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보다 두려웠던 배고픔…밥의 위기, 빛은 있다

[라이프]by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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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명동은 화려하다. ‘가진 이’들의 천국이다. 그 한복판, 옛 계성여중·고 자리에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급식소 ‘명동밥집’이 들어섰다. 영하의 한파가 몰아닥친 29일, 눈 쌓인 운동장에서 도시락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시인도 밥을 짓는다. 밥을 먹는다. 밥에 운다. 박준은 “영아가 오면 뜨거운 밥을/ 새로 지어 먹일 것입니다//(…) 우리는 밥에 숨을 불어가며/ 세상모르고 먹을 것입니다”(‘좋은 세상-영아’)라고 썼다. 최영미는 자신의 ‘미투’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고은의 소장(訴狀)을 받고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밥부터 먹어야겠다”(‘독이 묻은 종이’)고 생각했다. 허연은 “밥 때문에 상처받았고,/ 밥 때문에 전철에 올랐다./ 밥과 사랑을 바꿨고,/ 밥에 울었다”(‘밥’)고 했다.


일상의 밥은 지질하다. 고봉밥은 촌스럽고, 소식(小食)은 쿨하다. ‘간헐적 단식’이 유행하고, 음식물쓰레기 분쇄기가 인기다. 우리는 이제 밥에서 해방된 건가.


허상을 코로나19가 깨부쉈다. 바이러스가 들이닥치기 전, 집이 없거나 가난한 이들은 무료 급식소에서 밥을 먹었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급식소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갈 곳도 먹을 것도 없는 이들에게 감염병보다 더 큰 위기가 찾아들었다. 밥의 위기다.


경기 성남에서 노숙인 급식·자활시설 ‘안나의집’을 운영해온 김하종 신부(64)는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식당 급식을 도시락 배식으로 바꿨다. 건너편 성남동성당의 앞마당에서 매일 650~700명에게 도시락을 나눠줬다. 노숙인들이 서울에서부터 걸어서 찾아왔다. 한때는 800명분까지 도시락을 준비했다.


김 신부는 바이러스의 공포 속에서도 수백명에게 밥을 먹이는 하루하루를 ‘기적’이라 여겼다.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지난해 1월 말부터 9개월간 쓴 일기를 모아 <순간의 두려움 매일의 기적>(니케북스)을 펴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산하 한마음한몸운동본부를 이끌어온 김정환 신부(52)는 최근 ‘밥집 주인장’이 됐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무료 급식소 ‘명동밥집’의 문을 열었다. “서로에게 밥이 되어달라”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당부를 이어가려 한다.


경기 성남에서, 서울 명동에서 밥을 짓고 나누는 사람들을 만났다. 박노해 시인은 “그 어떤 위대한 일도 밥 한 그릇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성남 ‘안나의집’ 김하종 신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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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 우철훈 선임기자

지난 25일 오후 1시, 경기 성남시 ‘안나의집’. 김하종 신부(사진)를 따라 주방으로 향했다. 앞치마를 두른 김 신부는 영락없는 셰프 분위기다.


김 신부와 자원봉사자들의 일정은 ‘코로나바이러스 극복을 청하는 기도’로 시작됐다. 기도를 마친 뒤 김 신부가 물었다. “오늘 처음 오신 분?” “어디서 오셨어요?” 서울 사당동에서, 경기 평촌에서 왔다는 답이 이어졌다. 한 봉사자가 “경남 김해”라고 하자 짧은 탄성이 들렸다. 이날의 메뉴는 밥, 북어국, 미트볼조림, 시금치나물무침, 배추김치, 떡과 귤 3개. 기부자가 후원한 마스크와 1ℓ짜리 과일주스도 함께 제공하기로 했다.


김 신부는 도시락 준비 마지막 단계에서 귤과 마스크를 넣고 비닐봉지를 묶는 역할을 했다. 배식 시간이 다가올수록 손끝이 빨라진다. 틈틈이 봉사자들을 위해 음악도 틀어준다. 그러더니 “이제 성당 가서 세팅해야 한다”며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카트를 끌고, 주스 박스도 직접 들어 옮긴다. 걸음걸이가 날렵하고 활기차다.


