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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위근우의 리플레이

드라마 ‘펜트하우스2’, 민설아와 배로나의 죽음에 대한 드라마의 책임

by경향신문

너무나 쉬운 죽음…한없이 가벼운 ‘도덕적 무게’

모든 드라마가 ‘이 짓’을 성공모델로 삼길 바라나

경향신문

하나의 작은 세계가 무너지고, 또 다른 거대한 세계는 높이 솟아올랐다.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 시즌 1 첫 화는 아직 시청자들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인물인 민설아(조수민)가 작중 주요 무대인 헤라팰리스 고층에서 추락하고, 그와 교차해 하늘을 뚫을 듯 솟아오르는 헤라팰리스 상공에서 폭죽 쇼를 벌이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집값” 펜트하우스인 헤라팰리스지만 그 높이는 무한할 수 없기에 카메라의 시선은 꼭대기에 멈추고, 역시 유한한 거리를 내려온 민설아의 몸은 헤라팰리스 로비의 석상 위로 떨어진다. 추락과 상승이 교차하고 화려한 폭죽이 터지고 한 생명이 사라졌다. 이 짧고도 강렬한 도입부 신을 완성하는 것은 마치 피에타를 연상시키듯 석상 품에 안겨 숨진 민설아의 피투성이 육체의 이미지다. 시즌 1의 상업적 성공 이후 역시 화제 속에 시즌 2가 방영 중인 지금 돌아보면, 이 첫 신은 드라마의 요약처럼 보인다. 화려한 상승의 꿈은 누군가의 추락 속에 이뤄지며, 화려한 파티의 끝엔 추락한 이의 비극적 흔적이 남는다. 이것은 되풀이될 수 있되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또 다른 누군가가 높은 곳에서 추락하고 그 추락을 발판 삼아 또 다른 누군가가 비상의 기회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추락해서 부서지고 흩어진 생명이 다시 솟아오를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가능한 건 두 가지다. 이 비극의 근원을 추적하고 추락과 상승의 악순환을 끊어버리거나, 계속해서 이 짓을 반복하며 추락한 시체들의 숫자를 늘려가거나.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듯, <펜트하우스>가 선택한 건 두 번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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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설아의 죽음으로 시작한 시즌 1은 심수련(이지아)의 죽음으로 마무리됐고, 최근 방영 중인 시즌 2 최근 화에서는 배로나(김현수)가 죽었다. 하지만 <펜트하우스>가 문제적인 건 단순히 무고한 인물들이 죽어나가서만은 아니다. 상승과 하강, 거의 모든 캐릭터가 한 회에서만 천당과 지옥을 세 번 이상 오락가락하는 서사의 롤러코스터에 시청자를 태우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운동에너지를 얻기 위해 누군가를 재기불능 상태로까지 추락시켜야 한다. 이것은 이미 본말전도의 세계다. 민설아가 죽어서 심수련과 로건 리(박은석)가, 배로나가 죽어서 오윤희(유진)가 복수귀가 되고 그들이 메인 악역인 주단태(엄기준)와 천서진(김소연)을 추락시키기 위해 애쓰는 게 아니다. 그 반대다. 계속해서 롤러코스터를 돌릴 동력을 위해 무고한 인물들이 희생되고, 그들의 희생을 알리바이 삼은 또 다른 상승과 하강의 복수극이 펼쳐지는 것뿐이다.


