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書·畵 만개한 해남 땅끝마을에 가다
인문학 여행
역사·문학·미술 퍼즐로 완성한 해남
바티칸 비견할 세계문화유산 대흥사
끝은 또다른 시작…신개념 땅끝 힐링
해남 일지암 옆 숲속도서관에서 법인스님과 차담을 나눴다. 문을 통해 보이는 풍광이 일품이었다. |
어떤 여행지는 이미지가 너무 강력해 손해를 보기도 한다. 전남 해남처럼 말이다. 해남은 수십 년간 '땅끝 여행지'로 알려졌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해남-땅끝-마지막으로 자연스레 연결되는 사고 회로를 따라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디폴트 여행지'가 됐다. 브랜드가 약해 고민인 동네에서는 무슨 배부른 소리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해남군으로선 자기네 고장이 단지 연말에만 잠깐 들르는 땅끝마을로 기억되기엔 억울한 측면이 있다.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 역사와 맞먹는 세계문화유산 대흥사를 시작으로 '어부사시사'의 윤선도와 '자화상'의 윤두서, 시서화는 물론 다도까지 능했던 초의선사 등 해남의 자랑거리는 끝도 없다.
교과서는 살아 있다, 땅끝 해남에
숲속도서관 뒤로 펼쳐지는 두륜산 자락. |
지난 8일 해남행 KTX에 몸을 실었다. 서울을 조금 벗어났을 즈음 객실 한 칸에 일제히 알람이 울렸다. 더이상 놀랍지도 않은 '폭염경보', 왜 안 울리나 했다. 폭우와 뙤약볕 중 뭐가 더 최악일까라는 주제로 짧고도 의미 없는 토론이 이어졌다.
'땅끝'이라는 이미지 탓이다. 해남은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멀게만 느껴진다. 고속철도가 닿지 않아 광주 혹은 목포역에 내려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다. 광주송정역에 내려 준비된 버스를 타고 해남으로 향했다. 용산에서 광주송정역까지 1시간40분, 광주송정역에서 해남까지 1시간30분, 약 3시간 만에 해남 땅에 닿았다. 아버지가 고속버스로 7시간씩 걸려 해남에 다니던 시절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발전이다.
해남에서 첫 번째 한 일은 배를 채우는 것이었다. 남도에 왔으니 한정식으로 신고식을 해야지, 23년 된 한정식 진일관에서 거한 점심상을 마주했다. 간척지에서 생산한 쌀과 완도를 비롯한 인근 바다와 두륜산에서 나온 제철 식재료로 상을 차려내는 집이다. 상다리가 휜다는 말이 이런 걸 보고 하는 거구나. 홍어삼합과 떡갈비, 전복회, 갈비찜, 문어숙회, 육회 등 어림잡아 20가지가 넘는 반찬이 상을 빽빽하게 채웠다. 자리에 앉자마자 남몰래 슬쩍 상다리를 만져봤다. 더 놀라운 건 이것도 전과 비교해 훨씬 간소해진 거라고. 예전엔 젓갈 종류가 훨씬 많았단다. 역시 남도구나, 입으로 위장으로 내가 있는 곳을 인식한다.
먹고 났더니 마음이 유해진다. 농담 반 진담 반, 해남에서 예술인이 많이 나온 이유가 바로 이 넉넉함 때문 아닐까 추측해본다. 실제로 해남 윤씨 가문이 그랬다. 해남 윤씨 어초은파 시조 윤효정(1476~1543)이 백련동에 자리 잡은 이래 윤선도와 윤두서 등 걸출한 예술가가 세상에 나왔다. 이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장소가 바로 고산 윤선도 유적지다. 해남읍 연동 고산 유적지에는 600년 이상 이어온 종가 '녹우당'과 국보 제240호로 지정된 '윤두서 자화상' 등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문서와 그림 등을 모아놓은 유물 전시관 등이 모여 있다.