안나의집은 지난해 2월 코로나19가 급속히 확산되자 식당 급식을 도시락 배식으로 바꿨다. 그런데 안나의집 앞 인도에서 나눠주다보니 주변의 민원이 이어졌다. 건너편 성남동 성당의 최재철 주임신부가 제안을 해왔다. “우리 성당 앞마당에서 도시락을 전달하면 어떻겠습니까.”


오후 1시25분. 성당 입구엔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다. 노숙인이 많지만, 홀로 사는 노인들도 적지 않게 찾아온다. 열화상 카메라로 체온을 재고, 손소독을 한 뒤 차례로 입장한다. 마당에는 2m 간격을 둘 수 있도록 표시가 돼있다.


도시락은 매일 750개를 준비한다. 주방에서 직접 준비하는 게 600개, 외부에서 지원받는 게 150개다. 배식은 오후 2시30분부터 4시까지 성당 앞마당에서 하고, 남은 도시락은 안나의집 앞에서 5시30분까지 나눠준다.


평신도 봉사자 이프란치스코씨(65)에게 김 신부 ‘뒷담화’를 부탁했다. “신부님이 60대라는 게 믿어지세요? 정말 열정적이세요. 20대 같아요.”


2시30분. 배식이 시작됐다. 김 신부가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리며 “사랑합니다”라고 외친다. 도시락을 받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눈을 맞추고 60도로 고개 숙여 인사한다.


행렬이 물 흐르듯 움직이자 “이제 인터뷰하러 가자”며 앞장선다. 사무실에 들어선 뒤 사진기자에게 신신당부한다. “제 사진은 아주 작게, 한 장만 써주세요. 봉사자들 위주로 써주셔야 합니다.”


김하종. 본명은 빈첸시오 보르도. 이탈리아 로마에서 북쪽으로 100㎞ 정도 떨어진 피안사노 출신이다. 1987년 사제 서품을 받고 1990년 한국에 왔다. 2년간 한국어를 배운 뒤 1992년부터 성남에서 빈민 사목을 시작했다. 외환위기 이후 급증한 노숙인들을 위해 1998년 급식소를 세웠다. ‘안나의집’의 모태다. 안나의집은 ‘안아주고 나눠주고 의지하는 집’이란 뜻이다. 지금은 코로나19로 도시락 나눔만 하지만, 노숙인 자활사업과 청소년쉼터 등을 운영하는 사회복지법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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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성남 ‘안나의집’ 주방은 늘 활기차다. 지난 25일 봉사자들이 노숙인과 홀몸노인들에게 제공할 도시락을 싸기 위해 밥을 푸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나도 코로나가 무섭지만

내가 해야 한다 생각할 뿐

두렵다고 일 멈출 수 없어


- <순간의 두려움, 매일의 기적>이란 책을 출간했습니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1년간 가장 두려운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두려웠다기보다…. 어느 날 한 기업체에서 봉사 오기로 했는데 (배식 시간이 얼마 안 남은) 오전 11시30분에 연락이 왔어요. ‘죄송하지만 봉사 못 갑니다. 두려워서 못 갑니다’ 하는 거예요. 이해는 간다고 했지만… 그때 그 일이 책 제목 ‘순간의 두려움’의 배경이 됐어요.”


- 바이러스를 겁내는 건 나약한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요.


“그렇죠. 더 큰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해주는 측면도 있고요. 다만 두려움이 삶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 신부님도 두려움을 느낍니까.


“마음속으로는 저도 두렵고 무서워요. 저도 사람이니까요. 다만 제가 해야 한다, 생각할 뿐이에요. 바이러스 있으니까, 어려움이 있으니까, 오히려 더 열심히,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의사, 간호사들이 바이러스 때문에 위험하니까 병원에 출근 못한다? 말이 안 되잖아요. 두렵다고 할 일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평생 일하면서 돈 번 60대

‘가난한 친구 위해 써달라’

이런 일상의 기적도 많아


- 가장 큰 기적이라고 생각한 때는 언제였나요.


