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박명' 지광국사탑, 1만2000개 산산조각에서 본 얼굴 찾은 5년의 수술 기록

[컬처]by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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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간의 보존처리를 마무리지은 지광국사 현묘탑의 각 부재. 원래의 자리인 원주 법천사지로 옮기려고 복원처리한 탑 부재를 짜맞추지 않았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미인박명’ 소리를 듣던 탑이 한 기 있었다. 바로 강원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국보 101호)이다.


이 탑은 고려 전기 문종(재위 1046~1083) 시대에 활약한 왕사이자 국사인 지광(해린·984~1070)을 위해 만든 승탑이다. 해린은 사후에 ‘지광’의 시호를 받았다. 지광국사는 87세의 나이인 1070년(문종 24년) 법천사에서 타계한 법상종의 고승이었다. 법상종은 고려 초기 대 호족 세력을 억제하고 문벌귀족에 의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려는 정치상황의 변화와 함께 현종(재위 1009~1031)대부터 대두하기 시작했다. 결국 화엄종과 함께 고려중기 불교의 양대 산맥을 형성한다.


나이가 든 지광이 고향의 법천사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문종이 직접 나와 전송했다는 일화가 있다. 문종은 지광이 법천사에서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몹시 슬퍼했다. 사람을 보내 장례비용을 댔고, 장례를 감독하게 했다. 5만여평에 달하는 법천사의 전체 사역범위는 신라 황룡사·백제 미륵사지 등에 이어 3번째로 큰 규모일 정도로 번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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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안전진단에서 다수의 균열과 모르타르(mortar·시멘트와 모래를 물로 반죽한 것) 복원한 부위의 탈락 등이 확인되어 재복원이 결정됐다. 지난 6년간 새로운 석재를 일부 사용해서 재복원을 마무리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그런데 왜 이 탑을 두고 ‘미인박명’이라 하는가. 탑이 아름다워 ‘미인’이라 하고, 팔자가 사나워 ‘박명’이라는 소리를 들어왔다. 아닌게 아니라 이 탑은 독특한 구조와 화려한 조각, 뛰어난 장엄장식 등으로 역대 고승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부도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그러나 임진왜란 등으로 절이 완전히 불타는 등의 수난이 시작됐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기막힌 일이 벌어진다. 그해 9월 일본인 모리(森)라는 자가 페허가 되었던 절터에 서있던 현묘탑을 마을주민에게서 사들여 서울에 거주하던 사업가 와다 쓰네이치(和田常市)에게 팔았다. 와다는 일본 오사카의 남작 후지타 헤이타로(藤田平太郞)에게 당싯돈으로 3140원에 넘겼다. 이 탑은 1912년 5월 일본 오사카로 반출된다.


그렇지만 반출소식을 들은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穀·1852~1919) 조선총독이 “국유지에 있던 현묘탑을 개인 간에 매매한 것은 엄연한 불법이니 당장 조선총독부로 반환하라”고 으름장을 놓고 현묘탑 매매에 연루된 모리와 와다 등을 본격수사한다. 수갑을 찰 운명이 된 와다는 후지다에게 팔았던 현묘탑을 되산 뒤 총독부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이순우의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조사보고서>·하늘재·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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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한창인 1950년 9월 서울수복 과정에서 폭격을 맞아 1만2000조각으로 산산조각난 지광국사현묘탑의 모습.|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데라우치가 일본으로 건너간 탑의 반환을 요구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데라우치는 조선이 영원한 일본의 식민지가 될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다. 따라서 문화재가 일본에 있던, 조선에 있던 상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총독으로 있는 동안 조선땅에 문화재가 있는 것이 순리라고 여겼다.


1912~15년 사이 다시 현해탄을 건너 돌아온 현묘탑은 경복궁 안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세워졌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그만 유탄을 맞아 무려 1만2000조각으로 박살나는 비운을 맞는다. 그것도 전쟁이 끝난지 4년이 지난 1957년까지 방치됐다가 그해 9월 한국을 방문한 월남(베트남)의 응오 딘 지엠 대통령(재임 1956~1963)과 경복궁 산책에 나선 이승만 대통령(재임 1948~1960)에게 발견되면서 복원이 시작됐다.


