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못드는 당신에게…브람스도 곯아떨어지게 만든 이곡

[컬처]by 매일경제

19세기 위대한 음악가인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와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동시대를 살았지만 매우 다른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했다. 브람스는 바흐,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독일음악의 전통을 잇는 보수적인 음악을 했지만, 리스트는 기존 음악의 전통을 깨는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따라서 이들은 음악적인 측면에선 매우 이질적인 관계였다. 요새 정치권에서의 좌파와 우파 간 관계와 같았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브람스와 리스트가 실제로 대면한 적은 있었을까. 참고로 브람스는 독일 북부 함부르크 출신이고, 리스트는 헝가리 태생이다. 다행히 이들 두 음악가의 첫 만남에 관한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 있다. 리스트의 미국인 제자인 윌리엄 메이슨의 저서 'Memories of a Musical Life'에 따르면 브람스와 리스트의 만남은 1853년 6월 독일 바이마르의 리스트의 집에서 이뤄졌다. 당시 브람스의 나이 21세, 리스트의 나이 41세 때였다. 브람스는 유럽 음악계의 촉망받는 신예였던 반면, 리스트는 신음악파의 리더이자 최고의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인 스타 음악가였다.


젊은 브람스가 지인의 주선 덕분에 리스트 앞에서 자신의 곡을 연주할 기회를 갖게 된 상황이었다. 젊은 음악가가 거장을 찾아가 자신의 곡을 직접 연주하고 평가를 받는 일은 당시 매우 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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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브람스

하지만 웬일인지 이날 브람스는 매우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독일 북부 함부르크의 가난한 집안 출신인 브람스 입장에선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던 리스트의 모습이 왠지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다만 리스트가 처세에 밝고 속물이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리스트는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명성을 드러내놓고 과시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다만 음악계에서 그의 지위와 화려한 라이프스타일이 소박한 삶을 살아온 브람스와는 잘 맞지 않았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자리에서 브람스는 자신의 피아노곡 스케르초 내림마단조(E flat minor)와 피아노 소나타 1번 다장조(C Major)를 연주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당시 견줄 상대가 없는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리스트와 그의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연주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인지 브람스는 연주하길 주저했다. 브람스는 선배 음악가인 로베르트 슈만 앞에서도 같은 곡을 멋지게 연주해 슈만에게 "베토벤의 후계자"라는 극찬을 들었었는데, 리스트 앞에선 전에 없는 부담감을 드러냈다.


이 장면을 한번 상상해보자. "우리 선생님이 귀한 시간을 내 네 연주를 들어주시겠다는데, 왜 저렇게 질질 끄는 거야"라며 차가운 눈빛으로 브람스를 바라보고 있는 리스트 제자들의 눈빛이 눈에 그려지는 것 같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리스트가 "내가 한번 연주를 해보겠다(Well, I shall have to play)"며 직접 나섰다. 브람스를 향한 일종의 따뜻한 배려였다.


리스트는 브람스의 작품 악보를 쭉 훑어본 뒤 연주를 시작했다. 리스트는 초견 연주라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연주를 펼쳤고, 이에 열광한 제자들은 그가 얼마 전 완성한 피아노 소나타 나단조(B minor) 연주를 요청했다. "저 애송이에게 한 수 가르쳐 주세요"라는 무언의 시위였던 셈이다.


연주시간이 30~40분에 이르는 이 곡은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을 파괴한 작품이다. 낭만적인 서사와 리스트 특유의 화려하고 과시적인 기교가 어우러진 당시로선 상당히 급진적인 작품이었다. 반면 브람스의 곡은 바흐, 베토벤이 구축한 독일 음악의 전통을 잇는 보수적인 작품이었다.


제자들의 앙코르 요청에 리스트는 그야말로 화려하고 압도적으로 자신의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참사가 벌어졌다. 브람스가 리스트의 연주를 듣는 동안 졸음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보수주의자 브람스 입장에서 이 곡은 그저 여러 개의 주제가 산만하게 나열된 작품으로 들렸을 것이다. 전혀 관심이 가지 않는 작품을 계속해 듣고 있자니 밀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한 게 아닐까. 리스트 앞에서 연주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해소되면서 긴장이 풀린 탓이었을 수도 있다.


메이슨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리스트는 연주를 마치고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갔다고 한다. 브람스로선 대단히 민망한 상황이었을 테고, 리스트 제자들의 싸늘한 눈빛을 뒤로하고 도망치듯 리스트의 집을 나서야 했다.


사실 이 일화는 리스트의 제자의 시각에서 쓰인 것이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힘든 측면이 있다. 실제 메이슨은 브람스의 스케르초에 대해 이해하기 힘든 작품이라고 비판하고 있고, 브람스의 피아노 실력에 대해서도 "무미건조하고 감정이 결여됐으며, 해석은 적절하지 않다. 연주자라기보단 작곡가의 피아노 연주"라고 폄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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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왼쪽)와 리스트

하지만 메이슨이 전한 살벌한 분위기와 달리 리스트는 이후에도 여러 모임에 브람스를 초대하며 상당한 호의를 베풀었다. 리스트는 무엇보다 브람스 작품에서 엄청난 가능성을 발견했고, 미래의 대가에 상당한 애정을 드러냈다.


브람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한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전환되는 시기였던 19세기 초 최대 문제작이었다. 소나타는 기본적으로 두 개의 주제(1주제와 2주제)가 등장한 뒤, 이를 재료 삼아 음악을 발전시켜 나가는 형식인데, 리스트의 소나타에선 전통 소나타 형식에서의 주제의 발전이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또 소타나는 최소 3개 악장으로 구성되지만 이 곡은 악장이 하나뿐이다.


게다가 이 곡에선 굉장히 화려하고 기교적인 악구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해 당시 고전주의 음악가들이 듣기엔 산만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채색적인 부분을 걷어내면 인간의 세속성과 종교성 간 대립이라는 주제가 큰 골격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연주가 진행될수록 구원을 향한 구도자의 열망과 환희가 느껴진다.


비록 브람스는 곯아떨어졌지만, 이 곡은 현재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면 반드시 도전해보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수현 기자]

2021.02.1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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