 3월로 예정됐던 결혼식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힘들긴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에 도전해보자는 마음으로 대형면허를 땄어요. 준비했던 책도 출간했고요. 코로나가 잠잠해졌던 6월에는 결혼식을 올렸어요. 결혼식 당일 저녁에는 신혼여행 대신 사전에 신청받은 50명의 참가자들과 함께 반포 한강공원에서 달리기를 했어요. 저희 부부가 낸 50만원과 참가자분들의 참가비 1만원을 합쳐 100만 원을 기부하면서 더욱 기억에 남는 결혼식을 했죠.”


📌[유튜브]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만드는 달리기의 힘, 러닝전도사 안정은


정은씨에게 달리기는 여행과 같다. 같은 길도 달리다 보면 새로운 시선으로 보인다. 세상을 좀 더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도 ‘러닝 전도사’를 할 수 있을지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는 새로운 여행을 떠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아이 셋을 낳아 한 명은 남편 등에 업히고 한 명은 유모차에 태우고 한 명은 손을 잡고 마라톤 대회를 완주하는 것이 목표 중 하나에요. 국내에 달리기 좋은 러닝 코스를 소개하는 시리즈 책도 만들고 싶고요. 여행하듯 달리면 새로운 꿈이 계속 생기거든요.”


정은씨는 자신의 삶을 바꾼 달리기의 긍정적 힘은 ‘성취감’이라고 했다. “업무를 하거나 공부할 때 성취감을 얻으려면 최소 한 달에서 1년까지 걸리는데 달리기는 10분을 뛰더라도 내가 포기하지 않고 해냈다는 성취감을 맞볼 수 있어요. 그 성취감으로 내일 다시 달릴 수 있게 하고 더 큰 목표를 세워 조금 더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거 같아요.”


힘들었던 2020년이었지만 또 다른 성취도 있었다. ‘2020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상’에서 ‘신진여성문화인상’을 받은 것이다. 문화를 매개로 사회 전반의 양성평등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한 인물이나 단체를 격려하기 위해 주는 상이다. 정은씨는 “달리는 여성들의 자신감과 자존감을 올리기 위해 했던 일인데 감사하게도 상을 받게 됐다”며 “활동을 계속 이어 나가도 되겠구나, 목소리를 더 크게 내도 되는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긍정의 힘은 주변을 돌아보는 선한 영향력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그는 달리면서 동시에 쓰레기를 줍는 ‘플로깅’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동네 골목이나 화단 등 내가 지나쳐온 길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고 돌아가는 길에 보면 환경은 물론 우리의 건강까지 신경 쓸 수 있어 뿌듯함이 배가 되는 거 같아요.”


코로나 사태로 실외에서 러닝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정은씨는 5분만, 10분만 달리자는 마음으로 뛰어보면 집에 돌아갈 때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이 생길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강조했다. “힘들지만 달릴 때도 마스크는 꼭 착용해 주셔야 해요. 너무 힘들면 중간에 멈춰서 호흡을 회복한 뒤 다시 뛰어도 됩니다.”


이진주 기자 jinju@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