그러나 폭격을 맞은지 7년이나 지났지만 그대로 방치된 탓에 부서진 부재들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당시 복원 팀은 강화도·익산 등지에서 모자란 돌을 조달해서 겨우 복원에 성공했다.


천신만고 끝에 복원되어 경복궁 경내에 서있던 탑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계속된 점검과 정밀안전진단에서 다수의 균열과 모르타르(mortar·시멘트와 모래를 물로 반죽한 것)로 복원한 부위의 탈락 등이 확인됐다. 모르타르로 복원된 옥개석(지붕돌)과 상륜부는 구조적 불안정까지 더해져 석탑의 추가 훼손이 우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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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원주에서 반출되어 서울 명동으로 옮겨졌을 때의 지광국사 탑. 이 탑은 오사카로 팔려갔다가 다시 돌아왔지만 원주가 아니라 경복궁으로 이전됐다.

결국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가 2016년 5월부터 전면해체·복원작업을 벌였고, 최근 그 작업을 완료했다. 센터는 그 5년간의 연구 및 보존처리 결과를 담은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보존·복원Ⅲ> 보고서를 20일 발간했다. 센터는 이 보고서를 인터넷 사이트에 공개했고, 탑 관련 문화재 정보와 보존처리 관련 내용을 웹툰으로 제작해 온라인으로 알릴 방침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해체후 보존처리 과정에서 해체부재들을 일일이 기록하고, 모르타르는 걷어냈다. 결실되어 없어진 부재에 대해서는 신석재로 새로 제작했고, 파손부재들은 접착했다. 전체 29개 부재중 19개를 가려내 부분적으로 신석재를 사용했다. 정소영 문화재보존과학센터장은 “옥개석과 앙화, 보륜 등 상륜부 부재는 절반 정도를 신석재로 복원하여 구조적 안정성도 확보했다”고 전했다.


이태종 학예연구사는 “부득이 새로 구해야 하는 신석재들은 지광국사탑이 있던 원주(귀래면 귀래리 석산)에서 채석됐다”면서 “탑이 조성될 당시에 사용된 석재와 가장 유사한 재질로 구했다”고 전했다. 장성윤 학예연구관은 “유리건판과 실측도면 등을 바탕으로 도상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여 결실부분의 도상을 복원하였고, 전통기술과 도구를 사용하여 가공하고 접합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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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이후 복원되었던 지광국사 현묘탑. 그러나 워낙 상태가 좋지 않아 재복원이 결정되었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센터는 또 탑신석 사리공에서 발견된 옥개석 파손부재 조각과 법천사지에서 발굴된 하층 기단갑석 조각을 과학적 조사와 고증을 거쳐 원래 위치에 복원했다. 1957년 수리 당시 잘못 복원된 옥개석의 방위와 추녀 위치를 바로잡기도 했다. 이외에도 추후 탑이 복원될 때 사용될 무기질 결합재 연구 등에서도 학문적 성과를 도출해냈다. 김현모 문화재청장은 “과학적·인문학적 융복합 연구를 통해 지광국사탑의 잃어버렸던 본래의 모습을 최대한 되찾으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문화재위원회 건축분과는 이미 2019년 6월 복원된 지광국사탑을 강원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 절터로 이전시키기로 결정한바 있다. 그러나 언제, 어느 지점으로 이전할 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탑의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았던 터라 최적의 관리방안을 모색중이기 때문이다. 이종희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장은 “탑과 탑비를 원래의 위치에 보호각을 세워 복원할지, 아니면 전시관을 세워 내부에 탑을 이전 전시하게 될지 결정되지 않았다”면서 “현지조사 등을 거쳐 보존환경이 탑에 미치는 영향 등을 신중하게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법천사지에는 옛 탑 자리가 그대로 남아있고, 당시 함께 조성된 지광국사 탑비(국보 제59호)가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2021.01.2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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