“너무 많아요. 그중에서도… 50대쯤 되는 어떤 아주머니가 오셔서 ‘제가 결혼하지 않고 시장에서 일하며 살아왔어요. 노숙인들 도와주고 싶어서, 금 모은 것 가져왔어요’ 했을 때, 정말 감동받았어요.”


책에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60대 여성이 찾아와 금을 기부한 사연이다. “저는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어요. 식당에서 설거지, 청소, 홀 서비스 등 궂은일을 하면서 살아왔어요. 은행 계좌도 하나 없습니다. 대신 돈이 생기면 금을 샀어요. 그런데 모두가 힘든 시기에 저 자신만 생각할 수는 없더라고요. 이걸 팔아서 당신의 가난한 친구들을 위해 사용하세요.”


김 신부는 그래서 책을 냈다. 불안하고 두려운 시기임에도 경이롭고 아름다운 일이 너무 많아서, 그걸 알려서 어두운 시기에도 빛은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었다.


- ‘밥이 하늘’이라고 합니다. 신부님은 30년 가까이 하늘을 여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밥은 어떤 의미인가요.


“밥은 생활의 기본이에요. 식사 못하면 인간답게 살지 못해요. 비가 많이 쏟아질 때도 우산 없이 오시는 분들이 있어요. 오시는 데 힘들지 않았냐고 물어보면 ‘폭우나 코로나보다 배고픔이 더 두렵다’고 하세요. 배식을 하면 35% 정도가 독거노인입니다. 그런 할머니, 할아버지들 보면 가슴 아파요. 90대 노인도 한 끼 받으러 오시는데 속상해요. 따뜻한 집에서 따뜻한 진지 드셔야 하는데, 춥고 힘들게 멀리서 오시니까요.”


김 신부의 한국어는 정확했다. ‘밥’ 대신 ‘진지’라는 어휘를 사용했다.


-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건 사제의 의무겠지요. 그래도 버티기 힘들 때도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지만, 저 자신을 위해서도 이런 생활 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 나눌 때, 저도 기쁘니까요.”


- 때로 인간, 인간성이라는 데 실망하지 않나요.


“물론 그럴 때가 있지요. 거리의 친구들끼리 시비가 일 때 속이 상합니다. 그 친구들도 규칙을 지켜야 하는데, 다투고 어기면 마음이 아파요.”


- 그럴 때는 뭐라고 하세요.


“그때그때 달라요. 우선 흥분한 분들을 안정시키고, 그다음에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물어봅니다. 이 사람이 새치기 했습니다, 저한테 반말 했어요…그런 경우가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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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가 무료 급식소 ‘명동밥집’을 연 지난 22일 한 시민이 도시락을 받아들고 걸어가고 있다. 권도현 기자

간혹 부자·중산층도 줄 서

그들에겐 한 끼일 수 있지만

누군가는 ‘마지막 식사’일 수도


지난해 말 안나의집이 언론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이른바 ‘벤츠 급식’ 사건 때문이다. 성남동 성당 앞에 벤츠 승용차가 서더니, 두 여성이 내렸다. 태연히 노숙인 사이에 끼어들어 줄을 섰다. 김 신부가 “좋은 차도 있으신데, 여기 오시면 안 됩니다. 도시락이 모자랍니다”라며 막아섰다. 페이스북에 이 사연을 올린 김 신부는 “스스로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분들이 가져가는 도시락 하나가 그분들에게는 한 끼일지 모르지만, 노숙인 한 명에게는 마지막 식사일 수도 있다”고 했다.


- 지금도 도시락을 받겠다고 오는 부자나 중산층이 있습니까.


“이 이야기를 해야 하나 싶은데… 할게요. 이 근처에 아파트 모델하우스가 있어요. 어떤 분이 성당에 와서 자리를 잡고는 다시 나가는 거예요. 어디 가십니까, 물었어요. 아파트 분양받기 때문에, (모델하우스 가서) 서류 받고 다시 돌아올 거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렇게 하지 마세요’ 했습니다. 그런데도 ‘무료인데 왜 제가 오면 안 되나요?’ 하더니 다시 왔어요. 아파트 살 돈 있는 사람이 도시락 받으러 오면 안 되죠.”