앞서 두 가지 길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이 세계의 인물들은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없고, 문제를 더 큰 문제를 일으켜 막으려고 한다. 로건 리는 주단태에게 실질적으로 사기를 쳐서 몰락시키려 했고, 오윤희는 천서진에게 복수하겠다며 하윤철(윤종훈)과 함께 기어코 헤라팰리스로 돌아와 함정을 판다. 시즌 2 들어 작품의 자극성이 더 커진 건 필연적이다. 문제를 덮으려면 큰 문제를, 큰 문제를 덮으려면 더 큰 문제가 필요하다. 이 끝없는 자극의 인플레이션과 쉴 새 없는 상승과 하강의 반복은 업그레이드된 김순옥 작가가 이른 한 경지다. 이미 첫 히트작인 SBS <아내의 유혹>에서 드라마 진행 속도의 일반적 개념을 바꿔버렸던 그는 이제 서사의 속도와 낙폭을 끊임없이 높이는 무한동력을 발명한 듯하다. 하지만 진정한 무한동력이란 없다. 다시 말하지만, 더 빠르고 더 낙폭이 커질 때마다 희생자의 목록은 늘어난다. 시청자의 시선이 이 죽음의 자리에 머무르는 순간, 무한동력의 마법은 깨진다. 핏자국은 빠르게 지워지고 롤러코스터는 더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인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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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펜트하우스>, 그리고 김순옥의 세계는 재현 윤리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을 만큼, 현실과의 거리감을 만들어낸다. 가발과 선글라스를 벗은 구호동이 로건 리가 되고, 미국에서 성대 수술을 받은 오윤희가 전성기 목소리를 되찾아 세계 최정상급 성악가 천서진의 목소리 대역을 맡는 세계에서 어떤 캐릭터의 죽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질문하는 것은 과도해 보일지 모른다. 당장 심수련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보이는 현재, 이미 무덤이 있음에도 정말 배로나가 죽었는지, 아니면 반전과 함께 돌아올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인정한다. <펜트하우스>는 그러한 세계다. 그렇다면 우리는 <존 윅>을 보듯 죄책감 없이 사망자의 숫자나 세고 있으면 되는 걸까. 정작 <존 윅> 시리즈 전체가 죄 없는 개의 죽음에 대한 애도로 이뤄졌다는 걸 차치하더라도, <펜트하우스>를 현실과 온전히 분리된 가상으로 즐기는 건 유희를 가장한 무책임함이다. 언젠가부터 ‘막장 드라마’라는 표현은 비판적 함의를 잃고, 오히려 장르적 세계에 대한 정당화처럼 사용되고 있다. 주단태는 인피니티스톤이 아닌 부동산 수익을 차지하기 위해 악행을 저지르며, 모두가 립싱크로 성악을 하는 모습에 실소가 나와도 명문 음대 진학에 대한 욕망은 낯설지 않다. 서사적 개연성보단 자극의 연속으로 이뤄진 세계지만, 바로 그 자극은 철저히 한국적인 맥락 위에서 작동한다. 이것은 결코 안전하게 분리된 가상이 아니다. 오윤희와 하윤철이 굳이 헬리콥터로 등장해 주단태와 천서진의 약혼식장을 날려버리는 건 웃으며 볼 수 있어도, 유제니(진지희)가 주석경(한지현) 패거리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은 끔찍하다. 전자의 헛웃음이 후자의 가학성에 대한 알리바이가 될 수는 없다.


어쩌면 <펜트하우스>의 진정한 해악은 무고한 캐릭터들을 쉽게 죽이는 것도, 그런 죽음을 그저 자극적 사건 중 하나로만 소비하고 마는 것도 아닌, 그러한 소비에 대해 시청자가 스스로에게 쉽게 면죄부를 발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일지 모른다. 그저 열심히 살았던 민설아의 죽음은 복수를 위한 로건 리의 등장과 오윤희가 살인범이라는 반전을 위해서 활용되지만, 그 로건 리와 오윤희가 딱히 이해할 수 없는 동기로 잠정적 동맹을 맺는 순간 그 죽음과 살인의 도덕적 무게는 한없이 가벼워진다. 그나마 둘을 연결해주는 최소한의 목적이 심수련의 죽음에 대한 복수라는 것을 떠올리면 이 작품에서 죽음과 살인이 얼마나 편의적인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이건 그냥 그런 드라마니까, 라고 넘어가게 될 때 작품의 재현 윤리에 대한 우리의 담론은 한없이 쪼그라든다. 미성년자인 민설아와 배로나의 죽음이 유독 흰 성상과 하얀 드레스와의 대비를 통해 더더욱 피투성이로 연출될 때의 선정성을, 이규진(봉태규)과 강마리(신은경)의 키스신의 선정성과 같은 층위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세계가 헤라팰리스의 세계보다 사악하거나 천박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 다시 한 번, 선택지는 두 가지다. 문제의 근원에 접근해 비윤리적 재현과 상업적 성공의 악순환을 끊거나, 이 짓을 반복하며 세상 모든 드라마가 <펜트하우스>를 성공 모델로 삼길 바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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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위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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