부끄럽지만 이번에 처음 알았다. 윤선도와 윤두서가 같은 집안 사람이라는 것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도 말이다. 윤선도 증손자가 윤두서다. 윤두서는 태어나자마자 큰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윤선도가 명리학 사주에 밝았는데 증손자 8명 중 공재의 사주가 제일 좋았다. 하여 태어나자마자 종손으로 입양했다. 윤두서는 일부러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인문 교양인을 자처했다. 벼슬에 나가 이름을 알리는 것보다 집안을 보살피는 것이 윤두서의 소임이었기 때문이다.
녹우당 현판부터 각종 서신과 도장 그리고 윤두서가 자화상을 그릴 때 사용했던 거울 등 다양한 유물을 지나 드디어 자화상 앞에 섰다. "그림 속 인물이 정면을 바라보고 나와 시선을 맞추고 있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워요. 사실적 묘사가 돋보이는 수작입니다." 이승미 행촌문화재단 관장이 설명했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자화상'을 처음 마주했을 때 든 생각은 존재감에 비해 그림 사이즈가 작다는 것이었다.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를 처음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스님과 차담에서 배운 것
맑은 계곡이 흐르는 해남 대흥사. |
이번 해남 여행이 흥미로웠던 것은 그동안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과 인물이 한데 모여 큰 그림이 완성됐다는 점이었다. 윤선도와 윤두서의 연관성이 그랬고, 윤두서와 초의선사 그리고 소치 허련과 김정희까지 이어지는 관계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학교에서는 각각을 배운다. 국어책에서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를, 미술책에서 윤두서의 자화상을 그리고 초의선사는 그저 다도에 능했던 스님으로, 소치 허련은 진도 지역 화가로만 알고 있던 단편적 사실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초의선사는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한 사람으로, 시(詩)·서(書)·화(畵)에 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스님이었지만 예술가인 동시에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친구였던 추사 김정희와 함께 강진으로 유배 온 정약용을 찾아가 유학을 배우기도 했다.
"당시 지성들과 문화예술인들이 함께 차를 마시며 차에 대한 시를 쓰고 그것을 공유했어요. 차가 신분과 사상을 초월해 교류의 매개체였던 거죠. 그 중심에 초의선사가 있고 그 도량이 일지암이었습니다." 일지암 암주 법인 스님이 말했다. 추사와 초의선사가 주고받은 편지 내용 대부분이 차에 대한 것이었단다. 초의선사가 차를 보내면 추사는 차에 대한 감상을 시로 적어 보냈다.
소치 허련은 본래 진도 사람이다. 허련은 그림을 배우고 싶다며 시(詩)·서(書)·화(畵)에 두루 능했던 초의선사를 찾아온다. 초의선사는 녹우당에서 공재 화첩을 가져다가 허련에게 그림을 알려준다. 그리고는 추사 김정희에게 허련을 소개한다. '남종화' 대가 소치 선생이 탄생하게 된 과정이다. 허련 집안은 200년이 넘는 동안 5대째 화가를 배출했다.
"다선일미(茶禪一味)는 '참선과 차를 마시는 것이 같은 맛이다'라는 뜻이에요. 차와 참선은 통합니다. 혼자 마시면 참선, 여럿이 마시면 교류가 되지요."
귀로는 스님 말을 담고 시선은 네모반듯하게 창틀이 오려낸 풍경에 집중했다. 스님과 함께한 차담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참선은 여전히 어렵지만 스님을 따라 차를 음미하는 동안 머리와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숨통을 옥죄는 듯한 더위도, 땅끝까지 짊어지고 왔던 걱정거리도 잠깐이나마 잊혔다.
여행정보
- 색다른 해남 여행을 원한다면 행촌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남도수묵기행'에 참여하면 된다. 한국관광공사가 인증한 '전통문화체험관광'으로 세계문화유산, 전통 남도 음식, 수묵 예술을 녹여낸 여행 프로그램이다. 9월 7~8일, 21~22일, 28~29일과 10월 3~4일, 19~20일 '남도의 가을, 달마고도 가는 길'을 테마로 수묵기행이 진행된다.
홍지연 여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