김 신부가 한숨을 쉬었다.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 김씨 성은 김대건 신부에게서 따고, 하종이란 이름은 ‘하느님의 종’이란 뜻이라고 들었습니다. 사제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어디에 있었나요.


“실례지만, 결혼하셨어요?”


- 아니요. 안 했는데요.


“사랑은 해보셨을 거잖아요. 사랑에 빠지면, 그 남자 좋아지잖아요. 거기 이유 없죠. 저도 예수님과 사랑에 빠져서, 사랑 많이 느껴서….”


-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습니까.


“아버지한테 말씀드렸더니, 저한테 ‘깊이 생각해봐라. 어려운 길이다’라고만 하셨어요. 몇 년 지나고 엄마가 이야기하시길, 아버지가 그날 많이 우셨다고 해요.”


- 한국행을 선택한 까닭은요.


“어느 해 생일에 친구가 선물로 책을 줬어요. 인도 시인 타고르의 시집이었어요. 다 읽고, 타고르 공부하고, 그러다보니 간디 읽고, 인도에 대해 알게 되고, 아시아 쪽으로 관심이 생겼습니다. 아시아 공부하며 한국이 스스로 가톨릭 교회를 세운 나라라는 걸 알게 되고 특별한 매력을 느꼈어요. 무슨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어요.”


- 고향 생각 날까봐 한동안 이탈리아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면서요.


“지금도 잘 안 먹어요. 어차피 안나의집에서 세 끼 식사 다 하니까요. 그런데 신기한 게 이탈리아에서는 리조토도 안 먹었어요. 한국에 가기로 결정하고 가장 걱정한 게 밥(쌀)하고 매운 음식, 두 가지였어요. 쌀을 싫어하고 매운 걸 못 먹었거든요.”


- 어떻게 적응했습니까.


“여기(한국에) 사는 5000만명이 먹는데, 나도 먹을 수 있겠지 했어요(웃음). 떡도 처음에 전혀 못 먹었는데 지금은 너무 좋아합니다.”


김 신부는 2015년 특별귀화 절차를 통해 한국 국적을 얻었다. 헌신적 봉사활동의 공적을 인정받아서다. 앞서 두 차례 일반귀화를 신청했지만 모두 탈락했다.


- 귀화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조금 원망스럽지 않았는지요.


“원망스럽다기보다는 안타까웠어요. 지금은 (국적법이) 바뀌었을 텐데요. 그 당시에는 결혼한 사람, 사업하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이 우선이었어요. 가난한 사제는 해당사항이 없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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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의집’ 김하종 신부와 봉사자들이 지난 25일 성남동 성당에서 도시락 배식을 하기 전 두 손을 올려 하트를 만들어 인사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30년 전 ‘우리’ 문화였던 한국

부유해진 만큼 ‘나’를 중요시


- 다른 나라도 그렇지만 최근의 한국은 물질에 대한 집착이 커졌습니다.


“30년 전 한국에 왔을 때 한국 사회의 문화는 ‘우리’ 문화였어요. 참 좋았어요. 대한민국이 부자 될수록 ‘우리’라는 문화가 ‘나’라는 문화로 바뀌어갔어요. 어려운 사람 생각을 덜 하고요. 30년 사이 너무 많이 변했습니다.”


갑자기 한 직원이 인터뷰실 문을 두드렸다. “외국인이 후원 물품을 가져왔는데, 영어가 안 된다”며 SOS를 요청한 것이다. 김 신부는 10분쯤 지나 돌아왔다.


- 나보다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바라볼 때 어떤 마음이 필요할까요.


“코로나바이러스가 교훈을 줬어요. 나만 생각해선 안 된다는 거예요. 거리의 친구들이 건강하고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아야만 동네 사람들도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예요. 모두 바이러스에 걸리면, 나 혼자 마스크 잘 쓴다고 소용 없어요. 다 같이 조심하고 다 같이 움직여야 다 같이 이길 수 있습니다.”


- 안나의집을 운영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이는 누구인가요.


“여기 있던 분들, 성공케이스 많아요. 다시 일어나고 다시 시작해요. 원래 여기 쉼터가 있어요. 한 청년이 거기 오래 있다가 자립한다며 인사하러 왔어요. 작업장도 있거든요. 거기서 일하면 한 달 150만~200만원 벌어요. ‘신부님, 지금 떠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빚 다 갚고, 돈 모아서 고향 갑니다. 어머니 모시고 살겠습니다.’ 이런 사례가 많아요. 노숙 생활을 시작하자마 바로 손을 잡아주면 쉽게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놔두면, 방치하면 일어나기 어려워요.”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 고향에 부모님이 계십니까.


“어머니만 계세요. 86세예요.”


- 코로나19 때문에 지난해에는 못 다녀왔겠습니다.


“네. 다녀온 지 3년 됐어요. 그리워요. 어머니하고 매일 영상통화해요.”


- 매일요?


“어머니가 전화 시간을 많이 기다리세요. 그래서 매일 저녁 8시쯤 걸어요. 거기는 낮 12시예요.”


<순간의 두려움 매일의 기적> 속 3월27일 일기에는 어머니와 관련된 사연이 담겨 있다. 노숙을 하는 시각장애인이 김 신부에게 다가와 이탈리아 이야기를 꺼낸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많은 사람이 감염되어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러곤 지갑을 연다. “이건 여기보다 그곳에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이탈리아로 보내세요. 당신의 어머니를 위해 기도합니다.”


김 신부가 지금도 즐기는 ‘유일한’ 이탈리아 음식은 에스프레소다. 사실은 그조차 한동안 끊었다. 지난해 가을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는 걸 느껴 병원에 갔다. 의사는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면서 충분한 휴식과 운동을 권했다. 커피도 마시지 말라고 했다.


- 에스프레소는 아직도 안 드시나요.


“(웃으며) 조금씩 먹어요. 전에는 하루 두세 잔이었는데, 지금은 아침에 일어나서 한 잔 정도요.”


또 다른 즐거움은 자전거 타기다. 안나의집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도시락을 나눈다. 유일한 휴일인 일요일, 김 신부는 자전거를 탄다. 한강을 따라 팔당댐까지 천천히 달린다.


세상은 부자·빈자가 함께 탄 배

‘돈 있으니 안전’ 한 것 아니라

같이 죽거나 같이 사는 것뿐


타인을 위해 내 것을 내놓는 것

이것이야말로 희망 아닐까요


- 코로나19 위기가 길어지며 모두가 어렵습니다.


“세상은 배와 같아요. 배 안에 부자도 타고, 가난한 사람도 타고 있어요. 부자들은 ‘나는 돈이 많으니까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몰라요. 하지만 배가 엎어지면 다 죽어요. 모두 같이 죽거나, 아니면 모두 같이 사는 길밖에 없어요. 지금도 누군가는 안나의집에 귤을 보내오고 주스를 보내오고 마스크도 보내옵니다. ‘나’만 생각하면 이렇게 못합니다. 이게 희망이라고 생각해요.”


김 신부는 지난 27일 페이스북에 사연을 올렸다. “며칠 전 도시락을 나누고 있는 시간에, 멋있게 운동복을 챙겨 입고 조깅하던 여자 한 분이 ‘이 줄이 뭐하는 줄입니까’ 물어보셨습니다. ‘노숙인들이 도시락을 받으러 줄을 서 계십니다’라고 설명해드렸더니, 즉석에서 갖고 있던 7만원을 주시면서 ‘신부님, 너무 적어 미안합니다’ 하곤 다음에 또 후원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이런 기적을 만나기에 그는 오늘도 두려움을 견디고 있을 터다.


김민아 선임기자 makim@kyunghyang.com

2021.02.03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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